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의 빈민들에게 대출을 해 주어 일자리를 주선하거나 소규모 사업을 지원하여 빈곤으로부터 자립하도록 만드는 NGO로 알려져 있다. 창립자인 무함마드 유누스가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유누스가 제시한 마이크로파이낸스는 빈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롤모델로서 주목을 받았다. 1986년부터 1억 세대가 넘는 방글라데시의 빈곤층이 그라민 은행으로부터 혜택을 받아 빈곤에서 벗어났고, 그라민 은행의 사업 자체도 98%의 높은 회수율로 안정적 사업 기반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그런데 방글라데시 출신의 여성 인류학자가 쓴 <가난을 팝니다>는 그러한 그라민 은행의 신화의 이면에 숨겨진 실상을 그려낸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현지인들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단순히 "말만 NGO지, 대부업체나 다름없네"라는 폭로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듯하다.
방글라데시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이 나라도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47년, 이슬람교가 대다수였던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의 일부(동파키스탄)로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현재의 파키스탄)은 우르두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하는 등 방글라데시를 일종의 식민지로 보고 있었고, 벵갈어를 사용하는 동파키스탄은 이에 반발하여, 1971년 인도의 지원을 받아 서파키스탄과의 독립전쟁 끝에 방글라데시로 독립하였다. 이후 쿠데타를 통한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그 다음에는 이슬람화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방글라데시는 독립 이후 줄곧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고,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국가의 부재라는 틈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 그라민 은행 같은 NGO들이었다.
저자는 그라민 은행이 선전하는 빈곤 퇴치의 성과가 다분히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라민 은행을 비롯한 마이크로파이낸스 NGO들의 주요 고객들은 농촌의 가난한 여성들인데, 이들은 복수의 NGO들로부터 돈을 빌려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고, 마이크로파이낸스 이후 사채업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라민 은행을 비롯한 NGO들은 대출자 그룹을 조직하는 등, 농촌 공동체의 압력을 행사하여 대출금 상환을 종용하였고, 공개적 모욕을 주거나 집을 부수거나 경찰을 동원하는 등의 갖가지 방법으로 대출금을 회수한다. 결과적으로 그라민 은행의 대출로 빈곤에서 탈출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 책을 읽으며 어디선가 읽은 NGO 활동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NGO는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모든 NGO가 자선단체인 것은 아니며, 마이크로파이낸스 NGO들도 빈민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갚도록 하기 위해서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거듭 지적하듯이 마이크로파이낸스 NGO들이 대출금을 회수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타난 마이크로파이낸스 NGO들의 실체가 각종 언론이나 연구에서 선전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NGO나 사회적 기업 모델을 이상화하는 대신 그 성과와 부작용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파악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