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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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으로 악한 인간


우리는 보통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며 사회와 역사가 발전하고 있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고 서로 베푸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유토피아가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한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에 의해 수많은 제도가 만들어져 왔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철인정치, 군주제 등등. 다양한 형태가 시도되었고, 이전 체제를 부정하고 상반된 체제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회적 불평등의 구조를 해결한 제도는 역사상 존재하지 못했다. 여전히 사회적인 불평등의 구조는 여전히 현존하고 있다.

인간 사회에 있어 영원한 평화(불평등의 구조 해소)는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이 집단화 될 때 더욱 큰 강제성이 나타나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이 강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이성과 양심의 법에 의지하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보다 높은 사회의 도덕성이 획득되기도 하고 어느 정도 갈등이 완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의 해결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인간적인 해결방법들은 또 다른 혼란을 가져오는 경향을 보인다. ‘엔트로피’의 법칙에서 보이듯 우리가 문제를 해결한 듯 보이지만 사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것들을 많이 본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과연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인가? 모든 판단의 기준은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 그럼 사회의 판단 기준이 비도덕적이라면 개인은 과연 도덕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바로 도덕이 상대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 도덕적인 행위가 될 지라도 다른 사회에서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도덕적이게 하는 두 요소는 이성과 양심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도덕을 신뢰할 수 있을까? 집단 악은 개인 악의 발현이다. 이성과 양심에 바탕된 개인적 도덕 의식의 근원은 바로 자기 의식이다. 이 자기 의식은 남과의 구분과 대립에서 나타난다. 자기 유한성의 극복은 필연 남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려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결국 생존 본능은 힘에 대한 집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이미 획득한 힘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힘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이 강화된다.

무엇이 이것을 규제하고 조절할 수 있을까? 인간의 한계성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죄성을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도덕성이 우수한 인간들의 집단일지라도 그 집단을 위해서는 다른 집단을 배려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집단적 이기는 그 집단 자체에서는 아주 선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집단의 입장에서 볼때 굉장히 파괴적인 모습으로 비추인다. 개인의 사랑이 본질적으로 집단으로 확장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오직 완전한 자, 죄성이 전혀 없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능한 사랑이다.

집단적인 이기성의 모습은 우리가 프랑스 혁명의 과정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했던 프랑스의 시민들. 그러나, 결국은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나폴레옹을 선택했고, 그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유럽에 전화를 일으켰던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사랑은 개인을 넘어설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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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
김탁환 지음 / 살림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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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고래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그 고래는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였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의 소망과 비원이 담겨져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이 집합되어 있는 것이다.

금오신화에는 김시습의 욕망이 구조화되어 있고, 고전소설에는 조선조 민중의 욕망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흥부전과 같은 것에는 바로 힘없고 굶주린 서민들의 염원이 녹아 있다. 잘 먹고 배부르게 살고 그들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무너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서민들의 욕망이 집요하게 표출되어 있는 것이다.

열두마리 고래는 우리들의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아버지, 김만복씨, 최박두, 아신(나)의 바람이 고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고래를 사랑했다. 그들 자신이 바로 고래인 것이다. 그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숙희는 자신의 꿈을 환상곡을 통해서 들어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 안익태 선생에 의해서 만들어진 '코리아 환상곡' 또한 한국 민족의 비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런 바람이 굳게 녹아 들이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욕망과 바람이 강렬하게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그만큼 상실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상실의 경험이 큰 자일수록 욕망은 커지는 것이다. 김시습이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다. 그 상실의 경험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는 금오신화가 탄생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열두마리 고래는 욕망의 상징이자 바로 상실해 버린 우리네 삶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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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포스터 기도
리차드 포스터 지음 / 두란노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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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란 무엇인가?

나의 내면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며 그것을 주변으로 나누는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드림조차도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바라보는 것이다.

깊이있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된다는 단순한 대답이 나를 울린다. 무언가 지적으로 그럴듯한 대답을 갈구하는 나의 머리를 깨끗하게 치워 버린다. 우리는 흔히 이야기한다. 준비된 다음 하나님의 일을 섬기겠다고.

