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2:5 - 7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 언약은 생명과 평강을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평강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주신다는 약속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그 약속을 믿을 수 없을때 우리는 현실을 보면서 불안해 하게 됩니다.

그 언약을 왜 주셨느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외라는 것은 존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존경이란 마음속에서부터 높이고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비추어보아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높이고 우선시하며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로 이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비추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다고 하시는데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함은 나의 삶에 경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리지 못하는 것은 나의 삶이 정비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동행의 증거는 화평과 정직으로 나타납니다. 화평은 하나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고 정직하다는 것은 진실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철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안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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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선물.소중한 사람 세우기
게리 스맬리 외 / 요단출판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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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통로가 되는 길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듯이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성결과 헌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철저히 바라보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축복을 가로막고 있는 삶과 단절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친척 아비 집을 떠났듯이 우리도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삶의 패턴에서 떠나야 한다. 과거 삶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다. 축복의 주체인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겠는가?
  축복은 헌신이다. 타인을 향한 축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을 결단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축복하려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타인을 바라보는 예수그리스도의 긍휼함이 있어야 한다. 타인을 통해 나를 채우고자 할 때 나는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럴 때는 나는 축복의 사람이 아니라 저주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라는 생각으로 내 입에서는 비난의 화살이 그를 향해 쏘아진다. 충고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서. 타인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약효가 들지 않을 때 그 비난의 강도는 점점 강화되어 저주로 변화한다. 그것이 나와 친한 사람일수록 더 빨리 저주로 변하는 모습을 보인다. 밖에서는 아주 인자한 모습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하는 우리나라의 가장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모습과 마찬가지로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에서 나는 축복하기 보다는 비난과 저주를 사용하는 횟수가 더 많게 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내 마음대로 조종되지 않을 때 내 안에는 왠지 모를 불안과 허무감이 생겨난다. 그래서, 학생들이나 아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게 된다. 학생들이나 자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행위가 변하여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벌을 주거나 체벌하게 된다.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될 때, 나의 입에서는 원색적인 비난과 저주가 퍼부어진다. 내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러한 비난과 저주는 나타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의 원리는 내가 변하는데서 출발한다. 타인에 대한 분노와 원망- 이 분노와 원망은 내가 요구하는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때 나타난다.- 이 끊임없이 나타날 때는 축복할 수 없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는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 아니 제자들 조차도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할 때, 그 마음은 오직 상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제자들을 향해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하시는, 사랑을 끝없이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벌어지는 어렵고 힘든 일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그 일들만을 바라보면 그 속에 매몰되어 버린다. 그 고통만이 나를 지배할 수 밖에 없다. 그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를 향해 계획하시는 선하신 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더 이상 그 일이나 사람들에게 매여 세상과 사람들에게 원망을 내뱉지 않게 될 수 있다. 그래야지만 나는 축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각이 교정될 때만 이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써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단지 방법론적인 시각만으로 이 내용으로 축복하게 되면, 결국은 축복의 행위가 아니라 저주의 행위를 변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축복의 밑바닥에는 상대를 나에게 맞게 조종하려는 의도가 숨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의도가 제대로 먹히지 않을 때, 내가 아무리 부드러운 터치와 이상을 제시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속으로 상대를 향한 저주는 계속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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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보고 크는 아이들 - 그림책으로 시작하는 아이교육
이상금 지음 / 사계절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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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읽기 -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는 방법
