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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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색다르게 쓰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개인적인 서사가 새로운 문학작품이 될 수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막상 동성애자들에게는 새로울 것 없는 감정의 묘사일지도 모르지만, 소수의 느낌이 다수의 사람에게 생소할 수 있기 때문에, 다수에게 신선함을 준다면아무리 소수에겐 평범한 감정과 문장이라도 가치가 달라질 수 있으리라. 어딘가 당연하게 숨겨져 있던 것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 내는 일도 대단한 업적이다.
김봉곤은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런 생활’에서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려냈다.
같은 소재를 주로 다루는 박상영작가와는 다른 결을 느낄 수 있는게 박상영작가는 ‘다른 삶’을 주로 다룬다면 김봉곤작가는 ‘다른 사랑‘을 주로 다루는 느낌이다. 사랑에 초점이 맞춰 감정을 드러내기 때문에, 다른 삶보다는 색다른 사랑 이야기라 내밀하고 예민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독자도 문학계도 더욱 더 김봉곤에게 열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번 소설집 이전에도 몇몇 단편이나 수상작품집에서 김봉곤 소설을 보면서 전작인 ‘여름 스피드‘에 비해 서사나 내용이 많아졌다는 느낌은 누구나 받았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건지 문자를 보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던 ‘여름 스피드’에 비하면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 된 것 같아 대중들에게 좀 더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름 스피드‘나 ‘나의 여름 사람에게‘ 등 김봉곤에게는 여름이 사랑을 체감하는 계절로 다가오는 듯 하다. 찌는 듯한 더위와 숨막히는 온도는 젊고 열정적인 사랑을 대변할 수 있는 계절이다. 타는 듯한 날씨를 연상하는 글은 아니지만 김봉곤의 표현대로 상대를 실감한다는 사랑의 미칠듯한 애정이라면 김봉곤의 소설을 여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함께 늙어갈 동년배의 독자로서 김봉곤이 써내려가는 사랑의 감정들을 같이 실감해 나갈수 있어 좋은 일이다.

고요한 밤 풍경 속, 나는 오다 카즈마사의 베스트 앨범을 재생하고 눈을 감았다. 또 한번 내가 될 시간이었고, 나의 농도를 회복하기에 음악은 제법 효과적일 것이었다. - P48

나는 이제 답을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 그를 만나길 간절히 원했다. 그는 내게 사랑을주진 않았지만 그걸 가르쳐준 사람이기는 했으니까.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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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코로나 이후의 세계
제이슨 솅커 저/박성현 역 / 미디어숲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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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 박사는 이를 심리학에서 ‘허위합의 편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자신의 의견이나 선호, 신념, 행동이 실제보다 더 보편적이라고 착각하는 자기중심성 개념이다. 한마디로 내가 믿는것을 다른 사람들 역시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심리 기제다.
많은 경우 SNS는 허위합의 편향을 부추겼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내 생각이 많은 이들이 합의한 생각과 같다고 믿을 때 허위합의 편향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뜨는 게시물 중 정말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것은 소수에 불과한데 페이스북의 최적화된 알고리즘은 맞춤화된 정보만을 선별해 제공해 준다. 개인 맞춤형으로 노출되는 게시물들을 보며 내 생각, 선호, 믿음이 다른 사람들도 그러리라는 느낌을 강화한다. 결국 나와 나 같은 주변인들이 믿는것이 곧 진실이 된다.

감염 현황에 대한 데이터가 변화를 거듭하고 끊임없이 발전했듯 데이터가 보여 주는 변화는 실체가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 위에 주관적 인식으로 만들어진 현실을 세웠다.
큐레이션 curation(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개인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것 - 옮긴이)으로 노출되는 사실들을 소비하고,
고도로 개인화된 인식을 강화하면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포스트 트루스 시대가 도래한 데에는 본질적으로 고도로 개인화된 특성을 가진 SNS의 영향이 크다. SNS는 주관적인진실을 양산해 내고 사람들을 동질화된 작은 집단으로 묶었다. 코로나19 또한 매우 작은 집단에서 시작했지만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완전한 팬데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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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와 마음이 잘 맞았다. 한문장 한문장. 유쾌하고 속시원하고 울컥하기도 하고.

