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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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음에 <남자의 자리>라는 제목을 읽었을 때는 한 여자와 남자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짐작을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1988년 홍상희씨의 번역으로 책세상을 통해 <아버지의 자리>로 먼저 출간되었던 바가 있다. 당시 출간되었던 책에는 <아버지의 자리>를 한권으로 선보이기보다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한 여자>와 함께 수록된 글에 그쳤다. 그러나 이번에 재번역 되어 개정되어 나온 책은 <남자의 자리>라는 제목으로 저자 아니 에르노의 글에 실린 진정한 무게와 의미를 다시 되짚어보게 만든다.


 <남자의 자리>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에 대하여 그녀가 직접 써내려간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그 어떤 글보다도 진지하고 묘한 힘이 있으며 은근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자식에게 애정표현을 그다지 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남성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그늘아래에서 자란 에르노는 아버지의 지난 삶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이게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추억에 젖어 갖은 수식어구를 끌어와 예쁘게 꾸미는 법도 없고 아버지의 삶을 비웃는 것도 없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라는 사람을 오랫동안 보아왔고 이 글은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내려두고 ‘남자’로써 그를 관찰하고 그 옆에서 느꼈던 바를 솔직하게 써내려간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지극히 담담하게 서술해 나가는 객관적인 것이라 오히려 읽는 입장에서 가슴이 더욱 먹먹해졌다.


 그 꾸밈없이 서술하는 아버지는 애정표현 하나 잘하지 못하는 남자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못 배움이 늘 한이 되어 자식만은 많이 배우길 바라는 우리네 옛 아버지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자신이 못 배운 만큼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자식들은 희생만큼 많은 것을 보고 자라지만 그럴수록 이유를 모르고 아버지와 멀어져간다. 어쩌면 지금도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지금은 아버지가 못 배워서가 아닌 자신이 젊었을 때 부족했음이 아쉬워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먼저 알려주고파 희생하시고 자식들은 그 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아버지를 앞서나가게 된다는 차이점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

 <남자의 자리>를 읽다보면 누구라도 관계가 좋든 나쁘든 자신의 아버지가 떠오를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러했다. 저자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와 달리 나의 아버지는 한 없이 다정한 사람이다. 어느 덧 연세가 머리카락들이 하얗게 새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나는 딸 바보야. 허허’하고 웃으실 정도로 위트 있으시고 사랑표현에 거리낌이 없으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주시고 앞장서주시는 아버지 덕분에 참 행복하게 자라왔다.

에르노의 아버지처럼 나의 아버지도 많은 것을 희생하였고 덕분에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아버지를 앞서게 되었다. 그리고 에르노가 마냥 행복한 시간들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상황도 서슴없이 찾아왔다. 그녀와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서술한 것처럼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우리 부녀에게도 생겼다.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해 서로가 어색하게 지냈던 것이 짧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조금씩 더 자라고 아버지가 조금 더 고독해 질수록 더 이상 ‘아버지’라기보다는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날 자신의 열정과 노력을 모두 퍼부었고 남은 것은 쓸쓸하게 뒤에서 내 등만 바라보고 있을 아버지의 심정을 뒤돌아보게 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 울보였고 감성적인 아이였다. 지금도 잘 울고 여전히 감성적이지만 그 어릴 때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만약에 어느 날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다면?’ 이라는 생각으로 왈칵왈칵 눈물을 터뜨리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이 아니라 몇 차례나 어린 맘에 그런 고민을 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는데 그 기억이 많이 커버린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건지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부터 쏟아진다. 그리고 <남자의 자리>를 읽으며 어린 시절의 옛 추억과 함께 아빠를 생각해보는 한편 성인이 되어 남자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남자의 자리>라는 제목이 궁금해졌다. 내가 이 글을 시작할 때 이야기 했던 것처럼 제목만 보고서는 도무지 아버지에 관한 자전 소설이라는 것이 짐작되지 않는다. 차라리 1988년에 나온 것처럼 <아버지의 자리>라는 것이 오히려 내용을 유추하기 더 쉬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번 책을 펴낸 열린 책들에서도 작가에게 ‘아버지’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출판사 열린 책들에서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받아들였다고 한다.
책 표지에도 쓰여 있듯이 이 책의 원제목은 <La place>이다. 프랑스어 <place>는 ‘자리, 좌석, 광장, 위상…’ 등 중의적인 의미를 함축한 단어라고 한다. 그 만큼 그녀는 많은 의미를 이 책에 담고 싶어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난 15년 후에 집필한 이 글을 읽은 사람은 그 누구라도 뜨거운 눈물을 터뜨릴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세상 어떤 부모도 다 똑같은데서 느껴지는 부모의 공통된 사랑을 통해 나의 아버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아버지가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와 비슷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사랑한다”는 말 한 구절도 들어가지 않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그 어떤 누구이든 간에 한 번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마 이 책은 독자가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값을 발하는 책이 아닐까 한다.
즉 나와 함께 세월을 보내게 될 것 같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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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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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입시교육에 물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김수영 시인의 이름에 ! 반갑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교실에서 아이들과 색색의 형광펜과 펜을 들고 밑줄 긋고 함축적 의미가 된 부분에 별표나 그렸지 정말로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를 해부하고 의미를 파헤쳐 머리로는 배웠지만 진정 그의 삶을 이해하고 가슴으로 배운 김수영은 내 지난 지식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 김수영 시인을 알고 있다 라고 대답한 것도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고 앞으로 김수영 시인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도 없겠다 생각했다.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을 보며 진짜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했지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철학이라는 키워드였다. 김수영 시인은 관심이 가지만 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나 또한 철학이라는 두 글자는 어쩐지 손을 멈칫하게 만들고 무겁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손을 뻗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하였는지 모른다. 하나의 책을 선택하면 웬만하면 끝까지 읽는 편인데 단순한 호기심으로 읽었다가 나와 맞지 않는 책이라면 가독성이 떨어져 읽는 나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독서를 할 것이고 이를 저자가 원하는 것은 아닐 테니 피차 좋지 않은 꼴을 보이는 셈이 될 거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하고나서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김수영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지난 나의 지식에 대한 반성으로 김수영 시인을 알고파 한다면 철학이 무엇이 대수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책은 철학자의 눈으로 본 김수영 시인일 뿐이지 철학에 관해 논하는 책은 아니니까 말이다.

