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부터 해오던 동양사상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면서 두 권의 책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하나는 신영복의 '강의'이고, 또 하나는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다.  

 신영복의 책은 이 정도는 읽고 시작해야 뭔가 ABC부터 제대로 익히고 간다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초반에 나오는 주역 파트의 내용이 마치 부적 해독 하는 것 같아서 머리가 지끈 거리다가 어찌저찌 그냥 동양사상에 혀끝만 대 보다가 끝냈다.  

강신주, '노장사상'에 대한 문제제기

반면에 강신주의 책은 좀 도발적으로 읽혔다. 원래 국가주의 사상가인 공자, 맹자를 읽을 생각은 없었기에 장자부터 시작한 건데, 강신주는 이 책에서 흔히 노장사상이란 이름으로 노자와 함께 묶여 사상사의 한 축에 자리하고 있는 장자의 위치를 완전히 다르게 포지셔닝 하고자 했다. 쉽게 말하면 노자와 장자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도발적인 쟁점을 가지고 시작하는게 오히려 나 같은 초심자에게는 더 반가운 일이었다. 신영복의 '강의'처럼 교과서적으로 이 사람 저 사람 훑는 것 보다,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고민해야 할 지 분명한 지점을 지적해주니, 첫 발을 떼기도 좋은 법이다. (물론 적절치 못한 쟁점에 초점을 두는 안내자를 만난다면 그냥 교과서같은 책을 보는게 낫겠지만 말이다.) 

며칠 전에 두번째로 읽으니 노자와 장자 사이의 쟁점이 이제야 좀 눈에 들어오는데, 강신주에 따르면 노자가 말하는 道는 사실상 국가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이다. 그 유명한 <<道可道 非常道 /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도덕경의 이 유명한 구절은, 道를 현실을 초월한 존재적 위치에 두고자 하는 노자 사상의 형이상학적 근거라고 한다. 이와 함께 도덕경의 문장들이 한시적 어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을 비추어 그것은 민중의 사상이라기 보다는 지배계급의 현실 순응주의를 반영한 사상이라고 말한다.  

반면 장자의 사상은 <소요유>에 나오는 大鵬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초월적 시야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이를 통해 끊임없이 타자성을 확보하려는 '소통의 철학'이라고 한다. 한낱 물고기가 대붕이 되어 구만리 창공을 날아가는 것은, (매미와 텃새 따위가 비웃을 지언정) 자기 존재성의 틀을 넘어 타자와 소통하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이다. 대붕이 구만리 창공을 날아 도달하려 했던 '남쪽'이 바로 그 타자적 공간이며, 이는 道를 초월적 자리로 보내버렸던 노자와는 다르게 '道는 걸어가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 장자 철학의 핵심이 된다.

기세춘, 淸談으로 왜곡된 노장사상을 텍스트로부터 살려내기

이 쯤 되면 노자-장자의 근본주의적 비판, 무정부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장자와 노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완전히 해석적 쟁점으로 옮아가 버린다. 그래서 나에겐 영 부담스러운 주제가 되어버리는데,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동양사상의 논의 지형 상, 출발이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중국의 관료제를 뒷받침하는 사상으로 유지되어 온 공맹사상이 아닌 이상, 그외의 사상들은 원전이 상당부분 남아있지 않거나 남아있어도 주석가들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어 온 바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노장사상과 같은 비주류 철학들을 이해할 길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내가 수강 중인 기세춘 선생의 노장사상 강의를 통해, 강신주의 주장들을 어설프게 나마 검토해 볼 여지들이 생기는 것 같다. 기세춘 선생은 강의 초반부터 이렇게 독설을 날리고 시작한다. 

