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나와 마음이 잘 맞았다. 한문장 한문장. 유쾌하고 속시원하고 울컥하기도 하고.

남자는 어정쩡하게 물러서 있는 양선을 본체만체하고 승희에게고함을 질러댔다. 이혼하고 올 테니 제발 헤어지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듯 윽박질렀다. 유부남이었다니. 이런 남자들은 뚜껑 열린 맨홀처럼 인생에 잠복하여 어린 여자들을 삼킨다. 어리고 똑똑지 못한 여자들을 삼킨다. - P26
어렸을 때는 수정도 마구 휘둘렸으나 나이가 들고서는 하나 있는 딸인 자신만이 엄마를 제어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세상과 엄마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해왔다. - P11
가족만큼 자신의 편견을 선 넘어 들이미는 이들도 없다. - P80
그게 거짓말인 줄은 알고 있다. 고장난 트렁크를 친절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집에 가면 자기 가족에게 어떤 얼굴을 할지 아무도 알수 없다. 거짓말 너머를 알고 싶지 않다. 이면의 이경(異景) 따위, 표면과 표면만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 P90
머리가 좋은 걸 뛰어넘는 특별한 자질이 채원에게 있음을모두 슬슬 수긍했다. - P62
필요해,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필요해. 나팔수가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사람이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것, 그걸하기 위해 선택한 거잖아. 윤나는 일어났다. 막 구급차에 실리는 규익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는 달라. 너는 필요해." - P111
호탕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무척이나 단순하고 건강하다고 해야 할지. 어떤 설명도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영린이 몇년 동안 찾아낸 설명은, 새엄마가 비극을 처리하는하수처리장 같은 걸 잘 갖춘 사람이라 순식간에 약을 풀고 필터를돌려 비극을 비극 아닌 것으로 처리해낸다는 것이었다. 본인에게는그만큼 좋을 수 없겠지만 가끔은 좀 부적절할 때도 웃는 사람이었다. 만약 영린이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로 울고 있으면 곁에서 얼마나 웃어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있잖아, 마음에 갈증 같은 게 있는 사람은 힘들다?" 영린과 함께 산 지 얼마 안되어 새엄마가 말했었다. "네?" "그런 사람은 항상 져. 내가 보기엔 네가 힘든 게 몸무게 때문도아냐. 마음 때문이야." 그걸 지적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 P121
서른은 사실 기꺼이 맞았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20대가 너무 힘들어서 서른은 좋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 아직 중년처럼보이진 않지만 중년인 것이다. 병 때문에 원래도 염증이 오래가는편이지만 요즘은 한번 생기면 그냥 달을 넘기는 것 같다. - P130
큰 회사부터 코딱지만 한 회사까지 사슬 지어 더럽다. 더러운 판에 오래 있다보면 사람이 미친 짓을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정말이지 이 판에 안 들어오면 좋겠는데그 나이 때 애들은 참 세상 더러운 줄을 모른다. 그걸 모르게 키웠으니 잘 키운 건가, 못 키운 건가. - P145
엄마가 돌아봤을 때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건 정빈이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온도가 낮은 표정이었다. - P177
선생님이 물어왔다. 가끔 정빈은 어른들이 뭘 너무 많이 묻는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귀찮은 존재일 거라고는 생각을잘 안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 P180
그게 무슨 낭비람, 한나는 책을 사랑하고 사서 일을 사랑했지만 한국에서 사서가 취급받는 방식을 사랑하진 않았다. - P209
한정된 자원으로 삶을 애써 개선시키면 그걸 굳이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삭은 길지 않은 평생 그런 사람들을 끝없이 만나왔다. 좋지 않은 구덩이에 태어나면 계속 그 구덩이에 머물러야해? 기회를 주지 않는 세상에서 나름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면약은 거야? 모두가 무기력에 잠겨야 해? 그러면 안심이 돼? - P221
강사 코스라 함은 ‘제비 코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선들, 선들이보였다. 세훈은 대학에 들어가 이상한 종교단체나 피라미드 업체에끌고 가려는 사람들을 거절하며 희미한 선들을 보는 법을 배웠다. 넘기 전에는 희미하다. 넘고 나면 선이 아니라 벽이 된다. 아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꽤 힘들어진다. 살면서 그런 선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게 될까. 넘어가게 될까. - P251
"여자는 똑같은 전문직이어도 가사와 육아를 떠맡잖아요. 그래도계속 일하고 싶으니까 파트타임이어도 하고 돈 조금 줘도 하는지. 그게 선배가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는 시장의 형성이잖아. 마음에 안 들면 여자도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좀 만들어봐요." "흥, 페미니스트 납셨네." "페미니스트를 욕으로 쓰는 것도 교양이 부족하다는 증거예요." "뭐라고?" 근용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승부가 났네, 났어, 하고 옆 테이블의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래, 그 말 취소할게. 너 같은 특권층 엘리트가 무슨 페미니스트냐?" 근용이 반격했다. "그치, 나 혜택받은 엘리트지. 인정해요. 근데 줄곧 차별 안 받고커서 차별을 보면 차별인 줄 더 민감하게 알아요. 그래서 내가 가진자원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건데, 그게 뭐?" - P263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 P2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