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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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도 어느샌가 80년대를 배경으로한 소설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진한 회한이나 상처들이 있어서 그 상처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소설들에 환멸을 느낄만한 처지는 아니지만, 그런 소설을 읽을 때면 그 시대를 모사(模寫)하려고 아둥바둥 거렸던 나의 20대 초반의 시절이 너무 우습게만 보여서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었다. 요즘은 잘 안 읽지만 공지영의 소설이 좀 그랬고, 작년 쯤에 읽었던 임철우의 [봄날]도 그랬다. 한참을 읽다가 너무 몰입하다 보면, '이거 너무 자기애에 빠지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떨치려다보면 너무 냉정하게 거리를 두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80년대를 살아냈던 이들이 느꼈을 비장함, 숭고 등등의 것들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쿨하게 내 자신을 포장하기에 바쁜 21세기형 인간일 뿐인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런 이야기들과 마주친 상황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난처함일 것이다. 결국 이런 난처함의 결론은 당장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과 나를 이런 죄책감으로 인도했던 어떤 당위에 대한 인정 뿐이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내 분수를 따져볼 기회같은 건 당분간 유보되는 것이다.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일단 나에게 그런 초월적 죄책감을 짊어지게 하지 않아서 참, 고마웠다. 요즘들어 내 '그릇'이 아주 형편없이 작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만약 이런 80년대 후일담 소설이 나에게 뭔가 '역사의 무게' 같은 것을 짊어지게 하려 나섰다면 난 분명 절반도 읽지 않고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건 내가 실제로 그런 무게를 거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그럴 수도 있지만), 내 그릇이 그걸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아 금방 넘쳐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광주가 고향인 동갑내기 스물살배기들이 서로의 삶을 어르고 달래고 보듬고 안아주는 '예쁜 이야기'이다. 거기엔 의도적인 비장함이나 숭고미가 없다. '혁명적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공장으로 들어간 영금이가 있긴 하지만, 그의 이야기도 그리 호들갑스럽진 않고 담담하다. 비장함이 없는 대신, 아픔이 있다. 그런데 이 아픔은 나 자신의 고통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 때문에 아프다. 광주시내에 군인들이 들어온 날,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섰다가 군인들의 손에 친구 경애를 잃은 수경이는 몇날 며칠을 방안에 홀로 앉아 가슴앓이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

그 얘길 듣고 있던 해금이는 화내서 미안하고, 웃어서 미안하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더 할 수 없이 예쁘고 또 그래서 슬픈, 날 것 그대로의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우리 식구'들은 그들의 그런 마음을 이상하다고 한다. 이틀동안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이(利)유(由)'없이 사랑하고, 이유없이 아껴주고, 이유없이 웃어주고, 이유없이 슬퍼하는 이들의 예쁜 마음을 꼭 안아주고 싶었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만영은 가출해서 만난 남자와의 하룻밤으로 애를 가지게 된 승희를 이유없이 사랑한다. 고속버스 안내양을 하는 승희를 대신해 아동 보호소에 맡긴 아이를 자기가 아빠인양 돌봐주기도 한다. 고모부의 목재소에서 일하는 '환'이라는 아이를 아픔을 알게 되면서 해금은 밑도 끝도 없이 그를 보듬어 주려 한다. 그들의 이런 '이유없음'은 어떤 관계에서든 그 관계의 이(利)유(由)를 만들어야만 하는 나와 우리시대의 사랑과 우정을 초라하게 만든다.

나의 삶과 운동이 이들의 사랑을 닮아갈 수 있을까? 이들의 사랑을 닮아가는 일은 비장함으로 무장하여 어떤 초월적 숭고에 다다르려 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나에겐 그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 가슴도 아직은 뜨겁고 나에게도 그들처럼 '예뻤던 때'가 있었기에, 이미 나는 그들을 조금은 닮아있다고, 감히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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