남자는 어정쩡하게 물러서 있는 양선을 본체만체하고 승희에게고함을 질러댔다. 이혼하고 올 테니 제발 헤어지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듯 윽박질렀다. 유부남이었다니. 이런 남자들은 뚜껑 열린 맨홀처럼 인생에 잠복하여 어린 여자들을 삼킨다. 어리고 똑똑지 못한 여자들을 삼킨다. - P26

어렸을 때는 수정도 마구 휘둘렸으나 나이가 들고서는 하나 있는 딸인 자신만이 엄마를 제어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세상과 엄마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해왔다. - P11

가족만큼 자신의 편견을 선 넘어 들이미는 이들도 없다. - P80

그게 거짓말인 줄은 알고 있다. 고장난 트렁크를 친절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집에 가면 자기 가족에게 어떤 얼굴을 할지 아무도 알수 없다. 거짓말 너머를 알고 싶지 않다. 이면의 이경(異景) 따위, 표면과 표면만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 P90

머리가 좋은 걸 뛰어넘는 특별한 자질이 채원에게 있음을모두 슬슬 수긍했다. - P62

필요해,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필요해. 나팔수가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사람이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것, 그걸하기 위해 선택한 거잖아. 윤나는 일어났다. 막 구급차에 실리는 규익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는 달라. 너는 필요해." - P111

호탕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무척이나 단순하고 건강하다고 해야 할지. 어떤 설명도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영린이 몇년 동안 찾아낸 설명은, 새엄마가 비극을 처리하는하수처리장 같은 걸 잘 갖춘 사람이라 순식간에 약을 풀고 필터를돌려 비극을 비극 아닌 것으로 처리해낸다는 것이었다. 본인에게는그만큼 좋을 수 없겠지만 가끔은 좀 부적절할 때도 웃는 사람이었다. 만약 영린이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로 울고 있으면 곁에서 얼마나 웃어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있잖아, 마음에 갈증 같은 게 있는 사람은 힘들다?"
영린과 함께 산 지 얼마 안되어 새엄마가 말했었다.
"네?"
"그런 사람은 항상 져. 내가 보기엔 네가 힘든 게 몸무게 때문도아냐. 마음 때문이야."
그걸 지적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 P121

서른은 사실 기꺼이 맞았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20대가 너무 힘들어서 서른은 좋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 아직 중년처럼보이진 않지만 중년인 것이다. 병 때문에 원래도 염증이 오래가는편이지만 요즘은 한번 생기면 그냥 달을 넘기는 것 같다. - P130

큰 회사부터 코딱지만 한 회사까지 사슬 지어 더럽다. 더러운 판에 오래 있다보면 사람이 미친 짓을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정말이지 이 판에 안 들어오면 좋겠는데그 나이 때 애들은 참 세상 더러운 줄을 모른다. 그걸 모르게 키웠으니 잘 키운 건가, 못 키운 건가. - P145

엄마가 돌아봤을 때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건 정빈이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온도가 낮은 표정이었다. - P177

선생님이 물어왔다. 가끔 정빈은 어른들이 뭘 너무 많이 묻는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귀찮은 존재일 거라고는 생각을잘 안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 P180

그게 무슨 낭비람, 한나는 책을 사랑하고 사서 일을 사랑했지만 한국에서 사서가 취급받는 방식을 사랑하진 않았다. - P209

한정된 자원으로 삶을 애써 개선시키면 그걸 굳이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삭은 길지 않은 평생 그런 사람들을 끝없이 만나왔다. 좋지 않은 구덩이에 태어나면 계속 그 구덩이에 머물러야해? 기회를 주지 않는 세상에서 나름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면약은 거야? 모두가 무기력에 잠겨야 해? 그러면 안심이 돼? - P221

강사 코스라 함은 ‘제비 코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선들, 선들이보였다. 세훈은 대학에 들어가 이상한 종교단체나 피라미드 업체에끌고 가려는 사람들을 거절하며 희미한 선들을 보는 법을 배웠다. 넘기 전에는 희미하다. 넘고 나면 선이 아니라 벽이 된다. 아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꽤 힘들어진다. 살면서 그런 선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게 될까. 넘어가게 될까. - P251

