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작가가 있다. 친목은 절대 사절, 사교성 제로인 내 성격에 이런 언니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될 때가 있다.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친밀감이 생기고 존경과 부러움이 생긴다. 이런 언니가 있다면 조언이 필요할 때는 물론이고, 때론 쓴소리나 독설을 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겐 요네하라 마리가 첫 손에 꼽히는 작가가 아닐까 한다.


















처음 마리 언니의 책을 읽었을 때가 중학생 시절(하이고… 까마득하다;)… 

한창 예민할 나이였으니, 마리 언니의 막대한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만할 것이다. 학창 시절 마리 언니를 알게 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글자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리 언니의 카리스마와 매력은 지금도 대단하다.


















독자를 자연스레 그 시대, 그 장소로 데려가고 한없이 빠져들게 만든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음에도 그 소용돌이를 태풍으로, 혹은 한낱 미풍으로도 만드는 글 솜씨라니…!

특히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었을 땐 정말 그 거대한 감정 속에서 한동안 넋을 잃을 정도였다. 리차가 본 그리스의 창공, 거짓말쟁이 아냐의 새빨간 진실, 하얀 도시의 야스나… 이런 거대한 사건을, 인물을, 사회와 역사를 이렇듯 자신만의 호흡으로 소회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마리 언니답다. 어떤 수식도 쉽게 떠올릴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 마리 언니의 냉철한 시각과 독설도 그 매력에 큰 몫을 한다.


‘인간의 매력과 추악함은 육체와 인격, 그때그때 상황과의 절묘한 조합에 으이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숫자로 포착할 수 없는 부분이 압도적으로 큰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인간은 숫자로 들어야 제대로 알았다는 기분에 안심하고, 숫자에 강박관념을 갖고 농락당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교양 노트 > p134


‘그것은 또한 명령하는 자의 무지까지 전제로 삼는다. 명령자는 검토하고 의심하거나 이성을 작동시킬 필요가 없다. 다만 바라기만 하면 된다.’

<속담인류학> p 29 -몽테스키외 인용


‘악마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성경도 인용한다고 하지 않는가’

<속담인류학> p37


‘애국주의는 악당들의 첫 의지처.’

<속담인류학> p49 -A. 비아스 인용


‘하긴 국익을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하는 정치가들일수록 국익이나 애국주의를 함부로 고취하는게 정석이긴 하다.’

<속담인류학> p134


어디서 이런 지식을 쌓았을까. 어떻게 이런 정보를 다 찾아냈을까.

읽을때마다 놀라운 지적 방대함, 그리고 약간은 삐딱한 날선 유머와 냉철함이 가득하다. 특히 <속담인류학>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속담에 관한 부분은 꼭 일독해보길 권하고 싶다.



 













마음산책에서 출판된 문고본을 읽다 읽다, 다른 단행본도 손길이 뜸해질 즈음 발견했던 이 책. <대단한 책>.

서평, 논평, 정치적 논설과 역사관 등 좀 더 전문적인 면모를 많이 담고 있다.

(그나저나 마리 언니는 한창때 하루에 여덟 권 정도의 독서량이었다고 하는데, 시상에… 너무 놀란 나는 그냥 눈만 끔뻑거릴 뿐;;;) 

















마리 언니가 너무 그리워 친동생인 이노우에 유리의 책까지 들고 왔다. 진짜 언니인 마리에 대한 이야기를 친근한 말투로 전한다. 체코로 이주해서 성장한 학창 시절이나 일본으로 귀국해서 생긴 적응, 부적응의 나날들. 가족과 친지들 등등… 언니 마리를 그리워하는 독자를 향한 존중과 애정이 가득담긴 필치가 따스하다.


















그래도 역시나 요네하라 가족의 가장 큰 재미는 먹는 즐거움일 것이다.

마리, 유리 자매를 비롯해 아버지쪽인 요네하라 식구들은 자타공인 먹보 가족들이다. 먹는 일, 먹었던 일, 곧 먹을 일과 앞으로 찾아낼 먹거리 등등. 촌각을 다투는 동시통역 업무 중에도 식탐은 놓을 수 없었던 에피소드를 비롯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적인 먹기량에 대한 에피소드는 군침이 돌만큼 흥미롭다. 


아… 페이퍼를 쓰다보니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너무나 그리운 마리 언니. 고마워요, 내 사춘기에 함께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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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풍경> 

존 루이스 개디스 저/ 강규형 역/ 에코리브르(2009)


존 루이스 개디스는 많은 질문을 제시한다. 책의 부제는 '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이지만 질문은 비단 역사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역사란 무엇인가? 왜 역사를 배우는가? 역사는 과학인가? 등등.


질문은 결국 독자를 한 지점으로 몰고 간다. "당신은 무엇을 역사로 정의하고 있는가?"


