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r work is not in vain when we give our best. Too often, the dreams we have for ourselves are smaller than what awaits us down the road.

Kindle Oasis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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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네이션 1장의 마지막 몇개 문단이 이 책의 주요 문제의식을 요약한다.


우리는 쾌락이 없으면 먹거나, 마시거나, 번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이 없으면 상처나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반복적인 쾌락으로 우리의 신경 설정값이 높아지면,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에 절대로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바라면서 끝없이 갈등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인간은 궁극적인 추구자다.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는 세상의 시험에 너무나 잘 대응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세상을 결핍의 공간에서 지나치게 풍족한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이 풍요로운 세상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만성적인 좌식 식사 환경에서의 당뇨병을 연구한 톰 피누케인Tom Finucane 박사는 이를 두고 "인간은 열대우림의 선인장입니다"라고 말했다. 건조기후에 살아가는 선인장이 열대우림에 던져진 것처럼 우리는 과도한 도파민에 둘러싸인 환경에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우리는 더 많은 보상을 얻어야 쾌감을 느끼고, 상처가 덜하더라도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이 새로운 생태계에서 잘 지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우리는 21세기 인간으로서 어떠한 사고와 행동 방식을 가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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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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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목을 

"플라토닉하고 스토익한 불임의 세대를 넘어" 라고 썼다가 너무 거창해서 지운다.


제목의 번역에 대해 (불만까지는 아니지만) 의문이 있다. 街를 왜 도시로 번역했을까?

작품에서 벽에 둘러싸인 “마을(이 더 가깝다)”은 도시는 아니다. 오히려, 밀집된 인구로 효율을 내는 산업화된 City와는 대척점에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한다.


몇 명인가 (비전문) 일본어 구사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견해를 확인했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너라면 어느쪽을 고르겠어? 다른 한손에는 아이패드를 끼고 도시의 큰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젊은 여성이라면 말이야.”


요컨대, 고객과 가장 처음 접하는 상품의 요소로서 현대 자본주의적인 입장을 감안했다는. 납득한다. 

솔직히 하루키의 팬들에게는 제목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것이고, 하루키의 팬이 아니라면 어떤 제목을 해도 읽지 않을 것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제목으로(라도) 어필할 수 있는 층에 아무래도 충분히 어필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제목을 가지고 가타부타 따지고드는 것도 일부 팬층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업계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먹고사니즘의 문제이니까.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것 조금 더 투정을 해 보자면, 하루키 소설에서 장소로서의 “거리”는 월씬 더 원형적인(archetypal)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나”가 여름방학마다 돌아가는 거리이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원더랜드이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다면 제목의 도시를 “거리”라는 의미를 가진 고유명사처럼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루키의 팬이나 전작주의자일리도 없으며, 서점 판매대 앞에서 거리에 대해서 한번 더 숨을 들이켜고 깊이 생각해 줄 이유도 없기 때문에, 출판사(번역가)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적당한 단어를 선택했어야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애초에 한국어 용법에서의 거리와 일본어의 마치街는 쓰임이 다르지 않은가!


그러나 최소한 이 제목에서의 거리는 단순히 치환가능한 단어로서의 도시,도 거리도 (가로 라고도 쓰는것 같다.) 지극히 하루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해당 부분을 인용한다.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처음으로 여자와 관계를 가진 거리다. 앞을 바다, 뒤는 산, 옆에는 거대한 항구가 있는 아주 작은 거리다. 항구에서 돌아오는 길, 국도에서 속도를 내 때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성냥불을 켜고 나면 차는 벌써 그 거리를 지나 있기 때문이다” - 문학사상사,


그리고 나는 하루키가 그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실제로, 제목의 는 공식적인 한글판 출간전에는 “거리”라고 번역하고 있었다.
  • 영문판에서는 아마도 벽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있는 분절된 구획으로서의 의미때문에 (규모는 작지만.) City라고 번역한 걸까
  • 그렇다면, 국내판의 도시, 는 영문판 번역을 참고했던걸까.

