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발이 묶인 이날 오후부터, 비단옷을 차려입은 모습 속에 숨겨진 마음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누가 물었다면 어지러운 눈물뿐이라고 했을 것이다. - P37

어제 가엾다고 본 일은 어제의 가여움이다. 오늘 자신이 할 일은 끊임없이 있기 때문에 잊는다는 생각도 없이 잊으니 삶은 꿈만 같다. 이슬 같은 세상이라고 하면 눈물이 절로 떨어지겠으나 그보다 더 부질없는 일은 없다. - P111

‘좀 더 살아 볼까?
1년을 더 살다 보면 누가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을까?‘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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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로 물든 하늘은 단조롭지만 웅장한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렌지 빛으로 물든 세상이 근엄한 망토를 펼치자 먼 솔밭에서는 우수가 샘솟았다. 저녁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신비로운 기분이 스며들었다...... 드넓은 대지가 금빛으로 출렁이니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았다. 먼 지평선은 밤을 꿈꾼다.
- P31

시뻘건내장을 드러낸 채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황톳길은 피맺힌 절규를 토해 내고, 아득히 먼 곳에서는 잿빛 구름과 태양의 포효가아련히 들려온다. 평원은 때때로 홀로이 저 풍경을 가득 채우는 꿈을 꾸지만, 그럴 때마다 작은 언덕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 P56

우리가 죽고 나면 사물의영혼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육신이 도리어 무덤이 되는 것일까? - P112

안달루시아의 태양이 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온 세상이 숨죽인 채 귀를 기울인다.
- P136

시인은 손을 들어 머리를 더듬어본다. 그 많던 머리숱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슬픈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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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을 해도 나 혼자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
무레 요코 지음, 장인주 옮김 / 경향BP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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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인간 여자와 더 늙은 암고양이의 아주 오래된 동거 이야기. 


가내(家內)에서 장장 19년째 절대군주로 옹립 중인 고양이 C와 어느새 프로수발러가 된 작가 요코씨. 요리보고 저리 보고 텀블링을 해서 봐도 작가는 C를 떠받드는 모양새다. 


공식적인 전 골목대장 출신답게 까탈스럽고 질투 많은 C와 그에 맞추느라 매일이 고군분투 -수면 부족과 싸우는 작가는 세계에서 고양이에게 가장 많이 혼나는 집사라며 비공식 기록보유자임을 푸념한다. 그러면서도 생명에 대한 애정과 책임, 고마움을 새긴다.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서로의 인생에서 마지막 반려동물과 반려 인간이기에 일상의 소소함을 귀히 여긴다. 

그래서 모든 순간이 귀하디 귀하다. 


다만 반복적인 에피소드가 많고 책의 만듦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문고본으로 간소한 디자인과 가벼운 형태가 어울릴법한데 너무 부풀려 놓은 모양새다. 그래서 이야기의 소박함이 겉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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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괴물들 - 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
알베르토 망겔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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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괴물 망겔의 끝내주는 이야기. 문학을 총망라하는 해박함 사이 촌철살인은 덤. 곰돌이 푸의 애착 꿀단지마냥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다. 줄어드는 책장이 너무 아쉬워서 손을 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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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감 - 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분투기 작가 시리즈 1
다자이 오사무 외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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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도 결국엔 사람. 괴롭고 힘들고 싫은 것은 매한가지다.


한 장의 원고를 위해 네댓 장의 파지가 나온다. 식구들에게 언성을 높인다. 몸을 돌보지 않은 무리한 집필 탓에 건강을 해친다.

꾀병을 핑계 삼고, 책상 정리에 진을 빼고, 술로 시간을 허비한다. '싫다, 싫어, 안된다, 안돼' 하면서도 아무튼 써보려 애를 쓰는 모습은 측은하다.


'쓸 수 없다. 아아~ 그래도 써야 한다.'

이렇듯 작가가 갈팡질팡하며 괴로움에 치를 떠는 사이, 어느새 내 귓가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Confrontation」이 자동 재생된다. 한순간에 교차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작가의 고뇌가 생생히 그려진다. 그래서 이 책은 몸부림에 가깝다. 작가 내면의 양가감정과 자기 비하, 내적 갈등의 몸부림이 산문, 편지, 시, 일기, 그리고 대화 형식으로 담겨있다.

가볍게 읽고 미소 짓게 하는 글도 있으나 대부분은 '쓸 수 없다'와 그런 자신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있다. 대문호의 자아비판에 모골이 송연해질 따름이다. (갑자기 무릎을 꿇고 읽어야 할 것 같다ㅋ;)


그래도, 그래도 결국은 쓰게 되리라.

쓸 수 없다면 쓸 수 없는 이유라도 쓴다. 글 쓰는 재주밖에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그거라도 글로 옮긴다.

문학에 대한 애정과 뼈에 사무치는 가난이 작가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



덧,

『달콤한 배의 시』 -오구마 히데오

(부분)

...

"예술은 땀을 흘리는 일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달콤한 즙은 굳건히 흐르고 껍질과 살을 떼어 내려

내 이는 쐐기와 지레가 되어 배의 살을 푹 베었다.

내 잇몸은 터지고 배는 피투성이

그래도 배란 녀석은 즙을 뚝뚝 흘리는 걸 멈추지 않는다

...

이런 태도로 현실에도 달려들어 물고 싶다,

한 방울의 즙도 흘리지 않고 탐욕스럽게,

배처럼 현실을 두 손으로 꽉 잡고.



덧2,

『매문 문답』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요약해보자면ㅋ)


편집자 : 써 주세요.

- 작가 : 무립니다.

아무거나 쓰면 돼요.

- 양해해 주세요.

당신 이름만 있으면 됩니다.

- 욕먹어요.

작가 책임이니 괜찮아요.

- 그럼 더 싫어요.

한두 번 망한다고 큰일 안 나요.

- 농담 마세요.

독자 생각도 해주세요.

- 헛소리 마쇼.

팬입니다.(태세 전환)

- 속 보여요.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편집자의 대화는 실로 창과 방패의 대결, 이 책의 묘미로 꼽을 만하다.

'쓸 수 없다 vs 써 달라'의 한 치 양보 없는 팽팽한 기싸움은 마치 무림 고수의 정신적 대결을 보는 것 같다. 육탄전은 없지만 정신이 약한 쪽이 지고 만다. 그러면 패자는 엄청난 대미지를 입게 될 것이다. 이거야말로 운명이 걸린 필생의 전투이다ㅋ



덧3,

편집자놈(?!)도 보통이 아니구나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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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kang1001 2021-07-14 1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고뇌가 실려 있을 것 같아서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dollC 2021-07-14 13:45   좋아요 1 | URL
부디 thkang1001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저 대단하신 작가분들도 결국엔 매 순간 나약한 마음을 다잡는 미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