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 <남자의 자리>라는 제목을 읽었을 때는 한 여자와 남자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짐작을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1988년 홍상희씨의 번역으로 책세상을 통해 <아버지의 자리>로 먼저 출간되었던 바가 있다. 당시 출간되었던 책에는 <아버지의 자리>를 한권으로 선보이기보다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한 여자>와 함께 수록된 글에 그쳤다. 그러나 이번에 재번역 되어 개정되어 나온 책은 <남자의 자리>라는 제목으로 저자 아니 에르노의 글에 실린 진정한 무게와 의미를 다시 되짚어보게 만든다.
<남자의 자리>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에 대하여 그녀가 직접 써내려간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그 어떤 글보다도 진지하고 묘한 힘이 있으며 은근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자식에게 애정표현을 그다지 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남성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그늘아래에서 자란 에르노는 아버지의 지난 삶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이게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추억에 젖어 갖은 수식어구를 끌어와 예쁘게 꾸미는 법도 없고 아버지의 삶을 비웃는 것도 없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라는 사람을 오랫동안 보아왔고 이 글은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내려두고 ‘남자’로써 그를 관찰하고 그 옆에서 느꼈던 바를 솔직하게 써내려간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지극히 담담하게 서술해 나가는 객관적인 것이라 오히려 읽는 입장에서 가슴이 더욱 먹먹해졌다.
그 꾸밈없이 서술하는 아버지는 애정표현 하나 잘하지 못하는 남자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못 배움이 늘 한이 되어 자식만은 많이 배우길 바라는 우리네 옛 아버지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자신이 못 배운 만큼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자식들은 희생만큼 많은 것을 보고 자라지만 그럴수록 이유를 모르고 아버지와 멀어져간다. 어쩌면 지금도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지금은 아버지가 못 배워서가 아닌 자신이 젊었을 때 부족했음이 아쉬워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먼저 알려주고파 희생하시고 자식들은 그 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아버지를 앞서나가게 된다는 차이점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
<남자의 자리>를 읽다보면 누구라도 관계가 좋든 나쁘든 자신의 아버지가 떠오를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러했다. 저자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와 달리 나의 아버지는 한 없이 다정한 사람이다. 어느 덧 연세가 머리카락들이 하얗게 새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나는 딸 바보야. 허허’하고 웃으실 정도로 위트 있으시고 사랑표현에 거리낌이 없으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주시고 앞장서주시는 아버지 덕분에 참 행복하게 자라왔다.
에르노의 아버지처럼 나의 아버지도 많은 것을 희생하였고 덕분에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아버지를 앞서게 되었다. 그리고 에르노가 마냥 행복한 시간들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상황도 서슴없이 찾아왔다. 그녀와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서술한 것처럼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우리 부녀에게도 생겼다.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해 서로가 어색하게 지냈던 것이 짧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조금씩 더 자라고 아버지가 조금 더 고독해 질수록 더 이상 ‘아버지’라기보다는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날 자신의 열정과 노력을 모두 퍼부었고 남은 것은 쓸쓸하게 뒤에서 내 등만 바라보고 있을 아버지의 심정을 뒤돌아보게 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 울보였고 감성적인 아이였다. 지금도 잘 울고 여전히 감성적이지만 그 어릴 때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만약에 어느 날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다면?’ 이라는 생각으로 왈칵왈칵 눈물을 터뜨리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이 아니라 몇 차례나 어린 맘에 그런 고민을 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는데 그 기억이 많이 커버린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건지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부터 쏟아진다. 그리고 <남자의 자리>를 읽으며 어린 시절의 옛 추억과 함께 아빠를 생각해보는 한편 성인이 되어 남자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남자의 자리>라는 제목이 궁금해졌다. 내가 이 글을 시작할 때 이야기 했던 것처럼 제목만 보고서는 도무지 아버지에 관한 자전 소설이라는 것이 짐작되지 않는다. 차라리 1988년에 나온 것처럼 <아버지의 자리>라는 것이 오히려 내용을 유추하기 더 쉬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번 책을 펴낸 열린 책들에서도 작가에게 ‘아버지’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출판사 열린 책들에서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받아들였다고 한다.
책 표지에도 쓰여 있듯이 이 책의 원제목은 <La place>이다. 프랑스어 <place>는 ‘자리, 좌석, 광장, 위상…’ 등 중의적인 의미를 함축한 단어라고 한다. 그 만큼 그녀는 많은 의미를 이 책에 담고 싶어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난 15년 후에 집필한 이 글을 읽은 사람은 그 누구라도 뜨거운 눈물을 터뜨릴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세상 어떤 부모도 다 똑같은데서 느껴지는 부모의 공통된 사랑을 통해 나의 아버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아버지가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와 비슷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사랑한다”는 말 한 구절도 들어가지 않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그 어떤 누구이든 간에 한 번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마 이 책은 독자가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값을 발하는 책이 아닐까 한다.
즉 나와 함께 세월을 보내게 될 것 같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