 

  <김수영 시인을 위하여>를 통해 김수영 시인을 꼭 만나고 싶었다.

과연 내가 시험을 치기 위해 배운 김수영 시인이 아닌 그의 진짜 삶과 사상과 성품 그리고 남겨둔 시와 글들을 이제는 마음으로 배우고 싶었다.

 

  먼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가장 특이했던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바로 부록에 관한 것이다. 잡지나 어린이 책을 사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록이 인문학 책에도 딸려온다는 것이 가장 신기했다. 그리고 그게 본문 수록 작품이라는 점도 특이했다.

대게 한 사람의 인생을 뒤돌아보고 그의 작품을 느껴보는 인문학 책들은 그들이 남기고 간 작품들이 책 속에 실려 있다. 그래서 그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게 별책부록으로 따로 무언가가 주어진다는 게 생소했다. 낯설게 손에 쥐고 있는 <김수영을 위하여-본문 수록 작품>을 손해 들고 참 뿌듯했다. 일일이 책 속을 훑어서 찾아내어 읽어야 되는 수고를 덜어내고 언제 어디서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은 시인을 위하여-사람을 위하여-자유를 위하여 라는 총 3부작에 걸쳐 이야기된다.

어쩐지 이 순서에 실린 각 키워드들이 김수영 시인을 대표하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 사람, 자유를 위해 삶을 살다간 김수영.

  사실 <김수영을 위하여>는 내 기대에서 약간 빗겨나기도 했고 들어오기도 했다. 많은 부분을 김수영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책은 김수영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저자 강신주가 본격적으로 자기 지향점을 드러내는 책으로 드러났다. 즉 철학자로서 인문정신이라는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자기 이야기'를 써 내려간 책이다. 무엇보다도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은 민족주의 시인으로 오해 받았던 김수영을 실은 강력한 인문정신의 소유자라고 소개함과 동시에 한국 인문학의 뿌리를 찾는 철학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1960년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이 땅의 자유와 인문정신에 대한 강신주의 철학적이고 문학적이며 인문적인 고백록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김수영이라는 사람 자체만이 궁금하다면 이 책은 다소 적합한 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책은 불온이란 키워드를 통해 인문학의 주요한 정신과 본질을 제시한 김수영이 한국 인문학의 핵심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한 철학자 강신주와 김수연의 편집에 의해 만든 책이다 보니 그들의 생각이 다소 많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에서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김수영시인이 익히 입시교육에 물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민족적인 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인문정신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왔고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부분을 생각하고 갈망해왔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김수영을 위하여>를 시작하면서 듣게 된 저자 강신주의 김일성만세시를 통한 일화는 내 가슴에 콱 박혀왔으며 미친 듯이 공감되었다. 나도 조금의 불쾌감을 느꼈으니 말이다. 이 때 부터는 책을 읽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고 그저 내가 부끄러울 뿐이었다.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시를 읽고 나서, 강연장을 가득 메운 교직원과 학생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 무엇인가 잘못되었다.(중략)<김일성만세>라는 시를 듣고 청중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 내면에 모종의 검열 체계가 작동한다는 것을 말해준다.(중략)50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김수영의 정신이 만개하지 못하고 위축된 것일까? P18~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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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리엄
로렌 올리버 지음, 조우형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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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이다.