"여자는 똑같은 전문직이어도 가사와 육아를 떠맡잖아요. 그래도계속 일하고 싶으니까 파트타임이어도 하고 돈 조금 줘도 하는지. 그게 선배가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는 시장의 형성이잖아. 마음에 안 들면 여자도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좀 만들어봐요."
"흥, 페미니스트 납셨네."
"페미니스트를 욕으로 쓰는 것도 교양이 부족하다는 증거예요."
"뭐라고?"
근용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승부가 났네, 났어, 하고 옆 테이블의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래, 그 말 취소할게. 너 같은 특권층 엘리트가 무슨 페미니스트냐?"
근용이 반격했다.
"그치, 나 혜택받은 엘리트지. 인정해요. 근데 줄곧 차별 안 받고커서 차별을 보면 차별인 줄 더 민감하게 알아요. 그래서 내가 가진자원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건데, 그게 뭐?" - P263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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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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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을 하나하나 읽다 보니 약간 인간상실에 관하여 카뮈의 느낌이 묻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카뮈의 작품에 통달한 사람은 아니지만.....) 편혜영의 소설은 장편인 ‘홀‘을 본 거랑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저녁의 구애‘ 한 편을 본 것이 다였는데 그동안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렇게 비관적인 세계관을 그리는 작가는 딱 내 스타일인데.
해설을 참고하자면 문명은 동일성의 지옥이라는데, 동일성의 세계에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개인들을 그리는 과정에서도 그 시스템을 만든 기성권력에 대한 고발도 부각 되고 있다. ‘토끼묘‘에서 인사발령 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잠시 언급이 되고, ‘정글짐‘에서는 출장의 과정에서 상사가 주인공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자조적인 화법으로 대화한다는 점, 또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에서 두 주인공들이 목적의식 없이 하루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명 속의 개인들이 일상적으로 수용하게되는 권력의 압박과 주체성의 상실이 드러난다.
다만, 솔직히 내용적인 측면에서 독자들이 쉽게 몰입할 만한 분노유발장치는 은연히 숨겨놓고, 그냥 불쾌하기만 한 반복적이고 의미 없는 인생에 집중하는 글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작가의 스타일이니까.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그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인사 발령이 나 있었다. 인사에 있어서 사전 협의가 전혀 없었다는 점은 조직 내에서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통보만으로 충분한 존재였다. 그가 이번발령을 통해 깨달은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 P17

그는 무엇보다 근태에 있어서 성실했고 업무 시간을 효율적이고 밀도 있게 사용하는 선배였다. 직장 생활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배가 그에게 모범이 된 것은 틀림없었다.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을 일러준 사람이 선배였다. 정보가 통용되는 방식,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흉이 되는 소식이라면 얼른 퍼뜨리고 다른 사람에게 득이 되는 소식은 혼자서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 사람도 선배였다. - P21

김은 그 일로 우정이라는 것은 애정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자신에게 헌신적이거나 유익할 때에만 유효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모든 지나간 일을 되새기는 과정이 그렇듯 과거의 어떤 일이 미친 결과나 상처는아무런 파동 없이 떠올랐고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새 시간이훌쩍 지나버린 것에 대한 서글픔과 뻔한 회한만 남았다. - P40

앞으로 여자와의 통화는 더 드물어질 것이고간혹 이어지는 만남은 지루할 것이고 말투는 무뚝뚝해질 것이며 웃을 일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럴수록 여자는 더 자주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소홀하고 무관심한 김을 이해하려고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서운함과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울컥하여 화를 내고 얼마 후에는 화낸 것을 사과할 것이다. 그런일이 얼마간 반복되다가 나중에는 오로지 마음을 되받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며 김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데 시간을 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 모든 일을 되풀이할 정도로 김을 사랑하지 않으며 어쩌면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고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허탈해질 것이다. 김으로서는 그순간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그때비로소 여자에게 애틋함을 느끼게 될지도 몰랐다. - P57

을 덮었다. 결국 타인과의 완벽한 친밀감이란 동경에 불과하며 인간이란 타인과 최소한 2미터 이상의 거리를 가져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는 복사실의 카운터와 쉴 새 없이학생이나 강사 들이 지나다니는 복도까지의 거리가 대략 2미터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 거리는 복사실을 찾는 사람들과 그사이에 놓인 카운터의 가로 길이와도 같았다. 누구도 카운터너머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 P74

구내식당의 정식 A세트를기준으로 그의 하루는 데칼코마니처럼 오전과 오후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오전과 오후뿐만이 아니었다. 자정을 기준으로 하면 어제와 오늘이, 주말을 기준으로 하면 지난주와 이번주가, 연말을 기준으로 하면 작년과 올해가 같았다. 그러므로모든 미래는 과거와 동일한 시간일 것이다. 현재가 과거와 같듯이 미래는 현재와 같을 것이다. 언제나 같다는 것. 그 때문에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언제나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거둬들였다. - P83

