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 - 현대신서 2
롤로 메이 지음, 백상창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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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느끼는 감정은 공허감이다. 무엇인가가 텅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무기력감에 빠져들게 되고 그런 나 자신이 불안해지는 경험을 주기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학교 현실을 살펴보아도 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된다. 학생들은 많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혹시 왕따당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까?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친구관계에 소외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의 경쟁구도와 이성 강조의 실태가 자아의식의 상실을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자아라는 것이 무엇일까? 자기에 대한 인식이 무엇을 바탕으로 가능한 것일까?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무엇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을까? 자아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아야 한다. 내가 이 땅에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의 교육 현실은 단순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좋은 직장을 얻어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에 초점이 두어져 있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과 경쟁해서 보다 좋은 위치를 선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떻게에 대한 것을 가르친다. 이렇게 되다보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을 키워내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발견해야 한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진정한 구주로 고백할 수 있을 때 나의 존재 의미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 속에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의미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난 소명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소명을 발견한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일구어 나갈 수 있고, 그 삶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 세계를 변혁시켜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소명을 발견한 사람은 성숙에 이르는 삶을 살게 된다. 성숙은 어떤 것일까? 스피노자는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은혜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인가, 아님 하나님이 주시는 대가인가?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내가 한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의 결과로서 바라보고 내 행동을 의롭게 하고자 노력할 것인가?
  내게 주어진 이 현실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미에서 바라볼 것인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이별할 때를 생각해 본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조카롯은 에덴동산 같은 소돔․고모라를 택하고 아브라함은 거친 광야를 얻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이 임하게 된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아브라함이 그 현실적 갈등에서 선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부터 주신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받은 것이다.
  현대인들이 이 갈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공허한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를 그 아브라함같이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현실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성숙이란 바로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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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이 기적을 만든다 박필교수의 말 시리즈 1
박필 지음 / 국민일보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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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무수한 말의 홍수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말들이 나를 얽어매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 말이 흘러가서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지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말씀을 통해 만드셨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지낼때가 많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말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권세를 이미 받은 자이고 그 권세를 가진 자의 말은 능력과 힘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이들이나 사람들에게 부정적이고 저주 섞인 말을 통해 나의 분노를 풀어내고 있는 내 자신을 돌이켜 볼때 갑자기 끔찍해진다.

 어떻게 말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까? 우리가 기본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삶이 있을때 끊임없이 그것을 염원하게 된다. 반복적으로 바라다가 보면 어느새 그 모습이 이루어진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바라볼것은 결국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것을 알때 우리 입에서 불평과 불만의 말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는 말들을 하게 된다. 결국 믿음에서 능력이 나타남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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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지식인들
폴 존슨 지음, 김일세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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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것인가?
벌거벗은 지식인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보통 위대하다고 하는 인물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위대한 사상가, 교육가, 문학가 등. 우리가 교과서나 책 속에서 배우던 그들의 위대한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인류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을 주었던 그네들의 모습은 하나의 경이로움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펼칠수 있을까하는 느낌과 함께 나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경이의 대상들은 하나둘 그 자리를 내려와야 했다. 실제로 현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서 살아갔던 추악한 인간의 일면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위대한 지식인들이 가진 공통점은 자신만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모든 세상이 자신을 우러러 보기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다. 이 지식인들의 행동과 생활은 이기심의 극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당연히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게 될뿐이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는 하지 않았다. 너무나 공허한 관념의 외침이 있을뿐이지 우리의 삶을 실제로 개선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갈등의 골만 더 조장할 뿐이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드는 의문이었다. 무엇이 이들의 삶을 편협하게 만들어 갔을까?
그들도 그들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평생에 걸쳐 살아갔는데, 이 인류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에 걸쳐 노력했는데, 왜 그들의 삶은 자신의 주장과는 괴리되어 살아갔을까? 왜 그들은 자신의 주장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기 못했을까? 자신은 그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면, 자신의 삶은 자신의 주장대로 일치되었다고 생각했을까?하는 계속되는 의문이 나를 곤혹하게 한다.
그러한 나의 고민은 한가지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왜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짜 그 목적이 세상을 위한 것이었을까라는 의문을 던져보았다. 그것이 진정이었다면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본이 되게 만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간 사람은 책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은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위상을 세상에 높이려는 하나의 시도였을 뿐이다.
세상을 위한다는 것은 하나의 허구일 뿐이고,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 대중의 지지와 우상시되는 명예를 즐겼을뿐이었다. 비록 그들의 사상이 일정정도 세상에 유효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을망정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갈등과 대립은 더욱 크다.