  집에 7살난 아들과 4살난 딸이 있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기 일쑤이다. 그것도 여러 가지 책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책을 계속 반복해서 읽어주기를 요구한다. 내가 보기에 더 교육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재미없어 한다. 자신의 눈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 보고 싶어한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 위해서는 눈높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아이들이 원하는 바를 아이들 위치에서 바라보는 노력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책을 아이들에게 읽게 할 수 있도록 해야함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책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 어떻게 선별할 것인가가 중요한 점이 되는 데 이 책은 그것에 대한 관점과 시각을 보여준다. 그림책은 유아와 아동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그림책을 아동과 같이 보며 읽어줌을 통해 부모의 사랑까지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부모의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 자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란 무지 어려운 것이다. 엄한 아버지의 모습만 보고 자란 사람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엄한 모습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나약함과 실수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부모의 충분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성경을 그림책으로 꾸며서 같이 읽어준다면 부모의 사랑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까지 잘 전달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의 내용이 빨리 그림책으로 만들어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림책을 읽으면 동심을 되찾을 수 있다. 동심은 순수함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순수한 시각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힘이 길러지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이나 이기심이 섞여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라고 했을때 그 말씀 그대로 바다위를 걸었던 베드로의 마음은 바로 아이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해타산을 고려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 믿는 그 마음. 바로 아이의 순수한 마음 즉, 동심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동심을 그림책은 되찾게 해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림책을 저급한 책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 아이들이 글자를 익히지 못했을 때나 보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빨리빨리 글을 배워서 읽게 되길 기대하며 교육시킨다. 그리고 아이가 그림만을 보고 있으면 글자는 왜 않 읽고 있느냐고 다그치기 일쑤이다. 그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상상하고 만들어가고 있는 아이의 생각과 상황은 전혀 바라보지 못한 채.
  이 책을 읽으면서 유아교육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유아교육은 나의 상황에서는 자녀 교육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그림책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결국 아이들에게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살아나가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만들어가는 한 방법적 측면에서 그림책을 읽히는 것은 효과적이라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부모를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자녀들이기에 부모의 삶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이러저러한 설명으로 지식으로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그 순간순간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채워가는 방식으로 익히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속에서 성경적인 삶의 모델을 보여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두 문장으로 기술하면, 그림책을 왜 읽어야 되는가? 어떤 그림책을 읽힐 것인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해답만으로도 이 책 한권을 읽는 시간이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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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세우는 사람 - 멘도링원리
하워드 헨드릭스 / 디모데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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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신뢰, 절대적 헌신
엘리야가 엘리사를 키워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다음 영적 세대를 키울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그것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아합에게 수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전하라고 했을 때 순종해서 가서 전했다. 하나님이 가서 전하라는 사실이 중요했을 뿐이지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아합왕(세상의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세력)과 정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대적한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1대 세상 전체였지만,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엘리야에게는 하나님+한사람은 세상 전체보다 많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마가복음 6장에서 우리는 오병이어의 사건과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의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속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는데 삶의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예수님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시편 27:14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게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볼때 그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걸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붙들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선이 주님에게서 떠나 풍랑(현실적문제)으로 옮겨졌을때 베드로는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문제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라본 풍랑은 우리의 현실적 문제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수렁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내가 발버둥치며 빠져나가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더욱 깊게 빠져듭니다. 나중에는 목숨까지도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고요히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을 바라보면서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물위를 걸으라'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 속에서도 동일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먹이라고 명령하셨을 때 제자들은 우리가 어떻게 먹일수 있느냐는 의심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았을 때 주님께서 5000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명령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 그분의 얼굴만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교통의 중심에는 기도의 삶이 있어야 됩니다. 기도없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바라보면 모든 일이 기도로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엘리야와 베드로는 유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성정이 매우 급한 면을 보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을 때 그들은 그 문제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 그들은 확신감 속에서 사역했습니다.