"자네가 하필 이 시기에 출장을 떠나는 건 회계 시스템을 바꿔야 하기때문이야. 불가피한 일이지. 그렇지? 두 도시 담당자가 바쁜일정을 조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알겠나?" 그에게 말한다기보다 스스로에게 되뇌는 느낌이었다. 이 상황을 납득하고 싶어 하는 건 그보다는 백인 것 같았다. - P155

『저녁의 구애』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자연의 혼돈에맞서 문명이 이룩한 질서와 체계가 실은 그토록 인간이 두려워하던 ‘동일성의 지옥‘이라는 사실에 대한 경고다. 야만에맞서 건설한 문명의 끝이 야만이다. 자연에 대한 계몽 이성의지배가 최종적으로는 야만 상태로의 회귀로 귀결된다는 아도르노의 예언이 이번 편혜영 소설에서 확증된다. - P248

요컨대, 동일하고 동일하고 다시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의저 군상들, 그들이 사는 곳은 바로 그 이유로 미로이고 저수지이다. 미로와 저수지는 그것이 설사 문명과 자연이라는 익숙한 근친적 대립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동일한 것들의 지옥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야만이 문명이고 문명이 야만이다. 편혜영의 세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가 이것이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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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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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작가의 소설이다. 주로 믿는 점은 감정의 복선을 밑바닥에서 절대 위로 띄우지 않고 항상 먹먹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게 동시대의 삶을 관철하게 해주는 작가라는 것. 그래도 김애란의 소설은 나를 울리지는 않았는데 몇 번 울어버린 것 같다.
김애란은 인생을 통찰하게 해주는 (가령 좀 한심스러울 정도로 직업정신이 투철한 방송작가와 아름이의 대화장면 같이) 인간 본성의 신랄한 공격을 담담하게 풀어내는게 주특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먹먹함이라니.
나이 듦에 대해서, 늙음에 대해서 아름이와 장씨아저씨 같이 대조적인 시선을 통해, 또 너무나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늘 곁에 있지만 찰나의 지나버린 순간에서야 문득 깨닫게 되는 늙는다는 것에 대해, 죽는다는 것에 대해.

어머니는 이상한 듯 갸웃거렸지만, 그러고는 그걸 또 금방 잊어버렸지만, 나는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생각에 그녀들은, 아마 미안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활달함 혹은 친절함이란 누군가와 무의식적으로 이별을 준비할 때 나오는 태도 중의 하나니까. - P41

올해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라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 중열일곱을 넘긴 이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기적은 항상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 내가 보기에 기적은 내 눈앞의 두 분,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외삼촌과 외숙모였다.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였다. 한여름과 한겨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 P47

더욱이 세상물정 모르는 얼굴은 딱 열일곱살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눈빛, 두 눈 속에 담긴 기운이 어딘가 달랐다. 그 속에는 이제 막 한 존재를 책임져야 하는 이들의 피로와 슬픔, 그리고 자부가 묘하게 엉겨 있었다.
‘그런 걸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고민하다 그런 걸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그냥 부모의 얼굴이라 부른다‘ 라는 문장을 이어붙였다. 부모는 부모라서 어른이지, 어른이라 부모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 P78

"이 물만 해도 그래. 우리집은 대수가 보리차 좋아해서 물 끓여먹거든? 근데 봐봐, 밥상에 물 한잔 올려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절차가 필요한지. 물 끓여야지, 식혀야지, 주전자 씻어놔야지, 물병소독해야지, 병에다 다시 물 담아야지, 냉장고에 넣어야지…… 근데 그렇게 끓인 물이 또 이틀을 못 가. 예전에 물 마실 땐 아무 생각없었는데. 참,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어 진짜, 나도 물 마실 때 그런 생각 안하는데." - P83

‘고요‘라는 단어를 읊어보았다. 그것은 곧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기척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는 동그라미를 만들어냈다. 신기한 일이었다. 0계급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았는데, 0계급이무언가 하고 있었다. - P199

그러자 문득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는 만큼, 가지지 않으려고 하는것 또한 욕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했으면서 아무것도 안 가진 척하는 것도 기만일 수 있다고……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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