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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위기 - 국제관계연구 입문
E. H. 카 지음, 김태현 옮김 / 녹문당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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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의 진보를 확신하며, 오크셧이나 포퍼, 랑케 등 보수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국제정치에서는 (보수주의에 보다 가까운) 현실주의 이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었기에 당황스러웠다.

E.H.카의 현실주의 정치이론이 가장 잘 드러난 이 책 <20년의 위기>는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베르사유체제가 1919년부터 히틀러의 도발로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의 20년을 위기의 시대로 간주하며, 그 원인을 베르사유체제의 지나친 이상주의에서 찾는다. 그러한 이 책의 요지를 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919~39년간 위기의 특징은 첫 10년간에는 온갖 희망에 차 있다가 그 다음 10년간에는 엄청난 절망으로 급전직하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현실을 무시한 이상에서 이상을 잃은 현실로 급작스럽게 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1920년대 신기루는 그 이전 한 세기의 뒤늦은 회고라고 할 수 있다: 영토와 시장의 끊음없는 확장; 확고한 자신감과 큰 부담이 없는 영국 패권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세계; 상호간의 갈등은 공동의 개발과 착취의 영토로 점진적 팽창을 통해 해소되는 "서방문명"; 개인에게 좋은 것은 사회에게도 좋고 경제적으로 옳은 것은 도덕적으로도 옳다는 손쉬운 가정의 시대가 바로 그때였다. 이와 같은 유토피아에 그 내용을 부여하였던 현실은 19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따라서 1919년의 유토피아는 공허하고 내용이 없었다.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았던 그러한 유토피아는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265)

카는 이 책에서 각 국가들의 행동을 제약할 초월적 세계정부가 없다는 점, 즉 국제정치이론의 핵심이 되는 국제사회의 무정부성을 주장한다. 당연히 국제연맹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또한 몽상주의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독일의 슈데텐지방 병합을 영국과 프랑스가 인정한 뮌헨회담에 대해, 카는 "프랑스 외상 브리앙이 "평화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말했을 때, 혹은 영국 외상 이든이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은 없다"고 말했을 때, 그 속셈은 평화가 유지되는 한 프랑스나 영국에 불리한 현상변경은 없을 것이라는"(111) 뜻이라고 냉소적인 해석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카가 이상주의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카에 따르면, 철저한 현실주의는 "확고한 목표, 정서적 호소, 도덕적 판단, 행동의 기준"을 배제한다(117). 카는 이러한 현실주의적 전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단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사가 인간의 행동과 생각에 의해 지배되고 변화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것은 곧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현실주의자들도 그러한 명제를 부정한 적은 없다.(중략)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건전한 정치사상은 이상과 현실 모두에 기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상주의가 공허하고 특권층의 기득권을 대변하는, 참을 수 없는 겉치레가 되면 현실주의는 그 가면을 벗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순수한 현실주의는 적나라한 권력투쟁 외에는 대안적인 모습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제사회란 불가능해진다.
(122)

이 부분을 보면, 카의 국제정치이론을 단순히 현실주의로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카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건전한 대립과 상호보완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오히려 모종의 국제사회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상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한 이상주의적 성격이 <역사란 무엇인가>의 진보적 역사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균형과 중용이 필요하다는 카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보였던 카의 때로는 위트있고, 때로는 신랄한 문장은 이 책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다. 또한 70년 전에 쓰인 책인데, 현재에도 충분히 유의미한 통찰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카의 혜안이 돋보인다. 예를 들어 "민족자결은 분리주의 운동을 항상 열어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르 해체시키고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탄생시킨 운동은 곧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301)라는 카의 예언은 약 40년 뒤인 1990년대에 현실이 되었다. 국제정치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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