  1. 하루키의 팬입니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책 자체는 완결되어있고, 2부를 기약하는 반쪽짜리 전반부도 아니다. 

그러나 하루키가 단지 이 작품 하나만을 발표한 작가였다고 한다면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예를 들면 경력이 없는 신인작가가 발표했다고 하더라도 공평하게 센세이셔널한 이야기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벽”은 좋게 말하면 하루키의 컨텍스트에 충실한 이야기이고, 나쁘게 말하면 심각한 동어반복에 가깝다. 그러나 모든 소설이 재미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따져볼 여지가 있고, 동어 반복이 반드시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키처럼 거창하게 보르헤스까지 인용하지 않더라도. 결국 모든 작가들은 다양한 컨텍스트를 통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한가지 이야기를 반복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하루키의 팬이라면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참신함을 찾는 하루키의 팬이 아닌 독자라면, 글쎄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출판씬을 생각해보았을때, 하루키는 아마도 국내에서 10년간 4-500만권이상의 책을 팔았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1년에 한권이라도 책을 읽는 인구가 2500만정도라고 가정했을때에는 왠만한 독자라면 하루키의 전작을 읽지 않았을 수 없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소설은 (다른 모든 하루키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불임"과 "닿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기존 작품들 보다 더욱 더 명확한 상징들을 사용해서 이야기의 지향점을 더욱더 증폭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동어반복은 오히려 장점이 된다. (팬들인) 우리는 더, 더, 더, 라고 외치며 하루키가 쓴 소설을 탐한다. 아마도 100% 만족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하루키라는 장르의 팬이니까.



2. 불임의 세계


‘바람”에서 부터 등장하는 하루키 소설의 원형은 기본적으로 좌절과 불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하는 이야기를 대략 이런 구도라고 설명해본다.

 

주인공의 현실세계에 신체적인 특징을 가진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주인공의 과거 (혹은 다른 세계에서)에는 사라진 여자아이가 있다. 그녀는 실종되었거나 자살했다. 

나는 그 여자아이를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른 식으로 그 지향이 변주된다.


“바람”에서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레코드를 빌려주었던 여자아이(아마도 투병중인)와 자살한 세번째로 잤던 여자아이와 연결되지만 

자살한(떠나간) 여자아이는 (당연하게도)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났고, 레코드를 빌려주었던 여자아이는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나”는 그러한 과정속에서 손가락이 네개인 여자아이와 연결되고 다시 헤어지고 마는데, 

(여자아이는 “나”에게 거짓말하고 낙태시술을 받는다.) 후일담에서도 그는 가정을 꾸리지만 아이를 가지지는 않는다.

결혼한 여자는 당연하게도 자신이 찾아헤메던 여자아이가 아니지만 어떠한 식으로든지 살아는 간다. 


그러나 결국 “나” 혹은 어떠한 주도적인 등장인물도 재생산Reproduction과 연결되는 행복한 가정을 가질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우산을 쥐고 뛰어내린 데릭 하트필드의 “불임성”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하루키가 전공투 사태이후 Dink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방향을 정했다는 것은 대체로 그러한 자세와 연관되어있다. 삶에의 초연과 여전한 자세의 유지라고 해야할까. 이루지 못할 것에 대한 도전과 지향. 

아마도,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그러니까 하루키는 예루살렘상 수상 소감에서 자신은 언제나 계란의 편에 서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현실적인 발을 딛고, 이상을 지향하는 것. 

뭐 거칠지만 그런 것이 소설에서의 하루키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데뷔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장.

“완벽한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은 의미 심장하다. 그런 정도의 지점에 서서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 - 너무 진지한 느낌이라,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3. 그림자에 대해


쥐는 나이며, 나는 쥐이고, 각자는 각자의 그림자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소녀는 말한다.

 💡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빛과 어둠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이상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빛의 세계로, 그림자는 그림자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치자.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각각의 세계에 정주한 상태가 아니라, 각각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려하는 곳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곳이고, 혹여라도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영원히 잃어버린 상태이고,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얼핏 마주친듯 싶지만, 영원히 헤어질 수 밖에 없는 100%의 여자아이 처럼.


