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지금은 유행이 좀 지난 감이 있지만, 작년 한 해는 일베에 대한 화제로 대한민국이 들썩인 한 해였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비하논란, TV매체에 올라온 각종 합성사진, 할아버지 자살인증을 비롯한 패륜적 행위들. 나 또한 '일본의 일베'라고 불리는 재특회를 다룬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라는 책을 번역하고 나서, 일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일이 늘었다. 일본 잡지에 일베를 소개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일베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거나 쓰면서 불편함과 불쾌함을 느껴야만 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일베를 몇 주간 눈팅했을 때, 그곳의 게시물들을 보면 짜증을 느꼈다.

 아마 이 책의 저자 또한 그러한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베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사상을 발견해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썼다는 점에서는 의미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일본의 넷우익을 다룬 <거리로 나온 넷우익>만으로 일베를 설명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있다. 저자 또한 재특회와 일베를 동일한 선상에서 논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일베는 인종주의라든지 어떤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싶어 하는 네오나치와도 다르고, 결국은 현실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본의 혐한 시위대와도 다르다. (중략) 혐한 시위를 주도하는 일본 넷우익은 오히려 일베인들이 혐오하는 순진한 유형에 더 가깝다. (중략)
 물론 이러한 일본의 넷우익과 일베 이용자들 사이에 표면적인 유사성이 없지는 않다. (중략) 하지만 일베 유저들에게 자신의 자존감을 현실의 강한 국가에 의해 보증 받으려는 욕망 같은 것은 없다.
(221,222)

 조롱과 유희에만 관심이 있는 일베와 진지하게 시민운동을 지향하는 재특회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일베의 사상>이라는 제목에 대해 "일베에 사상 따위가 있느냐"라는 식의 비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목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암묵적으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을 참조했다. 그는 사상적 동기가 결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일본인들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사상적 의제가 있다고 말하며 이를 분석하고, 거기서 '일본의 사상'이라는 모티프를 가져온다. 사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사상성의 존재를 포착해야만, 비로소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그의 기본 관점에 이 책은 빚지고 있다. (18)

 <일본의 사상>의 문제의식을 수용해서 <일베의 사상>을 썼다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얼마 전, 저자는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이라는 책을 썼는데, 일본의 현대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해설한 책이다. <일베의 사상>에서도 가라타니 고진과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을 인용하여 일베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 현대사상에 대해서 저자는 상당한 조예가 있는 듯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베란 무엇인가에 대해 "일베 자체가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두가 동등하게 혐오할 권리를 나눠 갖는 평등한 형제애의 공간에 관한 유토피아에 기반을 두고 있"(149)다고 말한다. 일베는 진보좌파의 가치관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촛불시위와 같은 진보좌파의 움직임을 "감성팔이"로 몰아 비판한다. 따라서 일베는 "팩트"(실제로 팩트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하지만)를 중시하며, 감성의 영역에 속하는 이상에 대해서는 회의주의로 응대한다. 저자는 일베의 "위악적이고 공격적인 행태는 그들의 몰이상, 아니 몰이상의 이상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146)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일베가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비하하는 이유는 민주화운동이 이미 '성역화'된 것에 대한 가치전도를 의미한다. 원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민주화'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 또한 그러한 가치전도의 일종일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베의 행동원리를 "낭만적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마는, 감성적인 자기 자신을 메타레벨 위에서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초월론적 의식을 불러온다"(155)는 것이다. 일베 유저는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한심하고 찌질한 것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한 일종의 캐릭터를 연기함으로써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유희로서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회학자 기타다 아키히로(北田暁大)는 2005년, <조롱하는 일본의 내셔널리즘>이라는 책에서 당시 일본에서 넷우익의 2ch의 사상적 기반을 미디어에 대한 아이러니라고 분석한 바 있다(그러나 그러한 메타레벨의 아이러니를 즐기던 일본의 넷우익이 이후에 재특회와 같은 위험한 오프라인 조직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 기타다의 분석이 적절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일베의 사상"이라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는 3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일베의 사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촛불시위에서의 좌절 경험이라고 말한다. 일베의 문제로 지목되고 있는 배타성이나 조롱이 실은 인터넷에서 진보좌파진영의 전유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베가 "촛불시위의 쌍생아"라는 저자의 지적은 수긍할 만하다.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이 좌절되면서 그 환멸을 아이러니적 공동체로 수용하여 탄생한 것이 일베라는 것이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정상국가"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분단상태에 있기 때문에 통일된 국민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정상국가가 아니라는 의미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베(와 촛불시위)의 멘탈리티를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또 하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 것은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데이터베이스의 구체적 사례를 일베와 같은 커뮤니티를 통해 분명히 볼 수 있다. 일베에 저장된 각종 유머 자료들은 인터넷에 존재하는 온갖 정념적 무의식의 단편들을 보여준다. (중략)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일베와 같은 유머 커뮤니티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데이터베이스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아즈마의 논의 속에서 데이터베이스는 스스로 '말하는'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데이터베이스에 획기적인 의미를 부여해도 그것은 여전히 시민사회의 무의식적이고 단편적인 욕망과 정념들을 '기록'해서 보여주는 수동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베는 그 '스스로 말하는' 데이터베이스라고 할 수 있다. (218)

 내가 아즈마 히로키를 읽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데이터베이스가 기록만 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을까? 일베가 됐든 2ch이 됐든 블로그가 됐든 그곳에서 기록되는 것은 개개인의 주관적 발언들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일베라는 데이터베이스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스스로 말하는 주체는 일베의 유저들이지, 일베라는 데이터베이스 그 자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두고 일베가 데이터베이스로서 스스로 발화하는 주체라고 본다면, 역으로 모든 데이터베이스는 스스로 말하는 주체이며, 일베가 특수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해가 잘 안 된 것은 일베 등에 보이는 인정투쟁을 "국가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투쟁," 즉 맑스가 말하는 계급투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가 말하는 계급투쟁은 생산구조의 관계가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가? 저자는 "시민사회에 존재하는 계급 적대는 다양한 대중 분파와 지배세력 분파 사이의 갈등과 협력관계의 모습으로 '전치'되고 '응축'된다"(205)고 말하는데, 과연 일베가 그러한 계급투쟁의 사례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계급투쟁 아닌 게 없는데?

 그런 지엽적인 문제들이야 어쨌든 어쨌든 사상적 관점에서 일베에 대해 분석했다는 저자의 시도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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