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문명과 영생을 다루는 여러 미디어들에서 조금씩은 본듯한 익숙한 소재와 철학적 장치들이 이야기 곳곳에 묻어있어 새롭지는 않았지만, 읽는 동안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철학적 숙고를 주제로 저자와 산책하며 얘기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작중 문구 한 마디가 이 책을 읽은 나의 소회를 모두 대변하는 것 같아 소개한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우주의식으로 돌아갈 것이니 살아있는 동안 자기 이야기를 완성하라고 했다.”
20세기 초반 전형적인 룸펜의 이야기인가… 왠지 모르게 이끌리는 어색함과 우울한 구석이 있어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 여자들에게 빌 붙어 살면서 한 번도 내침이 없었지만, 스스로 싫증나거나 주눅 들거나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감상에 빠진채 그 여자를 포기하고 떠나는 룸펜, 그리고 곧 다른 여자에게 기생하며 같은 패턴, 하지만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게으른 천재인지, 소심한 미청년인지, 무책임하고 발랑 까진 놈팽이인지(하지만 머리는 좋은게 분명) 모를 룸펜의 짧은 삶을 통해 일본을 배경으로 한 20세기 초 퇴폐적인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책 읽는 내내 타츠미요시히로의 동경표류기가 생각났다. 독특하고 재미있다.
자신의 일탈로 연인을 잃고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던 작가는 분류학자 데이비드 조던의 일대기에서 난관을 돌파할 동력의 실마리를 찾고자 노력한다. 데이비드 조던의 일대기를 조사하던 어느지점에서 그녀가 발견한 한 과학자의 이면에는 미국 과학계와 사회에 어린 어두운 그림자의 시초가 있음을 발견하고 경악하게 된다. 그럼에도 미국 과학계에서 여전히 그가 추앙 받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게 되는데, 그 때 그녀의 정신적 승리를 도와 줄 한 과학자의 책을 만나게 된다. 흥미로움과 지루함 사이를 줄타기 한다.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일기장을 들여다 본 느낌도 있고, 저자의 정신승리를 과학적으로 잘 엮은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읽기 어렵다.
시간여행을 다룬 소재는 늘 매력적이다.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인과관계가 뒤틀리는 과정도 흥미롭고 주인공이 겪는 문화적 사회적 차이에서 오는 에피소드도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그 중에 백미는 과거의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다. 이 책은 케네디의 암살을 막기 위해 과거로 뛰어든 사내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실상은 과거의 여인과, 과거의 따뜻한 사회적 온기와 사랑에 빠져 상처를 치유받는 현재의 외로운 한 남성의 이야기이다. 특히, 과거의 인물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스스로를 치유할 기회를 갖게되는 주인공의 인생에 공감하게 된다. 난, 주인공이 58년 데리에서 만난 불타오르는 듯 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와 큰 안경을 쓰고 걸죽한 말투를 뽐내는 소년을 만나는 장면을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았다. 역시 킹 답다.
20페이지 미만의 짧은 글속에서, 어느 때는 클라이맥스 한 가운데 들어와 얘기를 볼 때도 있고, 여느 때는 결론을 알고 이야기의 시작을 찾아가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친절한 배경 설명도 없는 이야기에 떨어뜨려져 불편함을 안고 시작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상황에 독자가 떨어뜨려 져도 한상 반복되는 것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져 결말 까지 몇 페이지가 남았는지 뒷장을 들쳐보게되고, 도대체 몇 남은 페이지에서 어떻게 결말을 내려고 이러는 건지 궁금한 마음이 글 읽는 속도를 재촉하게 한다는 점이다. 스티븐킹의 장편은 각 챕터의 결말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너무 즐거워 결말의 시작점을 통과하는 문 앞에서 책을 덮으면 내일이 기대되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단편은 결말을 알지 못하고는 읽기를 멈추지 못하게 만드는 편집증 적인 자아를 발견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