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살고 죽고 - 20년차 번역가의 솔직발랄한 이야기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 일본 논픽션을 한 권 번역하게 되었다. 이후 명함도 만들고, "번역가"를 자칭하기 시작했는데(이 책을 읽고 나니 참칭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이후 출판되는 책이 없어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 번역가로 유명한 권남희 씨의 번역 에세이 <번역에 죽고 살고>를 읽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일본 책은 원서로 읽는 지라 권남희라는 이름이 익숙하지는 않았는데, 번역 경력이 20년이 넘는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온다 리쿠, 미우라 시온, 아사다 지로 등 일본 유명 작가들의 소설을 100여권 넘게 번역하신 분이라고 한다.

번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 번역가의 일상에 관련된 에피소드들, 번역에 대한 노하우까지 내용이 아주 충실하다. 게다가 경쾌한 문장은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막 번역가 생활을 시작했던 저자가 일본에서 소설들 몇 권에 대한 검토서를 써서 출판사에 보낸 에피소드는 재미있다.

"이름이 바나나야? 토마토 아니고? 에쿠니 가오리? 앗싸 가오리? 내용이 뭐 이래. 이런 걸 누가 읽어요." 검증되지 않은 일본 작가들의 책을 선뜻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검토서를 돌렸던 책이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N·P』 『슬픈 예감』이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일본 소설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작품드이고, 두 작가의 아성은 더 이상 설명 불필요할 정도다. 2002년도에 먹혔던 책을 1993년에 기획했으니, 너무 앞서갔던 나는 번역계의 이상(李箱)이었던가. (37)

번역가가 기획서를 써서 출판사에 번역을 제안하는 경우, 필요한 것은 안목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어지간한 일본 작가들의 이름은 알려져 있어, 레드오션이 아닐까 싶지만, 일본 소설을 번역하고자 한다면, 일본 문학계에 안테나를 두고 먹힐 만한 신인작가들을 발굴해 내려는 패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오래된 일본 소설들 중에 번역이 아직 안 된 소설들을 번역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나 또한 예전에는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자가 말하는 번역가의 현실은 이렇다.

번역을 하고 싶다고 문의하는 친구들의 메일을 보면 번역에 대한 생각이 너무 안이하고 단순하다. 영어 책만 해석할 수 있으면 누구나 번역을 할 수 있는 줄 안다. 번역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일거리가 뷔페 식으로 차려져 있는 줄 안다. 매달 한 권은 뚝딱 번역할 수 있을 줄 알고, 적어도 월수입 300만~400만 원은 되는 줄 안다. 설상가상, 번역은 시간 날 때 틈틈이 하면 되니까 다른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 해석 잘해도 국어 실력 없으면 번역은 꽝이다. 번역을 하고 싶어도 일거리 별로 없다.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기 때문에 신참에게까지 돌아갈 일거리가 많지 않다. 있어도 번역료가 아주 낮아 생활이 힘들다. 매달 한 권씩 뚝딱 하려면 꽤 긴 수련을 해야 하고, 그나마라도 일이 열두 달 내내 있기만 하면 좋겠지만, 뛰어난 실력자가 아니라면 번역 시작하고 나서 10년이 지나도 그러기 힘들지 모른다.
(51, 52)

번역의 실전 편에 이르러서는 감히 번역가를 참칭하고 다녔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문장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 구두점 하나 하나에도 고민과 요령이 필요한 것이 문학 번역이다. 사투리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고문(古文)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잘 구분해서 번역할 것인지, 내가 소설을 번역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졌다. 그러고 보면 내가 번역한 <거리로 나온 넷우익>은 별다른 고민 없이 번역할 수 있는 쉬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문학 작품 번역과 비문학 작품 번역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번역가에게 가장 큰 찬사는 "일본 소설을 고를 땐 권남희란 역자의 이름을 보고 고른다"(8)는 말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번역가가 되고 싶다.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훌륭한 책이다. 번역가, 특히 일본어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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