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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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이 가진 기능 중 하나는 사람들이 당연시하고 있던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쩌면 영국의 어느 기차역 9와 4분의3 승강장에는 마법학교로 가는 기차가 있는 것은 아닐까?(<해리포터>) 어쩌면 인간 외에 엘프와 호빗, 오크 같은 종족들이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을까?(<반지의 제왕>) 어쩌면 로봇들이 인간을 대체하지는 않을까?(<로봇>) 어쩌면 인류가 좀비의 창궐에 의해
멸망하지는 않을까?(<세계전쟁Z>) 등등 장르문학이 제기하는 상상력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해체시킨다.

추리소설, 혹은 스릴러소설은 우리가 무언가를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처럼 처음부터 독자에게 모든 사실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예외도 있긴 하다.) 추리소설은 마법사나 드래곤, 장풍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일상세계에서 충분히 가능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기에 세계에 가장 본질적인 균열을 만들어낸다.

<걸 온 더 트레인>은 어느 여성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이다. 레이첼은 직장을 잃고 할일없이 지하철을 타고 오가는 알콜중독자다. 때때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기억을 상실한다. 그녀는 매일 지하철 차창 너머로 이혼당하기 전에 살던 동네를 구경하는데 행복해 보이는 부부에게 '제스'와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을 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차창 너머로 '제스'가 누군가와 바람을 피우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얼마 후 그 '제스,' 알고 보니 본명은 메건이었던 여자가 실종되었고, 남편인 '제이슨,' 알고 보니 본명은 스콧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는 사실을 뉴스로 접하게 되고, 사건의 해결을 위해 나서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 당일 레이첼 자신이 술에 취해 아무런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 자신에 메건의 실종사건에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본인의 기억상실로 인해 확신을 할 수 없다. 전남편인 톰, 메건의 완벽한 남편처럼 보였던 스콧, 메건의 상담사였던 카말 아브디치 등등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그리고 레이첼 본인 역시 의심스럽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두 손에 피를 묻힌 채 굴다리 아래 웅크리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두 손에 피를 묻힌 채. 내 손이 확실한가? 내 손일 수밖에 없었다. (107)
"그래서 내가 애나인 줄 알고 메건 히프웰을 해코지했다고요? 그런 얼빠진 얘기는 처음 들어보네요." 난 이렇게 말했지만, 머리에 난 혹이 또 욱신거렸고, 토요일 밤의 모든 것은 여전히 시커먼 암흑 속에 있었다. (124)

자기 자신마저도 믿을 수 없는 상황, 그러한 가운데 레이첼은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진실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균열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레이첼은 알콜중독증 때문에 기억이 불완전한, 따라서 주체의 통합성이 불안정한 인물이다. 이 소설은 레이첼이 메건 실종사건(나중에 살인사건이었음이 밝혀진다)을 파헤치면서 자기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레이첼이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이유가 남성의 가정폭력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레이첼은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불임으로 인해 이혼을 당했고, 메건은 젊은 시절 결혼을 하지 않은 책 아기를 낳았다가 죽게 만든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다. 그들의 주체성 확립을 돕는 인물이 보스니아 출신의 정신과의 카말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수자인 카말이 백인 남성의 폭력성을 극복하고 여성의 주체성 회복에 일조하게 된 것이다.
 
이 추리소설은 살인사건을 통해 일상을 전복하고 그 과정을 통해 억압받고 제거되었던 여주인공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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