부르심에 바로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라고 하셨을때 모세는 자신의 입이 굳어서 못한다고 했다. 계속해서 자신이 부족한 자라서 감당치 못한다고 할때 하나님께서는 해야 될 일과 말을 그 시에 직접 가르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우리가 한다는 생각을 할때 당연히 우리는 못한다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냥 바로 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바로 나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 그 자체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맺음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공감대를 찾으며 서로의 사람이 깊어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같이 있는 것 자체 만으로도 사랑의 감정을 충만하게 느낀다. 기도가 바로 동일한 것이다. 처음 기도할 때 이것 저것 많은 것을 요구하는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것이 응답되는 정도에 비례해서 기뻐하지만 계속 기도가 진행될때 우리는 기도 속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사실에 기뻐하게 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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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능 - 인간지능의 새로운 이해
하워드 가드너 지음, 문용린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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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인간의 능력을 어떤 틀로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현대 교육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보통 학생들을 바라볼 때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평가기준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그 기준에 부합된 인간을 길러내고자 노력하게 된다. 나도 또한 그 기준에 맞추어 학생들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또 내 나름의 평가 기준을 세워서 학생의 능력을 평가하고 재단해 나가려고 노력한다. 내가 가진 기준이 그 학생을 위한 기준이 아닐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 틀을 가지고 보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보게 될 때, 그 학생 개개인의 고유함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 하나의 준거틀에 모두가 판박이처럼 만들어져 서열만 있을 뿐이다.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가진 능력을 어떻게 확장시켜 이 사회에 드러낼 수 있을까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능력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8가지 지능(언어지능, 논리수학지능, 음악지능, 신체운동지능, 공간지능, 대인지능, 자성지능, 자연지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보다 더 있을 수도 있음을 안다. 그런데 이렇게 각 지능을 분리해 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생긴다. 서로 간에 서로 연결되어 각 지능간 유사성이 있을 것인데 너무 독특성을 강조한 건 아닐까하는 의문의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학생들을 대할 때 현재의 입시제도하에서 너무 한쪽의 지능만을 강조한 평가에 줄 세우기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점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결론은 개개인은 독특한 지능을 소유한 존재이기 때문에 학생의 두드러진 영역의 지능을 확장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며, 다양한 자극을 통해 조기 발견하여 더욱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해야 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고민을 하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답은 없다. 실제 교육현장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을 적용한다면 현재의 교육패턴을 완전히 뒤바꾸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바꾸어야 되는지에 대한 고민은 결국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부여되어 있다.

학생 개개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교육할 것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 결국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나의 고민을 새롭게 시작하게 한다. 한 존재 한 존재가 우주보다 더 귀하다는 성경의 말씀을 떠올린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고 그에게 이 세상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으며,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죽기까지 한 인간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아니 앉아 있는 한 아이 한 아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피값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명이 아닐까? 한 아이를 볼 때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한 아이에게 미리 세우신 계획을 생각하고 찾아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도와야 한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그 돕는 자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눈물로써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도 한 아이 한 아이의 앞날을 놓고 눈물로써 기도해야 한다. 그 눈물이 바로 아이의 모습을 밝게 능력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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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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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

이 책을 읽으면서 현재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에 심취해 가시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때가 많다. 한쪽 측면만을 보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물을 바라볼 때 정확하게 본질을 살필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시기이다.

‘요즘 애들은 참 못 되먹었어’ 과거에나 현재에나 기성세대가 나이 어린 세대를 보면서 항상 하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우리의 사회가 엔트로피의 법칙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직관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과거의 것은 질서있고 아름답게 여기고 현재의 것은 혼란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될수록 우리의 삶이 진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는 계속되는 과학기술의 혁명적 발전에 의해 해결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믿음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과연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인가?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과정이 과연 무질서에서 질서로 진행되어 온 것인지 아니면 질서에서 무질서로 혼란스러워 진 것인지에 대해 보다 더 궁구할 필요성을 던지고 있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인간의 삶이 질적으로 진보했는가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 사회는 인간의 노동력의 가치를 낮게 취급하게 되었다. 삶의 질이 높아지기 보다는 오히려 경쟁과 효율화란 명목하에 삶의 질이 나빠지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더 많이 일하고 일해도 여전히 삶이 만족할 수준에 도달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결국 엔트로피 사회에서 영원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유한한 세상(자원)속에서 세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원은 없다.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꿈을 꾸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최대로 구현한 사회를 그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 우리가 발버둥쳐서 이룰수 있는 혼란스런 유토피아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영원함을 제공해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만이 우리의 삶을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럴때만이 내가 주변에서 뺏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변에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스캇펙의 <거짓의 사람들>에서 악한 자를 병든 자신의 자아를 방어 보전하기 위해 타인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 모습은 바로 고엔트로피의 사회나 존재의 모습과 동일한 것이다. 자신의 편리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주변에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빼앗는 존재인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인가? 고엔트로피의 존재인가? 아니면 마이너스 엔트로피의 존재로서 타인에게 에너지(긍정적인 영향)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물질추구의 삶과 효율성의 강조로 인간성이 상실되어 버린 현실이다. 무한 경쟁, 생산성, 효율성을 통해 물질과 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회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엔트로피의 사회에서 저엔트로피의 사회로 구조가 변화되어야 한다. 뺏어서 자신의 것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통해 타인을 풍성케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저엔트로피의 대표적인 모습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혼란을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타락한 혼란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선 자신의 선함을 인간에게 끊임없이 주시어 모든 인간을 선하게 만들어 버리려는 계획을 세우셨고 또한 그렇게 하셨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선한 존재로 회복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마음은 ‘긍휼’이다. 긍휼은 내가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존재까지 낮아져서 같이 있는 것이다. 긍휼은 동정이 아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동일한 모습이 되셨다. 그 모습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한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 혼란스러워진 세상,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 세상에서 그 사람들의 모습까지 낮아질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의 행복한 삶만을 목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를 통해 세상이 밝아져야 한다. 행복해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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