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평전 - 시대를 거역한 격정과 파란의 생애
허경진 지음 / 돌베개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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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게바라를 읽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비슷한 생각을 했던 인물을 찾고 싶었다.  그 중에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삶의 양상을 보였던 허균을 떠올렸다. 그의 삶을 보다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읽으면서 허균의 고민이나 삶의 궤적이나 역사적 삶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글을 쓴 필자가 역사학자가 아니라 국문학자이기 때문이리라. 문학과 글을 통해서 허균의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래도 이 글을 통틀어 허균에 대한 평가는 확연히 드러난다. '유학 반도 허균'

 허균이 꿈꿨던 세상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일까? 버림받은 사람들, 세상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관심. 그는 왜 그런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나는 내내 읽으면서 그것이 궁금했다. 어떻게 그런 관심을 가졌고, 어떤 방식으로 그런 세상을 이루어 내고 싶어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누리며 여유롭게 살 수 있었던 그였기에 더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대대로 명문가문에 뛰어난 재능 충분하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가며 살 수 있었던 그가 왜 체제에 대한 반발을 통해 혹독하게 죽어갈 수 밖에 없었을까?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는 천재성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그가 했을 고민들을 한번 되집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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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상자 - 하나님의 산 역사 갈대상자
김영애 지음 / 두란노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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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을 울렸던 성경 말씀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말씀이 나의 심금을 울렸다.

 믿음의 길은 '내려놓음'에 있다.  믿음의 일꾼은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된다. 내가 가진 것, 나의 지식, 나의 권위, 나의 명성, 나의 자존심 등.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나를 온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내려놓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보이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 붙잡은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내려놓는다는 것은 확실히 보이는 것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부여잡는 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굉장한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그 고통을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느낄 수 있는 나여야만이 믿음의 길로 들어설수 있게 된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이 목적인가? 과연 나는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계획한 길을 따라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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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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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 속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한다. 자신에게 완전히 몰두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가치를 끝까지 추구하다가 삶을 마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이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두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되었다.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의 두 양상을 보았다. 먼저,  삶의 진실성을 추구한 모습이었다. 진정하게 자신이 바라본 삶을 끝까지 추구하는 열정. 그 무엇이 가로막히더라도 자신의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않는 모습. 정말 오늘날 삶의 사표가 될 만한 삶의 궤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 당시의 현실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다. 그 자신이 그 삶속에 만족하였을뿐 그들의 능력을 다른 일반 사람들에게 별로 나누어주지 못했다. 현실성 없는 삶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지식인 들에게 많은 각성을 줄 수 있으리라.

이 인물들을 보면서, 나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들과 같이 뚜렷한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피에르 쌍소가 <느리게 사는 삶>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물 그 자체를 볼 줄 아는 즐길 줄 아는 삶을 우리의 선현들은 벌써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선 그 자리에서 능인자안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패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승리자로서 의기양양한 그래서 세상에 어깨를 들썩이며 살아간 사람들이 아니라, 패배자로서 겸손히 살아갔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패배자의 삶이었던 것이 오늘날 다시 승리자의 삶으로서 부활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역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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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지대 1:운명편
야마자끼 도요꼬 지음 / 청조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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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지대(不毛地帶)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식물이 자라지 않는 거칠고 메마른 땅이다. 이 책을 읽기전 제목을 보면서 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을 제목으로 잡았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일본의 전후 상황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그들이 살아가는 곳은 불모지대일 수 밖에 없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은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었다. 인간다운 소망이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시기이고, 또한 현실도 여전히 그렇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다 불모지대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읽으면서, 조금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그렇게 현실의 모습을 불모지대로 인식한 작가가 왜 그 나라 자신(일본)이 가해자라는 사실은 아예 외면할까라는 의문점이다. 현실의 삶을 '이끼'라는 실존적 인물을 통해 냉철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가가 어째서 그 인물 자체가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 작가적 양심이 의문스러웠다. 이것이 단순히 위인전기였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현대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쓰여진 소설이라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그 문제를 제외하고 본다면, 일본의 전후 변화상황과 그 속에서 빨리 시류에 영합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 그 나름대로 인간적인 가치를 위해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들 등 현실의 여러 3단면들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 참 감칠맛 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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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덫 세미나리움 총서 1
한스 피터 마르틴 외 지음, 강수돌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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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에 대한 신화에 대한 의문



