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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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2에 매혹적인 악역으로 등장하는 메로빙지언이라는 캐릭터가 있다. 그는 진실에 대한 힌트라며 묘한 말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늘어놓는다. 물론 그의 말이 진실에 대한 중의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주인공 일행은 물론이고 영화의 관객들까지 알고 있지만, 그런 느긋한 말장난을 하는 메로빙지언의 태도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모두의 짜증을 불러 일으킨다. 급기야 그의 아름다운 아내 페르세포네까지도 짜증을 내며 이런 말을 내뱉는다. "그놈의 헛소리, 지겨워 죽겠어요" 나도 영화를 보며 전적으로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종종 이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을 보고, 이 책이 에세이쪽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에세이를 읽을 생각이 없었기에 이 책에 거의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이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곧바로 이 책에 흥미가 생겼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책에 대한 책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있으랴? 어쩌면 이 책이 앤 패티먼의 책이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천사의 게임같은 느낌의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생 그 자체가 책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니까. 그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들었다. 표지에 은근하게 배어있는 연두빛과 펜으로 날렵하게 스케치한 부엉이 그림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표지의 부엉이와 책 사냥꾼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마치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도 들었다.

책의 시작은 다른책의 인용구에서 출발한다. 책에 대한 책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는 책의 시작으로써는, 책 속 화자의 말처럼 모든 것의 적절한 시작으로 느껴졌다. 그런 적절한 시작처럼 적절히 평탄한 삶을 이 책의 화자가 살았다면, 화자 그 자신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비록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의 아드레날린은 솟구치지 않겠지만. 하지만 화자는 그런 평탄한 보편적인 삶이 아니라, 쫒김과 쫒음의 대상으로써,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책 사냥꾼이였고, 덕분에 내 아드레날린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심심찮게 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으레 이런 뛰어난 능력을 지닌 주인공들이 필연적으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듯이, 이 책의 화자도 그런 함정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빠지게 되고 이야기는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얼핏보면 이 책은 진부한 영웅담일지는 모르겠지만, 책 사냥꾼이라는 독특한 직업과 그 직업의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계가 이 책을 평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그러나 너무 기대를 했기 때문이였을까? 아니면 작가의 데뷔작이기 때문이였을까? 분명 재미는 있으되, 의외로 여기저기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이 제2회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에 이의는 없다. 분명 열심히 노력해서 잘 쓴 책이고, 작가가 소설을 쓰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재미도  담뿍 담겨져있다. 재미만으로 치자면 이 책에 그다지 불만을 가질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외적인 부분에서 약간의 아쉬움과 조금의 짜증이 남았다. 이런 섭섭한 마음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작가의 문장이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문장들은 작가의 스타일이기 때문이였는지, 혹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일부러 길게 늘려서 쓴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이가 너무 길어서 숨이 가빴다. 심지어는 (내가 직접 세어봤는데)한 문장이 17줄의 분량으로 씌어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덕분에 이 소설에서는 한문단이 한문장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심심치않게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철학적인 탈을 쓴 듯한 그 문장들이 결국은 단 한마디의 짧은 문장으로 압축된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나 인셉션에서 줄기차게 말한 바로 그 주제, 과연 진실이란 무엇이느뇨?로 말이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선 이 책을 펼쳐든 순간부터, 완독한 지금까지도 매트릭스의 메로빙지언이 재주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이제는 메로빙지언과 오랜 세월 부부로 지낼 수 밖에 없었던 페르세포네가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다.

