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황태성사건의 전모
김학민.이창훈 지음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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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열 두 살 차이 나는 형 박상희는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1946년 10월의 대구의 좌파 시위에서 경찰에 피살당했다. 해방 후 국군에 들어가 있던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이후에 진행된 숙군사업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 받고 무기징역을 언도 받는다. 이후, 군 내의 남로당 조직 등을 실토한 박정희는 백선엽 등의 구명으로 형을 면제 받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군에 다시 들어가고 1961년, 5.16 쿠데타를 벌인다.


5.16 쿠데타에 대해 북한은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남로당 활동을 한 전력이 있고 이집트 나세르의 민족주의를 표방한 박정희에게 기대를 걸게 된다. 그리하여 일제시대 경북 지역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월북한 황태성을 한국에 몰래 내려보낸다. 황태성은 박상희, 박정희 형제와도 친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월남하여 조카 부부를 만난 황태성은 얼마 되지 않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여기서 황태성은 간첩죄 혐의를 받지만, 이 책은 황태성이 간첩이 아니라 박정희, 김종필에게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하려던 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형을 선고받고 나서 미군의 취조를 받은 황태성은 1963년 12월 14일, 박정희가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사흘 전에 처형당한다.

재심 청구 중이던 중의 갑작스러운 사형 집행 배경에는 그해 있었던 대통령 선거의 영향이 있었다. 원래 민정이양을 약속했던 박정희는 군정을 연장하려 했지만, 좌익 경력이 있었던 박정희의 쿠데타를 미심쩍게 여겼던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박정희는 전역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대선에 출마하였는데, 대항마로 출마한 윤보선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선거전을 치러야 했다.

이 선거전에서 윤보선은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색깔론으로 공격하였는데, 박정희 정권이 감추고 있던 황태성 사건도 공세의 재료가 되었다. 윤보선 측이 제기한 의혹은 황태성이 가지고 온 20만 달러가 공화당 창당에 사용되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이만희라는 별개의 간첩의 소지금 20만 달러가 중정에 의해 KBS 설립에 이용되었던 사실이 와전된 것이었다.(328,329)

박정희 측은 윤보선의 색깔론을 매카시즘이라 주장하며, "우리들은 이제 이 나라 사회의 근대화 작업을 끈덕지게 방해하고 있는 일체의 매카시즘을 타도, 청소해야 할 공동의 전선에 섰습니다. (중략) '참다운 반공'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참다운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 하고 자기들의 정치 기반인 전근대적인 유제가 위협을 당하면 '용공'이니 '빨갱이'니 하는 상투적인 수어로 상대세력을 학살시켰던 것이 한국적 매카시즘의 아류들이 저질러온 행적이었습니다"(383)라는 반박을 제기한다.

결과는 16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박정희가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된다. 박정희는 다른 지역에서는 윤보선에 뒤졌지만, 영남과 호남, 제주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선된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색깔론에 대한 반발이라는 해석이 상당히 신빙성 있게 제기되곤 한다(377).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의 박정희는 주지하다시피 북한과의 대결자세를 강화하며 갖가지 긴장 국면을 만들어냈고, 인혁당 사건 등의 용공사건을 조작하며 반대파를 억압하는 데 매카시즘을 사용하였다. 박정희는 모순에 가득찬 인물었다.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 한일협정을 맺었지만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일본 문화를 금수조치하였고, 남로당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을 명분으로 독재체제를 유지했다. 만주군과 남로당 경력에 대한 박정희의 개인적 컴플렉스가 오늘날까지 매카시즘이 횡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한국 현대사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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