   
 

 공자의 經學은 수천년 동안 종교적 정치적 필요에 의해 왜곡 윤색되었습니다. 한나라 때는 동중서에 의해 음양오행과 미신을 붙인 緯學이 되었고, 남북조시대는 하안 왕필에 의해 노자를 끌어다 붙인 玄學 또는 道學이 되었고, 송나라 때는 주희에 의해 佛老를 결합하여 理學이 되었고, 명나라 대는 禪宗을 덧붙여 心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노자의 사상이 엉뚱하게 공자 사상의 국가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온갖 세상의 달콤한 말들로만 윤색된 淸談이 되고 말았다는 것) 중세 유럽에서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듯이 말이다. 심지어 최근 중국공산당에서 자본주의로의 급속한 편입을 서두르며 내세운 구호인 '조화사회' 건설을 위해 끌어들인 것이 또 노자라는 것이다. 이를 위한 이데올로기 선전을 하기 위해 <도덕경 국제포럼>이라는 행사를 열어(2007.4.20) 1만 3천여명이 운집해 도덕경을 암송하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벌여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단다. 

아마도 강신주는 이를 근거로 노자 사상이 국가주의 철학이라는 것을 강조하겠지만, 반대로 기세춘 선생은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자본주의를 수용하려고 중국인민이 좋아하는 도덕경을 끌어들여 견강부회하려는 정치공작"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노자 사상이 본래부터 민중 사상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의 확실한 증거는 한말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과 장수가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로 삼았던 사상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노자는 어차피 실존인물도 아니고 노자의 저서라고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구전되어온 민중의 설화 등을 후대에 집대성한 집단 창작물이기 때문에 강신주가 말하는 것처럼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혹 노자의 저서 속에서 그런 냄새가 난다면, 이는 노자의 주석가로서 오랫동안 권위를 누려온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의 사상일 뿐 노자의 사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세춘 선생은 청대 고증학의 창시자인 고염무가 노자를 왜곡 변질시킨 하안과 왕필의 죄악을 폭군 걸주보다 심하다고 비난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왜곡의 역사로 점철된 노자와 장자를 버리고, 본래 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독해를 통해 본래의 노장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그는 노자를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도, 그건 '재해석'일 뿐 '해석'이 아니며, 또한 이렇게 재해석된 사상은 노자의 사상이 아니라 그냥 프로이트의 사상이고, 데리다의 사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노자강의] 서문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까? 

사실 기세춘 선생의 강의에서 타겟으로 삼는 이는 도올 같은 이다. 강신주 얘기는 한마디도 안 나왔고 내가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과정에서 몇 마디 하셨을 뿐이다. 위 내용은 그냥 내 기준에서 '정리'해 본 것 뿐이다. 

어쨌든 다시 나의 학습의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다면 노자와 장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다가온다. 사실 강신주의 장자 독해는 최근의 철학적 '유행'(?)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깔끔한 안내자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장자 사상으로의 안내인지, 아니면 또다른 철학적 배경으로의 안내인지는 의문이 든다. 실제 그는 장자를 설명하면서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알튀세르, 들뢰즈 등 소위 에피쿠로스의 '우발성의 철학'의 계보에 있는 서양철학자들을 많이 인용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떤 순간에는 이들을 통해 장자를 설명하는 건지, 장자를 통해 이들을 설명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중심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아마 기세춘 선생은 '그건 그냥 에피쿠로스의 사상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실 텐데, 그 점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 하나 강신주가 노자를 비판하는 핵심적이고 거의 유일한 이유는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가주의자 왕필이 그를 받아들이는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국가주의'로 논의를 몰고가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우발성과 마주침의 유물론이 갖는 긍정성 못지 않게, 진리와 근원의 선재성에 대한 물음 역시 인간에게 근원적인 물음이다. 이것이 세속적인 욕망과의 결합속에서 국가주의나 권력에 대한 순응주의로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처음부터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그것으로의 다가감을 꿈꿨던 모든 역사상의 종교들은 처음부터 국가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그건 종교의 역사와도 별로 맞지 않는 얘기인 것 같다. (작년에 김상봉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등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 나는 유신론자, 아니 그보다는 범신론자 쪽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어쨌든 결론은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은 참 친절한 모험 안내서였지만, 앞으로 내 학습의 안내서가 되기에는 좀 부적절한 것 같다. 당분간 기세춘 선생의 [노자강의]와 [장자] 완역본을 따라서 학습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