또한 문장의 길이 외에도 문장자체가 모호하게 취하고 있는 태도도 마음에 걸렸다. 이 책에 등장하는 문장의 전반적인 스타일은 이렇다. 그 사실은 이랬지만, 이랬을수도 있고, 저랬을수도 있고, 그랬을수도 있고, 어쩌구 저쩌구했을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러쿵 저러쿵 했을수도 있다. 나는 이런 작가의 문장 스타일에서 자신의 쓴 문장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처음에는 이것이 이 책의 화자가 가진 소심한 내면의 세계를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의 맨끝에 씌여진 작가의 말을 읽으며 이런 글의 태도가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적잖은 실망을 했다. 나는 소설가는 사기꾼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소설가만이 아니라 모든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들 역시 사기꾼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사실에 가까운 거짓말을 뻔뻔하고 당당하게 늘어놓는 사기꾼. 그래서 보다 완벽해 보이는 허구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즐거움과 감동을 줘야 하는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을 것 같은 소극적인 태도를 지닌 사기꾼에게 과연 몇명의 사람들이 기꺼이 속아 넘어가줄까? 처음엔 이런 문장의 느낌도 꽤 신선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반복된다면 정말 곤란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더욱더 재밌을수도 있었을 것을 문장들의 이런 삐걱거리는 앙상블로 그 재미를 깍아먹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매트릭스와 인셉션 얘기를 했는데, 그건 이 책을 읽으며 이 책이 영화화 되어도 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책 사냥꾼이라는 굉장히 독특한 소재와 그런 그들이 한권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배신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꼭 여느 스파이영화들처럼 긴박하고 매력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물론 메로빙지언을 떠올리게 하는 애매모호하며 길디긴 문장들을 각색한다면 더 멋진 영화가 되겠지만. 어쩌면 영화에서는 그런 길디긴 문장들을 대사화 할 수 없으니 이 책의 진가는 영화화 책을 때 더 폭발적으로 드러날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 한것은 온전히 재미만을 위해서 이 책을 선택한다면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매트릭스의 메로빙지언에 팬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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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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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문득, 작년 이맘때즈음 읽었던 이승우의 "한낮에 시선"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어쩌다보니 그 당시에 그 책을 삼분에 일 정도 읽은 시점에서 시력교정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수술 전까지 책을 완독할 생각이였는데, 상황이 뜻대로 흐르지 않은 덕분에 꽤 기분나쁜 통증과 함께 어둠속에서 가족들과 떨어진 채 귀로 들리는 소리에 의지해 삼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미처 다 읽지 못한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미련과 이미 읽은 부분들에 내용들이 종종 맴돌곤 했다. 한낮의 시선은 주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독백형식의 이야기들이였기에, 어둠속에 갇혀 있어야 했던 당시의 내 상황과 교묘하게 맞물려 내 머리속과 마음에 한부분을 차지해 버렸다. 그런데 거의 1년만에 그 책과 비슷한 서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을 만나게 되고보니, 사람과 사람간의 인연뿐만 아니라 책과 사람간의 인연도 참 재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런데 이 책의 읽기 위해 첫페이지를 펼치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목차가 없었다. 이 세상에 목차가 없는 책도 있던가. 안네의 일기에도 있는 목차가 왜 없지? 보통 표지와 목차로 대략적인 책의 느낌을 파악하며, 책을 읽을 준비를 하는 내게 이건 허를 찔린 느낌이였다. 게다가 왠지 황량하고도 꽉 막혀버린 표지의 이미지와 까칠한 재질의 표지재질은 이 책이 결코 녹록치 않으리라는 느낌을 주었다. 아니나다를까, 이 책은 정말 읽기에 만만치 않은 책이였다. 이 책은 이 책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마그다의 100센트 독백형식으로만 이루어졌으며, 이야기의 흐름과 공간이 그녀의 심리변화에 따라 계속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그녀가 지금 하는 말이, 그녀가 지금 묘사하는 풍경이 언제 어느때 일어난 것인지, 사실인지, 혹은 또다시 반복되는 그녀만의 상상인지, 주의깊게 읽고 살펴보아야 했다. 그러다 결국 이런 그녀 이야기 지쳐버렸고, 그녀의 이야기들을 꼼꼼히 따지며 그녀를 이해하기 보다는 그저 이야기에 흐름을 쫒아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덕분에 이후로는 보다 마음 편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지만, 마그다와 이 책을 오롯이 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 책의 뒷맛처럼 아직까지도 씁쓸하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마그다는 어린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황량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무관심한 아버지에게 관심과 애정을 갈구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관심을 둔 것은 하인의 아내인 안나였을 뿐이다. 그녀는 언제나 거친 농장일과 흑인하인들 속에서 백인이자 여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고립된 존재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하게 배어나오는 그녀의 고독감을 왠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눈수술로 인해 어둠 속에서 삼일을 보내야 했던 그때의 나는 꽤 고독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랄까. 옆에 가족들이 있었지만, 나 혼자만 어둠속에 있다는 그 괴리감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나에겐 비록 삼일의 시간이였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마그다는 평생을 그 괴로움 속에서 보내야 했다. 결국엔 벌레를 자신의 친구삼아 자신의 고독을 위로하면서까지 말이다. 

