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

이 책을 읽으면서 현재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에 심취해 가시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때가 많다. 한쪽 측면만을 보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물을 바라볼 때 정확하게 본질을 살필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시기이다.

‘요즘 애들은 참 못 되먹었어’ 과거에나 현재에나 기성세대가 나이 어린 세대를 보면서 항상 하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우리의 사회가 엔트로피의 법칙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직관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과거의 것은 질서있고 아름답게 여기고 현재의 것은 혼란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될수록 우리의 삶이 진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는 계속되는 과학기술의 혁명적 발전에 의해 해결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믿음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과연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인가?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과정이 과연 무질서에서 질서로 진행되어 온 것인지 아니면 질서에서 무질서로 혼란스러워 진 것인지에 대해 보다 더 궁구할 필요성을 던지고 있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인간의 삶이 질적으로 진보했는가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 사회는 인간의 노동력의 가치를 낮게 취급하게 되었다. 삶의 질이 높아지기 보다는 오히려 경쟁과 효율화란 명목하에 삶의 질이 나빠지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더 많이 일하고 일해도 여전히 삶이 만족할 수준에 도달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결국 엔트로피 사회에서 영원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유한한 세상(자원)속에서 세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원은 없다.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꿈을 꾸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최대로 구현한 사회를 그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 우리가 발버둥쳐서 이룰수 있는 혼란스런 유토피아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영원함을 제공해주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만이 우리의 삶을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럴때만이 내가 주변에서 뺏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변에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스캇펙의 <거짓의 사람들>에서 악한 자를 병든 자신의 자아를 방어 보전하기 위해 타인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 모습은 바로 고엔트로피의 사회나 존재의 모습과 동일한 것이다. 자신의 편리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주변에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빼앗는 존재인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인가? 고엔트로피의 존재인가? 아니면 마이너스 엔트로피의 존재로서 타인에게 에너지(긍정적인 영향)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물질추구의 삶과 효율성의 강조로 인간성이 상실되어 버린 현실이다. 무한 경쟁, 생산성, 효율성을 통해 물질과 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회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엔트로피의 사회에서 저엔트로피의 사회로 구조가 변화되어야 한다. 뺏어서 자신의 것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통해 타인을 풍성케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저엔트로피의 대표적인 모습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혼란을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타락한 혼란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선 자신의 선함을 인간에게 끊임없이 주시어 모든 인간을 선하게 만들어 버리려는 계획을 세우셨고 또한 그렇게 하셨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선한 존재로 회복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마음은 ‘긍휼’이다. 긍휼은 내가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존재까지 낮아져서 같이 있는 것이다. 긍휼은 동정이 아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동일한 모습이 되셨다. 그 모습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한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 혼란스러워진 세상,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 세상에서 그 사람들의 모습까지 낮아질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의 행복한 삶만을 목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를 통해 세상이 밝아져야 한다. 행복해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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