이 지식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지식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출발점이 달라야 함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일을 하는 출발점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덕을 실현시키는 전도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위로를 주지 않아도 흔들림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며,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삶의 기쁨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공허한 사랑의 외침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나누기 위해서는 눈높이가 같아져야 한다. 내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혜자적인 태도로서는 나눌 수 없다. 책속의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세상을 섬길 사람들을 부르셨고, 일할 사람을 부르셨지 섬김을 받을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으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위한 종임을 생각해야 한다. 이 세상을 위해서 진정으로 어떤 것부터 섬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진정한 세상을 위한 지식인은 세상으로부터 명예나 섬김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자로서 끊임없이 낮은 자들을 위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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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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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가르쳐지고 있는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생각하기에 따라 다양한 답을 요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사회의 유기적인 기능을 효율적으로 인도해 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고, 기득권 층의 지배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은 누구를 위한 교육일까를 고민하게 된다. 아니 교육을 어떤 관점으로 행해야 할까가 더 고민되는 현실이다. 기능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가? 갈등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교육의 내용을 효율성에 둘 것인가? 아니면 자유에 둘 것인가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교사된 자의 모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단순히 직업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사회를 유지시켜 나가는 성직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민주사회를 이끌어가는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학생들을 길러낼 것인가? 사회에서는 부단히 두 번째의 교사가 되기를 요구한다. 끊임없이 가르치는 내용을 통제받고 정해진 내용을 가르치기만을 요구받고 있다. 학교에서 중요한 학생의 생활지도는 민주적인 사고훈련보다는 사회에 적응하는 학생을 길러내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통제와 관리가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중요한 일이다.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는 무시되기 경향이 강하다. 전형적인 유교적인 윤리를 기반으로 어린 학생이 나이 많은 교사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드러내면 강한 질타가 뒤따르며, 권위에 일방적으로 순응하기를 가르친다.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에 절대적으로 따라오는 학생이 모범생이고 착한 학생으로 취급받는다.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개진하는 학생들은 문제가 있는 학생으로, 교사의 권위를 위해하는 학생으로 낙인 찍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나도 학급관리를 하게 될 때, 학생과 대화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결정하기보다는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 그때 그것을 학생이 행하지 않을 때 격렬한 나의 반응이 나타난다. 나의 권위가 훼손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가 지시한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까지 설득하거나, 강압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학교 현장이 민주적인 절차와 방식을 가르치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비판력을 키우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생각은 현실에서 나의 삶조차도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입으로만 되뇌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교육은 현상의 왜곡이다. 우리의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민주주의를 체험케 시키는 것이다. 비판적 도구를 학생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될까를 꾸준히 고민해야 될 것이다.
  나도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체제적인 문제만을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교사로서 해야될 일을 간과하기 쉬워진다. 나 스스로 먼저 변화하려는 노력을 해야됨을 알 수 있다.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학생을 대할수 있는 전인적 인격을 소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학생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연민, 그리고, 기대의식을 통해 학생들의 학습과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유도해 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교사란 참 힘든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가진 교과지식에 정통해야 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가르칠 교수법을 새롭게 개발해야 하며, 교사로서의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또 사회적인 도덕적 의무를 계속 실천해야 하며, 학생들에게 질서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을 학습에 즐겁게 임하게 하기 위해 상상력도 풍부해야 한다. 학생에 끊임없는 연민을 갖고 있어야 하며, 학생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한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민주적인 절차와 사고를 훈련시키는 리더이자, 그 모습을 본을 보여 줄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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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교사는 이렇게 가르친다
제임스 M. 배너 주니어.해럴드 C. 캐넌 지음, 이창신 옮김 / 풀빛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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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교사된 자의 모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교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역할이나 해야할 행동을 달라질 것이다. 단순히 직업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사회를 유지시켜 나가는 성직으로 볼것이냐에 따라 그 역할 행동을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교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 않다.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학생을 대할수 있는 전인적 인격을 소유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학생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연민, 그리고, 기대의식을 통해 학생들의 학습과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유도해 내는 자가 교사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교사란 참 힘든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가진 교과지식에 정통해야 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가르칠 교수법을 새롭게 개발해야 하며, 교사로서의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또 사회적인 도덕적 의무를 계속 실천해야 하며, 학생들에게 질서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을 학습에 즐겁게 임하게 하기 위해 상상력도 풍부해야 한다. 학생에 끊임없는 연민을 갖고 있어야 하며, 학생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한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숨이 탁 막힌다. 교육학 개론에나 있음직한 성직관으로서의 교사의 역할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참 좋은 말이구나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게 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교사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사회는 교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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