   

 

  <딜러리엄>은 읽어야지 해놓고서 연이 닿지 않아 한 번 놓치고 다시 만나게 된 책이라 이 책을 손에 쥐고 있을 때면 늘 설레었고 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책 편식을 하지말자고 늘 다짐하지만 잘 읽지 않는 장르 중에 가장 대표되는 것이 로맨스소설이다. 어쩐지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에 잘 읽지 않는다. 비슷한 맥락으로 판타지 소설도 잘 읽지 않는다. 판타지 소설의 경우 한 번 빠지면 그 책을 완독하기까지는 시간문제이지만 문제는 그 시작하기가 참 어렵다는 점이다. <딜러리엄>은 판타지로맨스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꼭 읽고 싶었던 이유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신비로운 소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철저히 감시 및 컨트롤하는 근 미래의 통제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딜러리엄>은 정말 놀라울 만큼 신기했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감시한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일지도 모르지만 그 소재가 한층 더 확고한 규칙과 규율을 만들어내어 만 18세가 된 사람은 모두 평가받고 약물치료를 받으며 평가점수에 따라 자기 연령, 신분 등에 걸맞은 짝을 부여받아 결혼하고 정해진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한다. 자녀의 수도 평가기관에서 정해주고 심지어 웃고 울고 애정 표현하는 모든 감정마저도 엄격하게 금지되어있으며 예술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춤과 노래도 금지이다. 

 

 

 한편으로는 정말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저 정해진대로 주어진대로 삶을 살아가면 되니 우리 사회에서 부딪힌 각종 사회적 문제 따위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정말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뒤따른 감정표현과 예술 활동마저 금지된다는 말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 삶은 사람으로써의 삶이 아니라 그저 감정이 없는 로봇의 삶일 뿐이라고.

더군다나 <딜러리엄>의 배경이 되는 사회는 사랑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는 즉, 병으로 취급받는 금기어라고 하니 더욱 로봇이 되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인류가 시작하는 순간 함께 시작되었고 이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계속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 감정을 조절하고 컨트롤 하면서 막는 것인지 과연 이러한 사회 속에 살게 되는 이들은 행복한지 궁금해졌다.

 

<딜러리엄>의 주인공은 레나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을 했기 때문에 그녀는 외로웠다. 심지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로 인해 레나는 늘 두려웠고 얼른 만 18세가 되어 치료를 받고 사회에 편입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소녀이다. 그녀의 걱정과 미래에 대한 다짐은 한 소년을 만나면서 무너진다. 그 소년은 레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 동안 이 길만이 확실하고 진리라고 생각했던 레나에게 그 것은 신세계였고 기존의 세계의 배신이었다.

    

 

  저자 로렌 올리버는 이 책을 단순히 판타지 로맨스로 독특한 소재에 관한 미래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극도로 억압된 통제사회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생생한 초상이다. 어쩐지 우리사회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강제로 사랑을 금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회가 하나하나 억압을 한다. 이 공부를 받아야 하며 사회에 나아가 흔한 말로 무시당하지 않고 번듯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어공부를 반드시 해야 되고 끊임없이 임무가 주어지고 우리는 긴장 속에서 사회에 낙오되는 일이 없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억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을 억압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사랑으로부터 억압을 한다. 결국 <딜러리엄>의 미래사회배경은 우리 현실인 셈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달콤한 첫맛으로, 하지만 공포를 동반한 채 찾아온다. 공포의 정체는 아마도 변화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사랑을 원한다면 공포를 감수하고도 변화를 이루어낼 것이다. 금지된 것에도 손을 뻗어내는 것이 사람이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결국 작가는 이 모든 것은 젊은이들의 특권으로 돌려둔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들이 어리단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자유를 택하여 싸우고 부딪혀 볼 것인지 주어진대로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어린 주인공인 소녀와 소년이지 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니다.