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영적 성장은 지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계맺음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속에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관계 맺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멘토링이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쫒아다님으로써 하나님에게 절대 확신을 가진 헌신된 엘리야의 모습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습을 익히고 체험했다. 우리가 새로운 영적 세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절대 헌신된 우리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보고 익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책은 신앙의 여정을 그려주고 있다. 진리위에 서는 것과 방법, 그리고, 실천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을 섬기며, 세상속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심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떻게 영향력을 드러낼 것인가?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 속에서 ‘헌신’이 나타난다. 헌신은 자기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의 욕심, 자아 등이 십자가 앞에서 내려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복음 앞에서 빚진자의 심정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찾은 사람을 세우는 방법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과 ‘절대적 헌신’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방법을 보면서 과연 내가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가를 고민해보게 되었다. 예수그리스도가 절대 진리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 진리 앞에 서기위해 발버둥치는 나의 삶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지금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보다는 아직 내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예수를 몰라도 나는 별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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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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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거울 신화(비슷한 너무도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것은 비슷한 모양이다. 그리스로마신화의 내용이 비슷하게 각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화의 유사성은 모두가 공통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통적인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 지금의 이야기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레이저는 <문명과 야만>에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내용이 각 나라의 신화와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모두가 동일한 이야기를 통해 변해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벨탑 사건 이전에 구음이 하나였던 시기에서 하나님 앞에 인간의 교만으로 구음이 달라져 흩어지게 된 성경의 사건이 불현 듯 떠오른다. 원래는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믿음, 사고 동일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살아갔던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말이 달라져 세상으로 흩어져 버린 사람들이 되었다. 말이 달라지고, 믿음이 부패되어 버리고, 생각이 달라져 버린 사람들이 되었다. 전부다 제 갈길로 가버린 시대가 되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동일한 생각, 이야기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지만 기본적 맥락은 유사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일시키려면 우리의 구음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음이 하나게 되게 하는 사건을 허락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통해 성소의 장막이 찢어졌고 그것을 통해 막힌 담을 허셨다. 세상의 사람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구음이 하나되게 하는 예수 안에서 세상이 하나되게 하는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됨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의 존재 목적으로 돌아게게 하는 것이다. 그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화를 읽으면 우리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신화를 통해서 우리네 삶을 읽는다. 우리의 감정, 모습, 생각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미움이 있는가하면 사랑이 존재하고 타툼과 질투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 신화는 신화가 아니라 우리네 마음이다. 마음 속의 하나하나가 인격이 되어 신들로 자리잡고 있다.
  신화를 통해 사람들의 바람을 읽는다. 풍요로움을 바라는 인간들의 모습이 신화속에 들어 있다. 나에게 누군가 축복할 때 나는 풍요로와 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자신을 축복하도록 모든 신을 섬긴다. 자신을 축복하도록 하기 위한 신을 만들어 섬긴다.
  결국 신화는 인간의 삶이다. 신화속에는 인간의 욕망이 드러난다. 신화속에는 삶의 풍요함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투쟁을 전개해 나간다. 그 투쟁에서 성공할 때 드디어 인간은 신화가 된다.
  현대에서 신화는 성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성공 신화’라는 말이 있듯이 성공이 곧 현대인들에게는 ‘신화’로서 자리잡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이제는 신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라는 두 글자 속에 다 표현되고 있다. 현대인의 모든 생활의 방향이 이 성공을 향해서 줄달음질치고 있다. ‘성공’이라는 것은 세상에 드러나보여야 되는 것이다. 물질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신화 속에서 풍요의 뿔을 가지고 있듯이 현실에서는 ‘성공’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의 행복이 보장된다고 끊임없이 되뇌어지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조차도 이러한 성공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나님이 최고, 최종, 가장 귀한 목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는 우선 성공을 더 중요시하는 모습이 보인다. 일단은 성공해야지 하나님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극히 교만한 모습이다. 바벨탑 사건에서도 인간들은 세상에 그들을 드러내고자 했고, 그들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계속 이루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현대의 성공의 신화는 인간의 교만한 모습의 반영이다. 무엇인가를 이루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가는 것에 초점 맞추어져 있다. 인간이 성공에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과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교회에 늘어갈 때, 하나님은 반드시 교회를 흩어버릴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문화를 받아드려서는 안된다.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다양한 문화를 교회안으로 끌여들여 세상 사람들을 이끌여 들이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원색적인 복음의 메시지로 무장되어야 한다.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대로 따라 살려는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일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들이 교회마다 나타나야 할 것이다. 단순히 지식적인 성경교리 공부가 아니라 실제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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