   
  우리는 베란다에 나란히 앉아 마지막 석양을 바라보고 별이 뜨기를 기다리며, 때때로 핸드릭이 강 너머에서 서툴고 부드럽게 기타줄을 튕기는 소리를 듣는다. 어느날 밤 대기가 유달리 잠잠하던 때, 그가 연주하는 <깃털로 가득한 손>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귀에 들려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바람이 그 희미한 소리를 실어 가 버린다. 우리는 저마다의 행성에 사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행성에, 그들은 그들의 행성에.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구절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이 책을 통털어 아마도 내가 가장 잘 이해한 구절이 이 부분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마그다의 모든 마음과 이 책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마그다는 깃털로 가득한 손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아버지의 애정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혹은 그녀가 호감을 갖고 있던 핸드릭에게 저 기타연주처럼 부드러운 사랑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은 이런 그녀의 소박한 바람은 한순간에 저멀리로 실어가 버린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처럼 자기만의 세계에서 고립되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제일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고독을 말하고 있지만, 이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이 아름답다는 표현이 내가 느낀 이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 책에 존재하는 모든 문장들이 결코 아름다운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은 않지만, 그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뜻과 의미는 모두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기분이였다. 물론 보통의 예술작품들처럼 쉽게 이해하기 힘든 소설이긴 했지만, 그 예술작품들이 주는 그 자체에서 받는 그런 감동을 이 책의 문장들을 통해 받았다.

존 맥스웰 쿳시의 작품을 이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언젠가 그의 소설을 읽어 볼 생각이긴 했지만, 하필이면 그의 소설 중, 제일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이 책을 통해서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 까탈스러운 책에서조차 그의 문장은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그의 다른 소설들에서는 얼마나 멋들어지게 존재할지 궁금하다. 그렇기에 조만간 그의 다른 작품을 통해서 그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참, 이 난해한 소설을 번역할 엄두를 내주신 번역가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소설이 J.M 쿳시의 두번째 소설임에도 이렇게 오랜 세월뒤에 번역된 까닭이 이 책의 첫문단만 읽어도 쉽게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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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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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체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이 입을 모아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 아름답다는 유럽의 프라하라는 곳에도 관심조차 없었다. 어쩐일인지 나는 정말 체코라는 나라에 도통 흥미가 일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그 나라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서도 거의 몰랐고(물론 세계사에 얽힌 것만 빼면), 그 나라의 문학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러니 내가 그 유명하다는 SF작가이자 로봇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카렐 차페크라는 작가를 모를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시작할 때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복잡하게 뒤엉킨 상태였다.   

도롱뇽과의 전쟁이라는 책의 제목과 이 책이 속한 SF장르에 대한 일종의 편견으로 인하여, 나는 이 책이 삼지창을 든 괴물 도롱뇽들과 인간들의 생존전쟁이라고 지제짐작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고도 나름 기발한 상상이였지만, 대략적으로 살펴본 이 책의 줄거리는 내 머릿속에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편집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간중간 껴 있는 색상의 페이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왠지 투박해 보이는 책의 편집상태도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책의 내용에 쏙 빠져들게 되면서 이 책의 이런 센스있는 편집에 감탄을 하고 말았다. 모든건 이 책의 의도를 담고자 고군분투한 편집부의 노력이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다음부터는 부디 빨간색 종이는 피해주길 바란다. 색상으로 말미암아 눈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은 1930년대로 세계가 전쟁으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뱉던 시기였다. 지금으로부터 너무나 오래전의 빛바랜 시절에 쓰여진 이야기. 그 당시 사람들이 과연 미래 자신들의 자손에 삶을 어느정도의 수준으로 상상했을까? 가만히 앉아서 전세계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소식이 채 하루가 되기도 전에 지구 전체로 그 소식이 전해지는 이 미래의 삶을 당시 사람들이 내다볼 수 있었을까? 아마 단 한가지는 예상했던 것 같다. 수십년이 흘러 우리가 엄청나게 진보된 삶을 누리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들과 싸우고 있으리라는 것을. 마치 거울을 보며 소리를 질러대고 악을 쓰는 한마리 원숭이처럼 말이다.  