요즘 기업 경영주들의 말소리를 들어보면 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고용 유연성을 확보해 세계 경쟁력을 확보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오로지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만을 찾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효율성 제고를 방법을 추구한다. 그 속에 사람에 대한 배려는 사라진다. 인건비를 조금이라도 낮추면 낮출수록 기업의 경쟁력은 강화된다. 끊임없이 고비용의 구조를 저비용의 구조로 낮추려고 한다. 그렇게 됨으로 많은 사람들의 고용이 사실상 불안정해지게 된다.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전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결국 임금의 하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제 기업 활동(경제활동)을 왜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진지하게 던질 시기이다. 무엇을 위해 발전을 추구하고 무엇을 위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는 시기이다. 결국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려고 발전을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익의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질적으로 향상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효율화, 경쟁을 통한 거대화, 전문화된 사회의 문제점은 통제가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고도의 전문화된 모습 속에는 인간의 모습이 깃들일 여지가 없다. 우리가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의 모습을 살펴볼 때,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보고 폭격을 하지 않는다. 단지 스크린이나 컴퓨터 화면 위에 나타나는 위치를 향해 버튼을 누를 뿐이었다. 이 버튼만 누르면 될 때 별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된다. 최저 생계비를 결정하는 위원회에 속한 사람들이 해마다 최저 생계비를 전년대비 몇 % 상향시켰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실제로 그 사람들이 그 돈으로 한 달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단지 경제적인 수치나 데이터를 통해 결정할 뿐이다.

거대화, 전문화된 집단은 자신만의 데이터를 신뢰하고 자신 집단의 최대 이익을 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경향성이 강해진다. 이러한 것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기 집단만의 이익 추구 경향이 강화되는 것이다. 집단만이 살아남고 집단 외에는 다 죽어가는(망해가는) 모습이 나타난다. 경쟁은 1등과 다수의 패배자만을 낳게 된다. 1등만이 살아남는 사회는 안식이 없는 곳이다.

우리가 세계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수단이지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버린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을까? 경쟁이라는 수단이 오히려 목적화되어 버린 현실 속에서 결국 소수의 삶만이 높은 질을 유지하는 현실을 어떻게 하면 바꾸어 낼 수 있을까? 개인마다 삶의 본질에 대해 궁구할 필요성이 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효율성에 대한 신화를 우리의 가슴 속에서 지울 때이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이 선이 될 수는 없다. 효율성을 강조하다 보면 인간의 노동력의 가치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력은 기계의 노동력보다 훨씬 더 비효율적으로 평가되었다. 기계로서 많이 대치되어 버렸다. 인간의 노동력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점점 낮아지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 노동력의 가치는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는 의식의 혁신이 필요하다.

무한 경쟁은 긍휼의 마음을 죽인다. 1등만이 살아남는 사회에서는 1등 미만의 대상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비효율을 감수해야 한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효율성에 어긋난 행위가 죄악시되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나 도움은 경제적 이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 안에서도 이러한 개인 이기주의 경향은 강하게 나타난다. 타인을 위한 배려나 약한 자를 위한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한 글자라도 더 보는 것이 남는 것이 입시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자신이 해야될 일 외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성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자기 발 옆에 떨어져 있는 휴지 하나 주우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얘기하면서. 할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경쟁의 사회는 긍휼과 돌봄의 사회적 안전망을 파괴한다. 철저한 강자존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정글 법칙을 인간의 삶속으로 집어 넣고 있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절대 선이 될 수 없듯이 효율성도 절대 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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