 

사랑을 하고 싶은 젊은이는 선택을 수 없이 한다. 그 선택을 잊지 말고 우리 삶속에서도 적용시키길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소망이 묻어나오는 것만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딜러리엄>을 읽기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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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안네 - 60년 만에 발견한 안네 프랑크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
베르테 메이에르 지음, 문신원 옮김 / 이덴슬리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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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네의 일기>는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필독서 중에 하나였다. 지금도 그 도서가 필독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 책을 읽기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당시 한 번 읽고 난 후 <굿바이, 안네>를 보기 전 까지는 한동안 잊고 살아왔다. 이제는 <안네의 일기>마저도 그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핵심적인 내용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좋은 책은 두고두고 여러 번 읽어서 때로는 잔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안네의 일기>는 그 당시에 읽었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았다. <안네의 일기>가 내 기준에서 좋은 책이 아니라서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처음 안네의 일기를 읽을 때는 충격이 꽤 컸다. 어린마음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억압을 견뎌내며 때로는 내가 세상에 없는 것 마냥 숨어 살아야 하는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또 그 소녀가 나와 비슷한 나이의 어린 소녀라는 사실이 더 못 견디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 어린 시절 <안네의 일기>내게 꽤 충격이었는지 세계 2차 대전과 관련된 책을 보거나 혹은 수용소의 삶을 담은 책을 읽으면 안네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문득문득 생각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는 그 시대의 이야기책인 <굿바이, 안네>도 관심이 안갈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안네로 인해 나는 전쟁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런 안네는 내 기억 속에서 참 괴로웠을지 모른다. 이제는 안네와 정말로 작별인사를 하고 기억 속에서 편히 놓아주고 싶다. 서로가 편안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깨닫게 된 것이지만 유의할 점은 이 책은 내가 앞서 안네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 한 것과 달리 안네와 동시대에 짧은 시간을 공유했던 저자 베르테 메이에르의 이야기이다.

 

그럼 왜 이 책에서 충분히 안네의 이야기로 착각할 수 있는 ‘60년 만에 발견한 안네 프랑크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라고 써두었는가가 조금 궁금해진다.

개인적인 의견은 이러하다. 안네와 베르테는 그 당시 이웃집에서 살았다는 추억이 있으며 수용소에는 짧은 시간 조우하였다. 이것으로 안네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밝히기는 충분치 않다. 그러나 베르테는 또 다른 안네이기도 하다. 안네와 비슷한 나이로 수용소의 삶을 견뎌내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의미하는 안네는 2 안네인 베르테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독자들은 이를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로 수용소 겪은 유태인들은 그 속의 삶이 어찌나 처참하였는지 우리에게 책을 많이 남겨두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드물다. <안네의 일기>가 고통스런 삶속에서도 긍정의 에너지로 상황을 차분히 파악한 것과 더불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베르테의 이야기도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다. 적당히 중산층에서 여유롭게 자랐던 그녀이지만 유태인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고생이 시작된다. 어린나이에 들어갔던 수용소에서 먹지 못해 커다란 솥에 들어가 어떻게든 식량을 조금이라도 구해보려고 작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고 급기야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자의 간을 빼 먹으며 삶을 연명해나가는 것도 보았다. 그 결과 그녀는 전쟁이 끝난 지금도 먹을 것이 여유롭지 않을까봐 걱정하고 냉장고에는 항상 먹거리를 잔뜩 채워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현재 직업은 푸드 저널리스트이지만 말이다.

 

베르테의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대로 흐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전쟁을 겪은 이들이 그렇지만 무의식적으로 밀어내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베르테 역시 그러했고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는가 하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베르테의 이야기는 그 동안 들어왔던 다른 이야기들과는 또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그녀의 생각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과 같이 끊기는 부분도 드러나 있고 어린 시절의 생각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겪지 않은 내가 이 글을 통해 다시 알게 되는 공포는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절반도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안전한 집과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대에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노인들은 그렇지 않다. 비단 세계 2차 대전을 겪은 이들 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쟁을 겪은 이들 더 나아가서는 전쟁으로 인해 참혹한 고문을 당했던 이들은 그 이후의 삶에서 더 힘든 생활을 보낸다.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각종 증후군에 시달리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베르테의 이야기는 현재 그녀의 삶과 과거 그녀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 그녀가 겪고 있는 아픔을 이야기 해준다. 이 글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아픔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안네 외에 또 다른 어린이를 만나고 싶다면 이 이야기를 읽었으면 좋겠다. 안네와 같은 시간을 숨 쉬었던 베르테는 더 많은 것을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또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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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
이흥환 엮음 / 삼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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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쓰는 걸 참 좋아한다. 편지에는 수줍은 내 마음을 표현 할 수도 있고 서운했던 점을 이야기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더 정리해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편지쓰기가 참 좋았다. 반대로 편지 받는 것도 참 좋았다. 글 쓸 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설렘을 표시하면 나도 덩달아 설레어지는 것이 좋았고 나에게 서운했던 점을 이야기한다면 정말로 미안해졌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편지는 참 묘한 힘이 있어 그냥 "사랑한다."라고 뱉었을 때는 담백한 맛이 나는데 편지지에 꼭꼭 눌러 적은 글자로 보는 "사랑한다."는 내 가슴을 가득 채우는 무언가가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있어 편지에 관련된 이 책이 참 반가웠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조선인민군우편함 4606>라는 책 제목을 받아보고 덜컥 겁이 났다.