역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 역사가의 시선으로 고찰하고 이를 통해 역사를 보는 시각을 사고한다. 개인이 역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사고해 보도록 유도하고 다양한 방식을 제시해 준다. 이로써 역사적 사건이나 연대만 줄줄이 읊어대는 피상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에서 탈피, 역사라는 근본으로 시작되는 길을 열어준다. 이 길은 스스로 입구를 찾은 주체적 독자의 것이다. 울퉁불퉁하고 때론 길이 선명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확고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그런 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H. 카 저/ 김택현 역/ 까치(2015)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때론 시대착오적인 부분도 있고, 두루뭉술해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의미는 '역사'의 인식을 재고하고 의식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역사를 위한 변명>
마르크 블로크 저/ 고봉만 역/ 한길사(2000)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서문부터 흥미롭지 않은가? <역사란 무엇인가>와 함께 양대 필독서. 대학시절 교양 도서로 받은 걸 지금도 고이고이 책장에 뫼셔두고 있다. 나이는 나만 먹고 책의 가치는 여전히 빛난다. 쩝;;
















<지금, 역사란 무엇인가>
헬렌 카, 수재너 립스컴 외 저/ 최파일 역/ 까치(2023)


새로운 시대가 과거에 던지는 질문들.


카의 증손녀 헬렌 카를 비롯 많은 석학들이 다양한 주제로 쓴 글의 모음이다. 인종, 종교, 지리, 문화, 환경, 감정 등 그동안 역사에서 소홀히 했던 빈틈을 메우려 한다. 소외되었던 주제를 고찰하면서 지금 역사의 방향성에 대해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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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음의 불편함>

에밀 시오랑. 이것은 그의 아포리즘, 그 만이 느끼고 알 수 있다. 

타인에게 전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쓰지 않으면 안되기에 쓰였으며, 특정한 대상을 알수 없는 -미지의 독자를 향한  글이다. 짧은 경구는 비관주의일수도 허무주의이거나 시처럼 읽혀질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막연함에 반대한다.
















<뉴요커의 조지 스타이너>


‘신랄한 간결함의 대가인 니콜라 드 샹포르는 한 줄 반짜리 경구를 보고 더 짧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경구, 아포리즘, 금언은 사고의 하이쿠다. 그것들은 최대한 적은 어휘에 예리한 통찰을 압축해 담고자 한다.’

p319


’여기서 핵심은 ‘손쉬운’이다. 시오랑의 통탄 전체에 그런 불길한 ‘용이함’이 있다. 인간의 ‘타락’과 ‘부패’를 고매하게 비난하는 데는 일관된 분석적 사고도, 명확한 논지도 필요 없다. 내가 인용한 문장들은 쓰기도 쉬웠고, 신탁과 같은 어두운 분노로 작가를 ‘우쭐하게’ 만든다.‘

p326


조지 스타이너의 여러 글 중 에밀 시오랑의 챕터가 있어 반가웠다. 드디어 뭔가 아는 작가가 나왔구나ㅎㅎ

역시나 냉철한만큼 예리하게 파고드는 글에 매혹된다. 
















<나의 쓰지 않은 책들>

조지 스타이너의 책 중 그나마 가장 접근성이 좋았던 책. 에세이 형식을 띄고 있어서 심리적 장벽이 낮은 편이지만, 작가의 명민함과 예리함, 폭넓은 지식과 독창적 사고는 여전하다.
















<인간이라는 직업> 고통에 대한 숙고


‘다만 고통에서 뭔가 얻어내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얘기다! 에밀 시오랑이 한줄기 빛을 던져준다. “고통은 눈을 뜨게 하고, 고통이 아니었다면 인식하지 못했을 것들을 보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고통은 오직 앎에 쓸모 있을 뿐이며, 앎을 벗어나면 실존을 악화하는 데만 쓸모가 있을 따름이다”라고.’

p70


출생시 탯줄이 목에 감기는 사고로 뇌성마비를 갖게 된 작가 알렉상드르 졸리앵. 질식사는 면했지만 극심한 장애로 유아기부터 2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요양 시설에서 지냈다. 태어나서 단 한 순간도 어려움이나 문제에 부딪히지 않고 지나간 적이 없었다는 그. 삶에 대한 열정과 깊은 고찰이 그의 생생한 목소리로 가슴 깊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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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하고 수다스럽고 지독하게 유식하다.


오랜 동안 품절되어서 더 궁금했던 책이다. 이전 번역본은 <우울증의 해부>.

