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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과 가죽의 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4
구병모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4월
평점 :
뻔한 결말이라는 감상평들을 보고서야 뻔한 결말을 예측하지 못한 나는 아무래도 책을 읽는 동안 안과 같은 의식의 흐름을 지나왔나 보다.
불멸의 안이 후회하는 지난 (공방 제자 시인의 어머니, 아주 오래전 가죽 공장에서 함께 일하다 연을 맺고, 그 인연의 끝이 불행할 것이라 떠나버렸던) 사랑을 재연하는 미아를 탐탁지 않아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면서 자신의 이별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를 얻고 미아를 지지해주는 결말.
작가의 필력에 통속적이고 교훈적인 결말을 예상치 못하고 재밌게 봤으니, 아무렴 즐거웠다. 같은 내용도 어떻게 쓰냐가 작품의 질을 좌우하는 거 아닌가.
장인과 기술자는 경력과 노하우 상관없이 대체로 동일 강도의 노동을 하지 만 이 부분만은 확실하게 다르다는 안의 견해에 동의한 소수의 수강생이 지금의 교실에 등록하고 있다. - P27
1년 내내 혹서와 혹한이 반씩 지분을 차지하는 극단적인 기 후는 사람을 닮았다. 백 아니면 흑. 나 아니면 너. 우리 아니면 그들. ‘아니면‘의 자리에 ‘과나 ‘와‘가 들어가는 일은 흔치 않다. 간혹 짝지어서 불리는 예외도 있는데 죽음과 삶을 가리킬 때. 죽음과 같 은 삶. 삶이자 죽음. 생명이 거한 곳에 어김없이 절 반의 지분을 차지한, 삶과 죽음. - P12
이미 어머니를 위한 홀컷 구두를 통해 고양감을 가져본 데서 나오는 자존심 같은 것인데, 안은 가능한 한 그것을 지켜주는 쪽 으로 가고 싶다. - P29
자신들의 피와 살과 뼈와 근육을 가진 인간이 되어버린 그 어느 시절에 대 해, 무한의 껍질을 벗고 얻게 된 불완전한 유한에 대해, 이 상태를 진정한 유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 P36
그러던 중 안과 헤어져 다다른 이 나라에서는 어느 공장이나 버스 회사나 가릴 거 없이 산업 전반에서 싼값에 고용 했다 내칠 수 있는 젊은 여자의 수요가 많은 것 같 았는데, 가만 지켜보는 동안 자잘하게 힘쓰는 일, 큰일을 밑에서 떠받치는 일, 무언가를 생산하여 구체적인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 고되지만 그 중 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그늘에 가려지거나 지워 지는 일들의 상당 부분이 아주머니라고 불리는 여 인들에게 맡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주머니 는 철저히 멸시당하는 동시에 그 멸시의 원인 가 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그악스러움이 생명력을 상 징하기도 하는, 아이러니하면서도 대상화된 존재 로, 그런 취급과 인식이 그리 새롭지는 않다. 사람 들이 통틀어 옛날이야기라고 부르는 전설이나 신 화, 민담에는 그런 이들 천지다. 저주와 천대와 박 해를 받지만 사실은 유능하거나 은밀한 축복을 받 은 이들이, 잘난 척하다 곤경에 빠진 친인척을 구 해내고 기운 집안의 부를 일구거나 마을을 구한 다. 미아는 형제들과 세상을 거닐 적에 그런 인간 들을 비롯하여 그런 인간들을 부리고 버리는 인간 들을 숱하게 만나보았으며, 그들에게서 삶의 대처 방식을......무엇보다 인간의 바닥을 배웠다. - P64
그러나 객원으로서는 변변히 두각을 드러내 지 못하고 나이 들어가면서 초조해지던 때, 부상 당한 고관절과 무릎 인대가 좀체 회복되지 않는 동안 기량은 확연히 떨어지기만 하여 귀국을 선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종목만 좀 바꿔가면서 아무 스포츠나 예술 분야에 갖다 얹 어도 유사 사례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보편 적인 패턴이다. 극소수만이 정상에 도달할 기회 와 권리를 획득하며 그 이하로는 빠르게 부정과 망각의 대상이 되는. - P72
물론 다른 이들의 불운을 열거해야만 자신의 행 운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 P75
키가 자라고 만질 수도 있고 저마다의 몸에 품었던 묘 향은 극히 일부만 남은 채 개인적 특성을 지닌 냄 새를 풍기며, 무엇보다 부를 수 있는 이름을 가지 고, 이름으로 존재를 규정함으로써 원래의 존재가 내포하고 있던 수만의 속성이 축약된다는 생각에 는 미처 이르지 못한 채, 실재와 환영이 뒤섞인 길 을 떠난다. 세상의 물결에 속해 흐를 수 있고 가끔 머물러야 할 곳에라면 고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딧불이만 한 믿음을 갖고. 그렇게 언젠가 환영 이 실재에 압살당할 때까지. - P83
그러므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습 에서 최선의 목표는 자급자족 시대를 살아본 적 없 는 도시의 소비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처음부터 끝 까지 무언가를 해보았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 P118
"그래도 일단 갖고는 있으려고요. 생각해보면, 이제 아이가 없다고 해서 하던 작업을 중단한다는 게,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누구도 신지 않을 것,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더는 쓸데 없어진 것이라는 이유로, 아름답게 완성시키면 안 되나?" - P141
이후 시인의 어머니, 노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여인을 본 뒤 안은 오래전 그녀를 보낸 자신의 선 택이 더욱 옳았다고 여긴다. 점유할 수도 당겨 쓸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인 간과 인연을 맺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고. 그럼에도 그 무의미를 선택한 미아에게 자신은 무 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남아 있는 날 들의 목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 P110
꽃받침에 아무리 단단히 매달리더라도 길어야 한두 주의 유예라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이 뿜어내는 모든 것들의 유효기간이 어쩌면 이리 짧은가. - P162
이 생에서 두 번을 만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녀의 사라져가는 시간을, 닳아져가는 삶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아주어야 한 다는. 물을 머금어본 적 없이 방치되어 말라비틀 어진 씨앗 같은 기억에, 이제라도 솜을 깔고 현재 를 분무해주어야 한다는. 그 행위가 비록 무용하 더라도, 씨앗을 간직해온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예의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망각과 기억 사이에 난 미로 같은 길들을 따라 육신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응하는 일이 자신의 몫인 것만 같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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