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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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글을 이렇게 쓰지?

한영진은 그걸 두번 세번 읽은 뒤에야 자기가 불신한 것이 외국인이나 그의 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외국인, 그는 불순한 의도를 숨기려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의 의도 같은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나였어, 하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내가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불신한 건 그 외국인이나 그의 말이아니고 나였어…… 네가 그 정도로 매력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게 김원상의 생각인 것 같았고 한영진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것 같았다. 더러운 거짓말. - P53

어린 동생에게 잘못을 했다고 느꼈다. 손써볼수 없는 먼 과거에 그 동생을 두고 온 것 같았다. 이제 어른이 된 한세진에게 사과한다고 해도 그 시절 그 아이에겐 닿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 P63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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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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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름이 조금 생소해 이력을 보니 문학동네에서 등단한 작가였다. 안그래도 지난해 제 식구 챙기기로 홍역을 치른 문동에서 또 무슨 욕을 얻어 먹으려고 이런 선택을 했나 싶었는데, 머지않아 수상작을 읽으면서 나의 섣부른 판단을 반성하게 되었다.
나는 문학가들의 영화에 대한 열망을 조금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경계가 선명하지 않은 영역이다 보니 그 사이를 자주 왔다갔다 하는 작가들이 많아서 그런지 유독 영화에 관한 소재가 현대소설에서 자주 보이는데.... 좀 식상하다. 이런 여러 가지 선입견으로 무장하고 있던 내가 전하영작가의 단편 앞에서 무력하게 항복해 버렸다.

김혜진작가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다. 확실히 굳히게 되었다. 화려한 수식어구도 없고 신선한 단어배열로 독자를 감탄하게 하는것도 없이 일상적이고 담담한 문장으로 수작을 만들어 낸다. 그런 일상적인 감정들, 쉽게 잊혀버리고 말았던 기억들을 자극하여 깨우는 능력이 있다.

소재의 편중을 벗어나려고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그래도 아직 작년처럼 소재가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은 조금 아쉽다.

어떤 경우라도 열일곱에서 스물세 살, 스물네 살까지가 우리 삶에서 가장 추한 시절이라는 걸 머릿속에 담아두어라.... - P16

우리는 저 남자랑은 다르잖아. 장 피에르 같은 사람은 모든 걸다 소유하고서도 불행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야. 저런 우울감은 특권층만 가질 수 있는 거라고, 그게 자기 매력이라는 것조차 의식할 필요가 없어.
나는 연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니깐 우린 저 사람처럼 곱게 미칠 수 없다고 - P24

약간의 경멸이 담긴 목소리로 연수가 말했다.
네가 모르는 게 뭔지 알아? 원하는 게 있으면 노력해야 돼, 사랑받으려면 정말 죽도록 노력해야 된다고. - P44

어느 프랑스 인류학자는 말했다. 인간의 자아는 나이들어감과상관없이 계속해서 젊은이의 영혼을 지닌 채 살아가는 비극적인운명 속에 놓여 있다고. 언제까지라도 자신이 어리고 젊었을 때처럼 연약한 상태로, 애정을 갈구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착각하면서. - P50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각자의굴욕을 꿋꿋이 견디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 P51

이유를 묻고 그 답을 찾으려는 간절함만큼이나 답을 모르고 사는 힘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답이 없다는 것의 기쁨을 배우라고 합니다. 기뻐하는 건지 아파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웃습니다. - P112

좋은 일인지 아닌지도 살아봐야 알지. 좋은지 나쁜지 뭐든 당장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 P179

지금의 남성적 성장이란 무언가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혐오와 대상화의 언어로 여성과 약한 남성을 얼마나 잘 배제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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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 창비세계문학 38
류이창 지음, 김혜준 옮김 / 창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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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칭 시점에서 술꾼을 묘사한 게 아니라 술꾼이 일인칭 시점으로 자기이야기를 써나가는 방식이라 그 의식의 흐름이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밤의 홍콩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건 세속적인 시각에서이다. 네온사인은 너무 많은 색깔을 쏟아내서서로 부대끼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이다. 감정도 타고 있다. 혹시 환상일까? 아스팔트 길에서 자동차가쏜살처럼 질주하고 있다. 놀기에 지친 돈 있는 사람들은 슬리퍼 속의 한가로운 심정을 찾기에 급급하다. 나는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없는 사람, 돈으로 마취나 사고 싶을 따름이었다. - P127

—우린 지식인이잖나? 우리가 이익만 추구하는 그런 무지한 장사꾼들처럼 팔년간의 그 비통한 경험을 모조리 잊을 수는 없네. - P219

술은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나는 두어차례 크게 취했는데 더 마시고 싶어서보니 술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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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못한 숲 오늘의 젊은 작가 1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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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한 자리에 항상 더 큰 따듯함을 채우는 작가.

그들처럼 반가워해야 하는데, 충분히 그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윤은 웃을 수가 없다. 한때 허름한 체육관에서 함께트레이닝을 받았고 학교 앞 술집에서 헛소리나 해 대며 새벽까지 마시고 취했던 그들. 미래가 아직 공백이었던 시절에는친구이거나 선후배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서로의 연봉과 세금에 무심하거나 무심한 척해야 하는 각기 다른 계층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들과의 연락이 끊긴 지는 2년도 넘었다. - P102

아까부터 미수의 눈치만 살피던 택시 기사가 룸 미러로 뒷좌석을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기사의 말대로 창문에 빗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둠이 스민 도로에 떨어지는 빗줄기엔 아무런 형태도 없었지만 창문에 맺히는 물방울들은도시의 조명을 받으면서 제각각의 모양으로 번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정성스럽게 조각을 해 놓고 빛깔을 덧씌운 세공품 같았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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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밖에 없네 큐큐퀴어단편선 3
김지연 외 지음 / 큐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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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소문내고 싶어요. 점심으로 맛있는 우동을 먹어도 소문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에요. 길 가다 귀여운 고양이를 만나면 소문을 내는 게 인지상정이라고요. 근데 우리 은호 좀보세요. 얼마나 귀여워요. 아버님도 거기 앉아서 계속 본인자랑만 하셨잖아요. 뭐 별 대단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저도 동네방네 소문내고 자랑하고 싶어요. 동네 사람들 다 모아놓고 잔치라도 열었으면 한다고요. 다들 그렇게 하면서 살잖아요. 근데 저희가 남들은 다 하는 그 잔치 열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어디 광고할 것도 아니고요. 그냥 거짓말 안 하고 살겠다는 거예요." - P28

"손님들이 여길 정말 좋아하네요."
"좋아서 좋은 게 아니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죠."
"다른가요?"
"선택지가 없으니까, 이왕이면 좋게 생각해야죠.‘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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