우리는 각각의 가능세계에 대한 미련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닌다. 그런 모순적인 존재로서 존재하는 우리가 그림자를 떼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과의 투쟁을 포기하게되는게 아닐까. 


50대에 가까운 소시민 아빠로서 더이상 하루키의 입장을 100%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그림자를 걸리적 거리며 달고서도 어떻게든 걸어나가는게 인생이라고 하루키는 아마 말하고 있는 것 같다. 

20대 후반에 쓴 알레고리와 완벽에 대한 체념, 어떻게든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심과 다짐에 있어서 하루키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지 않아서 인가. 그런 의미에서는 충분히 피터팬 증후군이라 불릴만도 하다)



4. 플라토닉하고 스토익한 불임의 세대를 넘어


나는 하루키를 분명히 좋아한다. (추앙하는 수준으로 좋아했다.) 그러나 내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현실주의자의 노선”에 들어선 이후로는 그 좋아한다는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그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어떠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는 무엇인가에서 (아마도 버림받고) 다른 식의 삶을 선택했다. 그것이 그때의 시대상이었다. 그는 30이 넘은 사람을 신뢰하지 말라고 하는 히피의 시대를 살았고, 전후의 풍요의 시대를 거쳤고, (아마도) 무엇인가에 반항해 왔다. 최소한 순종적인 작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방식이 지금의 시대상에 여전히 유효한지 혹은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 까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가 좀 더 풍요를 노래하는 작가여도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실존적이지만 결국 삶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좀 더 뚜렷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100%의 여자아이를 포기하고 대 놓고 현실의 여자자이와 행복하게 잘 살게되었다면 하고 생각한다. 

물론 그랬다면 그건 하루키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벽"에서의 옐로서브마린 소년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나”의 대자代子 처럼 꿈읽는 이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그의 자리를 잇는다. (하루키 장르중에 최초 등장이 아닐까!) 그는 확연히 다음 세대이며, 최소한 꿈읽기 실력에서만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


20대 후반의 냉소주의와 쿨함이 몇십년동안 단련되어서 조그맣지만 따스한 시선을 가지게 된 것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벽"은 예전의 번뜩이는 면은 줄어들었지만 일관된 분위기와 숨겨진 낙관주의가 어쩌면 안도감을 준다. 어쩌면 하루키도 그래 이런 정도가 이제 슬슬 멈추어야 할 곳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키의 팬들에게는 여러가지 층위의 요소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었을 것 같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이 진짜 마지막 장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겠지만, 가능하면 계속 건필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다시한번) 가능하다면 수필과 단편도 많이 써주세요. 저는 아무래도 그쪽이 훨씬 더 매력적인것 같다. 너무 진지하고 길면 질려버리기 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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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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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금방 다 읽었다.

팩트에 입각한 통찰력과 세상 전반을 아우르는 커다란 크기의 구도외에도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운 독특한 경험담과 아름다운 문장이 곳곳에서 나온다. 멋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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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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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리우는 중국어와 영어를 둘다 말하고, 미국에 오래 산 미국인이며 동시에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못한 것 같다. 아내는 최근에 미국에서는 "이민자 문화"가 유행인것 아니냐고, 예를 들면 핫산 미나즈나 존 레귀자모, 켄 정, 이런 사람들이 각광받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미국은 언제나 이민자의 나라였고, 굳이 말하자면 백인 이민자들이 아닌 라티노, 인디언, 에이젼등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게 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해야할 것이다.


번역문에서도 느껴지는데 켄 리우의 문장은 아름답고, SF라기보다는 환상문학적인 면모가 있는것 같다. 앞의 세개 이야기를 읽었고 즐거웠는데, 킨들로 옮겨서 읽기로 한다.


- 참고로 켄 리우는 류츠신의 삼체를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예전에 삼체를 다 읽지 못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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