아마 내가 울음이 많은 탓이라 그럴 것이다. ‘조선인민군이라는 단어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말하기 힘든 씁쓸함을 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전해지지 못한 편지들의 애절한 내용을 읽다보면 절로 울컥해질 것 만 같았다.

    

 

  이 책에 소개된 편지의 출처에 대하여 저자 이흥환은 미국국립문서보관소의 열람실 문서상자 1138번과 1139번에 들어있다고 한다. 그는 출처에 이어 이 편지들이 미국에 들어가게 된 이유까지 설명하였는데, 한국전 당시 미군들이 북한의 문서들을 노획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북에서 북으로 전해지는 편지도 있고 남에서 북으로 전해지는 편지도 있다. 어색한 단어들과 낯선 비문과 오타들은 그 당시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이 수많은 편지들은 세월이 흘러 종이들은 바스라질 것처럼 바삭해지기도 하고 누렇게 변색되기도 하였다. 연필로 쓴 글씨들은 세월의 흘러감을 증명이라도 흐릿해지고 잉크로 쓴 것들은 번지게 되었다. 종이와 글 쓴 도구가 제 각각이듯 사연도 제 각각이다. 아들내외 부부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사연을 제대로 이야기해보라고 엄격히 말을 전하는 어머니의 서도 있고 전쟁 통에 은근히 남편에 대한 사랑을 전하는 편지도 있다. 또 자신을 걱정 말라는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도 있다.

    

 

  제 각각의 편지를 수 없이 많이 읽고 있으려니 어쩐지 가슴 한켠이 찡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해지지 못한 편지인 것은 둘째 치고 하나같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사랑과 애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휘갈겨 쓴 편지이더라도 또 사내답게 쓴 글일지라도 은근히 묻어있는 사랑과 애정은 가늠할 수 없으리란 만큼 넘친다.  

 

 P164

대개의 전쟁사가 전투 기록, 전략전술사로만 기술된 군사이거나 전쟁의 배경, 원인에만 치중한 정치사이다. 이런 기록은 생명력이 없다.

생명력이 없다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생명력이 없는 기록은 그래서 잊히기 쉽다

    

 

  그렇다.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전투기록과 어떻게 전략을 짜서 당시 한국전을 치렀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 이 객관적인 사실들은 원인-과정-결과에 치중한 정치사일 뿐이다. 속속들이 당시 국민들의 삶과 생각은 들어있지 않은 지극히 객관적인 문서이다. 물론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깃든 편지는 조금 다르다. 전쟁의 긴박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당시 삶의 궁핍함과 고단함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공식화되어있는 자료보다 이러한 글이 더 가슴 아픈 까닭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당신네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는 것.

 

따라서 이 편지 한 장, 한 장에는 영혼들이 깃든 것 같다. 새 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도 오래된 편지의 냄새 것일 것만 같다. 저자 이흥환과 출판사에서는 편지글을 인쇄활자로 바로 옮기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당시 편지를 깨끗하게 스캔하여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깔끔하게 옮겨 쓴 원문을 두고도 꼭 스캔 된 편지를 먼저 어렵사리 읽어 내렸다. 아마 그들의 목소리가 담겨있기 때문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하여 역사공부를 한다거나 그 시대의 상황을 알고 싶어 한다면 다소 무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저자가 먼저 이야기 한 것처럼 후손들에게 한 자락의 기억을 돕고 싶고 또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네들이 아직 있다면 이 편지를 찾아가 그 기억들을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젊은이에게는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변해가는 모습과 삶에 묻어나는 고단함, 전쟁이 남기고 간 것들을 보여줄 것이고, 전쟁 통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의 아픔이 느껴져 가슴한 쪽이 먹먹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역사 속에 빠질 수 없는 한국전의 아픔을 읽는 것이 참 아프다는 것으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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