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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 그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
알렉스 커쇼 지음, 윤미경 옮김 / 강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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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이야말로 최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다." -로버트 카파(pp.66) 

  사진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내가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친했다는 일화 때문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그리고 잉그리드 버그만 등 20세기를 뒤흔든 인물들과의 교유로도 유명한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지난 달에 서울에서 있었던 '로버트 카파 생탄 100주년 기념 사진전'을 보고 나서 로버트 카파의 평전을 읽게 되었다.

 로버트 카파, 본명 앙드레 프리드만은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1931년 헝가리 파시즘 정권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피해 프리드만은 베를린으로 망명하여, 사진가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고 반유대주의 정책이 심화되자, 프리드만은 다시 파리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재능있는 연인 게르다 타로를 만나, "로버트 카파"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1936년, 스페인내전이 발발하자 카파는 게르다 타로와 공화국군과 행동을 같이 하며 파시즘 군대와의 전쟁을 사진에 담았다. 여기서 의용군으로 참여한 헤밍웨이와 만났고, 카파의 생생한 사진은 미국 등지에서 보도되었고, 일약 전쟁사진기자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1937년 그의 연인 게르다 타로가 파시즘군의 탱크에 치여 사망하면서 카파는 큰 슬픔에 빠지게 된다. 이듬해에는 파시즘과의 또다른 전장인 중국에 가서 중일전쟁을 취재하기도 했다.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카파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41년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카파는 곧장 전장으로 가고 싶어 했으나 헝가리 국적이라는 이유로 '적국인'으로 분류되어 발목이 붙잡혔다(이 책에서는 이것이 카파의 '뻥'일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윽고 카파는 북아프리카와 영국, 이탈리아에서 다시 파시즘과의 전쟁을 취재했고,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최전선에서 사진으로 담았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에서 제1차 중동전쟁을 취재하기도 한 카파는 자신이 '공산당원'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스페인내전 당시 공산당 기관지에 글을 썼고, 1947년 스타인벡과 함께 소련을 여행하여 르포를 썼기 때문이었다. 파시즘과 나치즘을 피해 헝가리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거듭 피난해야 앴으며, 스페인, 중국,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파시즘과의 전쟁을 사진으로 담았던 종군기자도 매카시즘의 함정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공산당원'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돈이 필요해서인지 1954년 인도차이나전쟁을 취해하러 베트남으로 갔고, 프랑스와 베트남의 전쟁을 취재하던 중, 지뢰를 밟아 41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어머니 율리아 프리드만은 카파가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유혈의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종군기자로 살았던 밥[카파]은 전쟁을 증오했고 전쟁 기념탑과 기념비를 수치로 여겼다. 카파가 사랑하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도 몇 시간 동안 진지하게 고려해봤다. 하지만 그곳에 묻힌 게르다 타로 이후 밥의 인생에는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384)

 사실 사진전을 봤을 때는 연인이었던 게르다 타로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카파는 평생 죽을 곳을 찾아 헤맸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나보다. 일단 게르다는 생전에 "카파는 친구지 연인이 아니라고"(95) 말했고, 어찌 보면 카파의 짝사랑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카파는 게르다가 죽은 이후에 그 유명한 잉그리드 버그만과의 스캔들을 포함해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또한 카파는 중동전쟁 이후로는 전장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한국전쟁은 취재하지 않았다. 생전에 "다시 전쟁에 가야 한다면 난 총으로 자살을 해버릴 거야. 난 너무 많은 걸 봤어"(361)라고 말했다고 하니,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죽은 것은 죽음본능 때문이 아니라 우연한 사고 때문이었나보다.

 그 밖에도 저자는 카파의 행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카파의 영웅신화에 조금씩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카파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스페인내전의 사진, "쓰러지는 병사"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또한 제2차세계대전의 전장에서 최신유행코트를 입었다가 독일군으로 오인당해 미군이 총부리를 겨눈 사건 등, 허당스러운 일화도 나와 있어 재미있었다. 사진전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카파의 면모를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게르다와의 죽음 이후 카파를 지탱한 것은 군인들과의 동지애와 오로지 순간만을 즐기면서 다음번의 침대와 식사와 술 그리고 여자만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245)

 보헤미안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카파는 실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잉그리드 버그만과 어니스트 헤밍웨이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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