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 한국어를 잘 이해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법
이강룡 지음 / 유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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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SBS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종석이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이 들리는 초능력자 역할을 맡아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드라마 속에서 이종석은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어 고통스러워한다. 나도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을 원치 않게 알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면 끔찍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를 읽고 뜬금없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떠올린 이유는 이 책의 저자 이강룡 씨가 겪고 있을 고통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 주인공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황당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문화센터에서 번역과 작문을 강의하고 있는 저자가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한국어 문장의 오류들이 너무나 많이 발견하고 있기 때문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 주인공처럼 일상생활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책에서 들고 있는 잘못된 한국어 문자 사용례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이 책에 나타난 저자의 생활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저자가 사는 아파트 단지 관리 사무소에서 내건 "쓰레기 분리수거 요망" 문구를 보고 "쓰레기 분류 배출 요망"으로 바꾸고 싶고, 파주시 교하도서관 남자 화장실 벽에 붙은 범국민손씻기운동본부의 "건강을 지키는 3가지 약속, 6단계로 실천하세요. 5늘부터" 표어를 보면 "5늘부터"가 마뜩찮다.

 

 

하나로마트에 가면 수레를 보관 하는 장소에 "카트기 보관소"라는 문구가 있는데, 카트는 수레라는 뜻이므로 카트기는 중복이라 잘못되었다 느끼고, 현대백화점 킨텍스점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나오는 "문으로부터 물러서 주십시오"라는 안내방송도도 "문에서 물러나 주십시오"라는 표현이 한국어로서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자, 전철에 적힌 "일/공휴일에 한하여 전동차의 맨 앞뒤 칸만 자전거 휴대 승차가 허용된다"는 문장을 보고, 일요일도 공휴일에 포함되므로 잘못된 문장임을 지적한다.

 

 

집에 와서 밥을 하려고 보니 전기밥솥이 "백미,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라고 말하는데, "맛있는 취사"가 어떻게 가능하냐며 불만스럽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대증 요법"을 "대중 요법"이라고 발음한 것이 신경쓰이고, 뉴스 프로그램에서 "지금까지 이강룡이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이강룡이 전해 드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옳다고 느낀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한국어 오류들만 해도 이렇다. 저자의 직업상 읽어야 하는 문화센터 수강생들의 작문들, 신문이나 책들에서 발견하는 오류들은 헤아릴 수 없다. 이쯤 되면 피곤해서 차라리 모르고 사는 편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조차 든다. 저자의 남달리 해박한 한국어 실력은 마치 다른 사람의 속마음이 들리거나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 보이는 초능력이나 다름없게 느껴진다. 그만큼 저자의 한국어 지식이 초능력자에 가깝다는 뜻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잘못된 한국어 문장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 한국어 문장으로 고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위에 나오는 내용은 이 책에 나오는 예들 중 극히 소수를 옮겼을 뿐이다. 평소에 책을 즐겨 읽고, 글을 자주 쓰는 입장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이 많이 나와 배우는 점이 많았다. 특히 번역을 할 때, 어떻게 하면 더 한국어로서 자연스럽게 읽힐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대체로 배울 점이 많은 책이지만, 저자가 지나치게 원리원칙만을 고수하고 있다는 인상 또한 받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 말이다.

 

 

"성남에 살아요?"

"아뇨, 분당이오."

 

 

"고향이 고양시에요?"

"일산이에요." (156, 157)

 

 

위의 대화에 대해 저자는 "분당구는 성남시의 일부이며 일산동구와 일산서구는 고양시의 일부이니 이렇게 답하면 파충류는 싫어하지만 거북은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며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행정구역상으로는 저자의 말이 맞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분당이나 일산 주민이 그 외의 성남이나 고양 주민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분당에 사는 내 친구 말로는 분당 사람들은 분당 외의 성남을 "구성남"이라고 부른단다. 경상도가 고향이냐는 질문에 울릉도라고 대답하면 잘못일까? 미국인이냐는 질문에 푸에르토리코인이라고 대답하면 잘못일까? 육군이냐는 질문에 카투사라고 대답하면 잘못일까?(카투사도 엄연히 대한민국 육군 소속이다.) 대화의 문맥에 따라 분당이나 일산을 성남이나 고양보다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저자는 "소방 당국은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이다" "즐거운 추석 되세요"를 각각 "소방 당국은 화재 원인을 정확히 밝히려 조사 중이다" "추석 명절을 즐겁게 보내세요"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정확한 화재 원인'과 '즐거운 추석'이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화재 원인'이 있어 이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고, '추석'이 있어 이날을 즐겁게 보낸다는 게 조리와 순서에 더 맞"(186)기 때문이라고 한다. "즐거운 추석 되세요"가 안 된다니! '즐겁지 않은 추석'이 될 가능성도 있지만, "즐거운 추석"을 보내라는 의미에서 하는 덕담인데, 이 정도는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올바른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실생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언어 사용과 지나치게 괴리된 문법적 원칙만을 강조하는 것도 영 꺼림칙하다. 물론 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를 "조심히 들어가세요"라고 말하는 작금의 언어 혼란이 달가운 것은 아니나, 언어란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법이기 때문에, 다소 고깝게 여겨지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라는 제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1장은 "좋은 글 고르기"라는 제목으로 '주제가 명료한가' '출처가 정확한가' '근거가 충분한가' '책임이 분명한가'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번역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어서, "번역자를 위한" 내용이 아니라, 직접 문장을 쓰는 작가를 위한 내용에 더 적절한 것 같다. 번역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원문의 주제가 불명료하다고 해서 주제를 명료하게 만들 수 없는 일이고, 불충분한 근거를 보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글 고르기"라는 관점에서 주제가 명료하고, 출처가 정확하고, 근거가 충분한 글을 번역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상당수 번역자들이 번역 원고를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의뢰 받는 입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번역자에게는 다른 부분에 비해 덜 유용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번역은 외국어 실력에서 시작하여 한국어 실력에서 완성된다"고 말한다. 번역된 책을 읽다보면, 혹은 직접 번역을 하다보면 단순히 외국어를 잘 안다고 해서 번역을 잘 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좋은 번역을 위해선 무엇보다 한국어로 자연스럽고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강조하는 이야기다. 이 책을 통해 어떤 번역이 좋은 번역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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