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정말이니, 토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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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토끼
앤디 라일리 지음 / 거름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하지만, 토끼야?> 제목을 붙이려다가 관둔다. 하지만 뒤에 따라나올 수많은 긍정을 갖다 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어찌 다 열거하리. <그래, 토끼야!> 역시 마땅치 않다. 자살하려는 토끼를 지지할 용기도 없다. 세상이 또 흉물스러운면도 있으니 말이다. 단지, 한 번 더 묻고 싶다. 토끼, 너는, 진짜 죽고 싶은 거 맞냐고.
노란 바탕 속에 검은 펜으로 그려진 토끼의 자살 방법들은 부드러운 곡선만 아니라면 끔찍하기 이를데 없다. 토끼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죽는 것 보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생각해내느라 머리 아팠을 만큼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동원한다. 돋보기 아래 쭈그리고 앉아 태양광선을 쏘이고 있는 토끼, 시계 바늘에 줄을 매달아 놓아 시계가 움직일 때 마다 조여지는 목, 부메랑에 수류탄을 달고 날리려는 토끼... 토끼에게 왜 라고 물으면 토끼는 말없이 동참하라는 뜻으로 손을 잡아당길 것만 같다. 그러니 왜 죽느냐는 질문은 삼가야 한다.
사춘기 시절에는 죽음이 커다란 화두였다. 오빠의 책상에 늘 놓여있던 쇼펜하우어의 책에는 빨간 줄이 그득했다. 언니는 매일 미팅에서 번번이 성공한다며 미치겠다를 남발하고, 가끔 엄마는 너희들 때문에 죽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사소한 실갱이에도 죽고 싶냐고 묻질 않나, 도무지 이 세상엔 너 살고 싶지 란 말은 있지도 않았으며 있다해도 웃음거리였다. 차라리 부정으로 묻는게 속이 편한 시절이었다.
21세기에는 교통사고와 에이즈 우울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거라고 한다. 어제 어떤 책에서 그런 구절을 보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태어난 것도 선택이었다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왜 이 모진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하였나 싶어 부모에게 망발을 일삼던 어느 시절을 다시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싶은 것이 말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니겠는가. 병아리에게 밥을 주는 사람, 잘못 걸린 전화에 아니라고 말하는 예의 그 정도라도 내가 할 몫이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
자살토끼에게는 자살을 결심하기 까지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진행중인 자살 방법만 보고도 쉽게 납득이 간다. 그래, 이 세상은 죽고 싶은 이유가 너무 많은 것이다. 이유를 굳이 토끼의 음성으로 들을 필요도 없이 말이다. 결국 토끼를 보며 나를 대입하고 만다. 죽음을 동경하던 어린 시절을 벗어나자 나는 잘 죽고 싶다는 바람을 새겨넣었다. 그러려면 정말 잘 살아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온기를 느낀다. 일찍 그 온기를 느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진즉에 그 온기를 쐬었더라면 지금의 나와 뭔가 달랐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미리 썩은 사과를 맛보았다고 위로한다.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질주하던 델마와 루이스처럼 토끼에게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낭떠러지 1km앞 도로 없음 ↑ " 관객을 위해 허공에 뜬 상태로 델마와 루이스의 차를 멈췄다는 감독 리들리 스콧트는, 디렉터스 컷에서는 그녀들의 자동차를 그랜드 캐년으로 추락시킨다. 관객과 감독의 컷이 다른 것처럼 죽고자 하는 사람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각각 다른 이해가 있다.
나는 자기 보호색의 의미를 갖고 있는 노란 속지에 희망을 건다. 자살토끼에게는 자기를 끔찍히 사랑한 자기애가 넘친다. 결국 그렇게 해서 죽을 것 같은 방법은 몇 개 되지 않는 것만 봐도 토끼는 관심이라는 약과 애정이라는 진통제가 절실히 필요하다. 죽음을 도모하면서 재미나고 신기한 방법앞에 스스로도 대견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결국 자살방법에 도가 튼 토끼지만, 죽지는 않는다는 전설을 갖게 될 자살토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