어린시절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얽힌 소식들을 접하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내눈에 비친 그들의 생활은 우리의 생활에 비해 몹시 남루하고 곤궁해보였다. 매일매일을 싸움터에서 보내고 그 전쟁에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모두 비참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째서 싸움을 멈추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싸움을 멈추고 각자 자신들의 논밭을 가꾸고 평탄한 삶으로 돌아가는게 서로에게 더 이득이지 않는가? 어째서 그들은 그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자기 자신들을 갉아먹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제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 그 멈추지 않는 싸움이 그 당사자들이외의 사람들에게 많은 이득이 되며, 그 이득들 덕분에 그들이 멈추고 싶어도 스스로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마치 이 책에 쓰여진 도롱뇽과 인간의 싸움이 사실은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였다는 사실을, 내가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나도 그런 사람들 속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씁쓸한 여운을 더 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을 읽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가 카렐 차페크에 대한 감탄을 멈출수가 없을 것이다. 한사람의 머릿속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회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수십가지의 의견들을 내놓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였다. 게다가 이런 다양한 시각들을 하나의 이야기에 빈틈없이 매워놓은 그의 빼어난 글솜씨와 그 뛰어난 통찰력에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입모아 칭찬하고 이번 책의 번역에 많은 사람들이 반가움을 표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체코어가 아니라 영어로 번역된 것을 재번역한 것이라는 점이였다. 하지만 나조차도 체코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바라컨데 부디 머지않은 미래에 이 책을 체코어 번역본으로 만나보고 싶다. 그때는 또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때는 1930년대와 조금도 바뀌지 않은 우리네의 모습이 아주 약간은 바뀌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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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랩소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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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는 오묘한 식물이다. 과일처럼 먹지만 알고보면 채소로 정의되는 속성을 지녔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내가 토마토를 섭취하는 방법은 달라지지 않았다. 난 여전히 토마토를 설탕에 살짝 절여 먹는다. 이렇게 먹으면 영양소가 파괴된다고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내게는 가장 맛있는 토마토 요리법이다. 특히 그 설탕에 절인 토마토를 다 먹고 나면 생기는 토마토의 즙과 설탕이 섞여 생긴 쥬스는 정말 최고의 맛을 자아낸다. 사실은 이 마지막으로 먹는 쥬스가 먹고싶어서 토마토를 이렇게 먹는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먹는 방법외에 토마토가 딱히 맛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토마토란 채소에 대해 엄청난 호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토마토를 제목으로 내세우며 그 이미지까지 표지에 거침없이 박아넣은 이 책을 보는 순간 이 책에 시선이 끌렸다. 한겨울에 들어서는 길목에 서 있는 나에게 한여름의 햇살같은 향기를 이 책이 뿜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상큼하고 싱그러운 향기와 느낌에 이끌려 나는 마법처럼 이 책으로 빠져들었다.  

이 책의 작가 얘덤 셜은 특이한 이력의 작가이다. 시나리오 작가와 CF 감독으로 일하다가 유럽을 여행한 후, 뉴욕에서 프랑스 요리학교를 다닌 후 주방장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요가를 가르치며 소설을 쓰고 있댄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두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안정된 직장을 얻고 적당한 커리어를 쌓으며 아주 평범하고 나른하게 살아갈텐데, 이런면에서 보면 그는 참으로 남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그의 인생이 참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도는 고맙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활기차고 유쾌한 그의 인생에서 우러난 경험 덕분에 그의 인생의 맛깔나는 소스들을 이처럼 멋진 이야기들로써 만나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 책에 붙은 광고문구는 참으로 화려하다. 마르케스를 만나 흠뻑 취한 셰익스피어 같은, 맛있는 소설! 외에 어쩌구 저쩌구 등등. 그래서 처음에 이 책에 반해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도 아주 약간의 의심에 눈길을 이 책에서 거둘 수 없었다. 이렇게 유명작가들과 대놓고 비교하며 요란하며 현란한 문구로 광고하는 책들치고 제대로 된 책을 만나는 일이 드문 일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구들은 오히려 아름다운 여인의 외모를 조잡하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악세사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책은 마르케스나 셰익스피어 같은 위대한 작가들과 비교하며 그들의 후광을 이용해 자신을 빛내려하는 속빈 강정같이 허영심으로 가득차 있지 않았다. 이 책은 그저 이 책에 담긴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멋지고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로 자기 스스로를 빛내고 있을 뿐이였다. 

착하고 순박한 토마토 청년 다비도와 당차고 아름다운 올리브 아가씨 마리의 사랑이야기와 거기에 한데 얽힌 마을 사람들의 맛깔나는 이야기들은 한겨울 이불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도 달콤하고 향기로운 이탈이아에 밝은 햇볕아래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만들어 주었다. 사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산 사람이 직접 만든 스파게티를 먹어 본 기억이 있다. 맛이 어땠냐고? 그 지인의 요리솜씨는 정말 뛰어나서 모두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수준이였다는 것을 우선 전제하겠다. 비록 나에겐 조금 맞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나의 입맛이나 다른 이들의 입맛에도 이 책은 모두 다 쏙 들어 맞을 것 같다. 사랑이 모두의 가슴을 달콤하게 적시고, 토마토가 모두에게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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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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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솔직히 조금 걱정을 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는, 내 머릿속에 내재된 프랑스 문학에 대한 선입견들 때문이였다. 프랑스문학은 철학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므로 어렵고 지루해. 그러니까 읽기 어려워. 이게 내 머릿속의 전반적인 프랑스 문학에 대한 대부분의 생각들이였다. 머릿속의 프랑스문학에 대한 부분들이 저런 꽁깍지들에 쌓인채 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는 저 꽁깍지들을 다 벗겨낸뒤, 가볍고 상쾌한 기분으로 프랑스 문학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내 야심차며 똥꼬발랄한 생각은 이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급브레이크를 밟고 말았다. 책의 서문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서문이란 보통 작가가 독자들에게 앞으로 읽게 될 자신의 책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싣는 것인데, 그 내용이 이렇게 이해하기 힘들다니, 이 책의 내용이 나에겐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칼을 빼들었으면 무라도 잘게 채를 쳐서 그 즙이라도 쪽쪽 빨아먹어야 하는 법. 마음을 굳게 먹고 이 책을 완독하리라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라? 이 책, 꽤 재밌는 것이 아닌가?! 

