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마라는 소재의 내피에 감춰진 ‘늙어감‘의 문제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1인칭 화자가 열여섯 살부터 마흔다섯 살까지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라는 것이다. 그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괴물이 된 데는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와 군사독재의 어둠이 있으리라는 암시가 있다.  '은희'라는 수양 딸을 키우면서 살인을 그만두고 평온한 삶을 살던 화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되고, 딸의 주변에 또다른 연쇄살인마로 의심되는 '박태주'가 등장하면서 화자는 연쇄살인마와의 마지막 대결을 준비한다는 것이 소설의 대략적인 소재다.

알츠하이머 환자인 화자는 소설 기법상으로는 전형적인 '신뢰할 수 없는 화자'에 해당한다. 아이덴티티라는 말에는 '동일성'이라는 의미가 있다. 무엇과 무엇이 동일한가 하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내일의 나가 같은 자아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한 동일성의 근거가 되는 기억이 분열되는 증상으로 인해 매일 쓰는 기록에 의지하여 기억을 재구성하고 자아를 재구성해야 하는 화자에게는 그러한 동일성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다. 다음은 그러한 동일성의 분열을 나타내는 묘사다.

"같은 사람이 아니야."

은희는 친구에게 말했다.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다고 했다. 조금 전이 다르고 방금이 다르고 잠시 후가 다르다고 했다. (중략) 어떨 때는 조금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 하는 명백한 치매 같다가도 어떨 때는 너무너무 멀쩡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했다. (30)

결국 자아의 동일성의 위기는 소설 후반부에 충격적인 파국으로 귀결된다. 권말에 수록된 권희철의 해설이 말하듯이 "<살인자의 기억법>은 세계가 무녀져내리는 공포 체험에 대한 기록이다"(157,158)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하다고 여겨졌던 자아의 동일성의 부정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붕괴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고전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로부터 유래하는데, 이 소설은 오이디푸스의 설화를 직접적으로 원용하면서 그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오이디푸스는 길을 가다 홧김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처음 읽고는 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잊어버리다니.(중략)

오이디푸스가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은 거기 있을 것이다. 닮았지만 좌우가 뒤집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살인자였지만 자기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인지도 몰랐고 나중엔 그 행위마저도 잊어버렸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자멸한다.(중략)

오이디푸스는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 (128, 129)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 있고 재미있게 읽히고, 충격적 반전의 여운도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그런데 몇 가지 부분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와 그 사실을 모르는 딸의 심리 스릴러라는 점에서는 손예진과 김갑수가 주연한 영화 <공범>이, 알츠하이머 환자의 망상이 반전의 축이 된다는 점에서는 박근형과 윤여정이 주연한 영화 <장수상회>가 떠오른다. 기억이 불안정한 화자의 추리 스릴러라는 점에서는 소설 <걸 온 트레인>이 연상되고, 소설이 기대고 있는 반전의 성격은 영화 <식스센스>나 <아이덴티티>를 연상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린 작품은 박범신의 <은교>였다. 두 소설은 1. 소설의 주인공이 늙은 시인이며, 자신이 늙어간다는 자각을 주제를 삼고 있다는 점. 2. 주인공이 집착하는 젊은 여성이 등장하는데 둘의 이름은 각각 '은교'와 '은희'라는 점. 3. 그 젊은 여성과 연애 관계에 있는 젊은 남성이 등장하고, 그에 대해 주인공이 강한 질투와 증오를 느낀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요컨대 <살인자의 기억법>은 연쇄살인마라는 충격적인 소재의 내피에 '늙어감'이라는 보편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노인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