현대 의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자기 계발 등등 모든 분야의 서적이 차고 넘치는데 오래전 출판된 이 책이 왜 그토록 궁금했겠나. 솔직히 작가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 작가 소개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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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1599년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에 연구조교(scholar)로 임용된 이후 가난하지만 한가로운 이 자리를 죽을 때까지 지켰다. 일생 동안 여행도, 결혼도 하지 않았고, 어떤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달성하지도 못했다. 오직 옥스퍼드 대학이 제공하는 학문적 분위기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희귀한 장서들 속에 파묻혀 지극히 단조로우면서도 행복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게으름을 피운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희랍과 로마의 고전을 읽고 연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문학상의 한 장르를 개척하였다. 결과 개인 로버트 버턴에게는 물론, 후세 독자들에게 변함없는 즐거움과 교훈을 주는 『멜랑콜리의 해부』라는 방대한 불멸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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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이 분과 사랑에 빠졌다.

사랑스럽기 그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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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번역판이 드디어 나왔다.

작가에 대한 첫 인상은 예상 밖이었다. 마치 고독이 사무쳐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대는 사람 같았다. 

혼자서도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오히려 혼자가 더 편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 말이다. 물론 그 상대가 자신과 동등하거나 우월해서 지적인 대화가 가능할 그런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게 -엄청난-문제라서 그렇지.

그래서 이 고독은 채워질 수 없고 근원적인 결핍과 공허함을 일으킨다. 로버트 버턴의 '멜랑콜리'란 바로 이 심연에서 발현한 것이 아닐까.


왜 이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 본론으로 들어가는 데만 전체 분량의 1/4 정도를 할애한다. 

작가는 자칭 데모크리토스의 아들이라 하는데,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아니라 키케로의 제자(추종자) 같다. 글의 어조는 대체로 솔직한 편이고 글 사이사이, 곳곳에 유머를 잊지 않고 있다. 때론 자신을 한껏 낮추다 못해 자기 비하적일 때도 있지만, 그런 한편으론 위대한 성인의 아들을 자처할 정도로 자신감과 해박함을 과시한다. 어쨌거나 위트와 냉소, 겸손과 자만 사이를 오가는 글의 기저에는 고독이 짙게 깔려있음을 숨기지는 못한다.


한 페이지당 위인 두서너 명은 기본적으로 인용한다. 적절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지식의 과용(?)이지 싶다. (이른바 과시욕이라는 게 너무 유식한 작가에겐 과시가 아니라 일상생활인 건가 싶기도???) 뭐, 결과론적이긴 해도 이 책에서 인용된 덕에 세상에 나오거나 생명이 유지되는 글도 있으니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 자체만 놓고 보자면 호기심이 점점 사라지게 만든 이유가 된다. 유명인들의 권위에 기대서야 본인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면 굳이 작가의 책을 찾을 이유가 없고, 아전인수식의 인용이 잦은 점은 분명 글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나도 명언 한 줄 찌끄려 보련다.

'남의 명언에 밑줄 치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마라.'


로버트 버턴의 멜랑콜리(우울증)에 대한 정의, 진단, 치료 방법 모두 다 틀렸다.

그리고 모두 다 맞았다. 그의 멜랑콜리는 지극히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므로.
















초판 디자인이 작품을 더 잘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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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버턴의 개인적 멜랑콜리가 아닌, 우울증에 관한 책 중에서 내게 도움이 된 몇 권을 추가해 본다.















<자살의 이해> 

개정판이 나왔다. (얘도 개정판 표지 왜 이럼;;;)
















<자살백과> 

인생의 어느 한 때 너무 힘들어서 이런 분야 책을 엄청 많이 읽었더랬다. <자살백과>를 읽다보면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이 옅어지게 된다는... 신기한 독서 경험을 했었다.
















<한낮의 우울>은 아직 완독을 못했다.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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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남성상을 단 한번도 구현해 낸 적 없는 한국 남성은 자신의 실패를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탓으로 돌렸고 이를 반복해왔다.


권력의 지배자(지배체제)가 필요로 하는 남성성을 강요받은 한국 남성들은 많은 문제에 맞닥뜨렸다. 그때마다 '간단하게' 여성에게 분풀이를 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책임을 회피해왔다. (지배체제가 시선을 돌리게 만든 것도 있다.) 이에 따라 갈등은 심화되었고 누적되어 왔다.

결국 현대에는 스스로 문제를 직면할 기회도, 바로잡거나 정당화할 근거도 놓친 채로 '억울한 남자들'만 남았다.


애초에 한국 남성들이 꿈 꾸는(회복되길 바라는) 아버지 세대의 가부장제 노스탤지어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환상이다. 이들의 아버지의 아버지들조차 제대로 누려본 적 없는 망상에 불과함을 철저히 외면한다. 근거는 없고, 실체는 무시한다 -그리고 이것을 반복 재생산한다.


한국 남성들이 이런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건 이 책의 별점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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