육식이야기는 총 14개의 단편이 담긴 책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서문까지 하나를 더해 총 15개라고 말하고 싶다. 바로 내가 어렵다고 움찔한 그 서문 말이다. 처음 서문을 읽을 때는 철썩같이 작가의 말이자 주제라고 생각했으나, 서문의 끄트머리에 써 있는 사람의 이름을 읽게되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서문을 쓴 사람의 이름이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이름이 아니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글은 단지 이 책의 서문이자 누군자의 추천글이라고만 순진하게 생각했는데, 본문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되면서 그 서문이 저자가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이 책의 전반적인 이야기에 대한 포석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어렵고 까다로운 내용을 비비꼬아 놓으며 번역문이라는 변명을 달아 독자들에게 일종이 "뻥"을 쳐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게 되는 사람들이 부디 그 뻥에 속아 이 책을 덮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서문이라는 무거운 대문만 꾹 참고 열어서, 일단 본문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이 책의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버릴 될테니까.  

이 책의 작가 베르나르는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지나치는 소재들에 주목하고, 그 소재들로 독특하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여러가지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다. 덕분에 이 책에는 평범한 단편들 외에 콩트 형식의 에피소드 모음들과 편지글, 일기, 회고록, 희곡 같은 다양한 묘사방식이 존재하며, 이런 자유롭고 다양한 형식들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줬다. 또한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묘했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이 책은 물론 재미있고 유쾌하지만 그 즐거움이 밝은 햇살 아래 행복감의 느낌이 아니라,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 살짝은 으스스해진 미스테리한 느낌이 강하게 풍겨나왔다. 이런 느낌들은 환상문학과 단편이라는 특성상 자칫 가벼워질수도 있는 이 책의 이야기들에 무게감을 실어 주는 역활을 효과적으로 수행해줬는데 나는 이런 특유의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과 발상에 감탄하며, 이 책을 시작할 때 했던 걱정일랑 저 멀리 집어던지고 이 책에 푹 빠져들었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육식이야기였다. 제목과 표지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듯이 육식성 식물인 파리지옥이 주 소재로 등장한다. 한 나이 지긋한 괴짜 식물학자가 이 육식성 식물에 매료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첫 시작에서부터 이미 이 학자가 죽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에서 이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이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처럼 이 짐작 가능한 이야기의 전개를 베르나르 키리니는 참 맛깔나고 독특하게 짜나갔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는 내 예상을 벗어난 결말을 보여줬는데, 그것을 읽는 순간 왜 이 작품이 표제작이며 이 책의 제일 끝부분에 위치하게 됐는지 알게 됐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단 하나의 주제가 이 한편의 이야기에 모두 압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베르나르 키리니가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 아니였을까. 문득 이 책의 서문과 본문 사이에 끼여 있던 글 한자락이 생각났다.  

"이 놀라운 일들이 현실이라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것들이 상상의 것이라면 난 이미 미쳐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문구를 읽고 서문이 뻥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결국 이 책은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었고, 난 이런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놓은 작가가 치는 뻥에 계속 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뻥에 당하기 위해 기꺼이 이 책을 읽은 것은 나였고, 그 즐거움에 한껏 취할 수 있었으니 만족한다. 때로는 이렇게 독특하며 새로운 스타일의 책에 빠져드는 것도 독서의 한 재미니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베르나르 키리니는 간만에 만난 독특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였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을  특유의 관찰력으로 찾아낸 소재들을 글로 옮길 수 있는 필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 하나만으로는 작가 소개문구처럼 이 작가가 마르셀 에메와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비견될만한 재목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책 한권만으로 그를 단정짓기엔 그에 대한 단서가 부족했다. 다만 이제 그는 갓 시작하는 풋풋한 새내기 작가이므로 그 싹이 어떤 나무로 자라날지 지켜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과연 다음에 만날 그의 이야기는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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