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원도 - 《구의 증명》이 있기 전 《원도》가 있었다!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시절의 경험은 쉽게 자신의 삶을 좌우하는 판단의 기준이 되기 쉽고,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평생 ‘삶을 통째로 지배’(144p.)당하고 만다.
원도의 아버지는 원도 앞에서 약을 탄 물을 먹고 자살했다. 어머니의 재혼 이후 새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아원에서 위탁받았던 같은 반 친구 장민석과 경쟁에서 늘 열패감을 느꼈던 원도의 기억은 그의 어린 시절을 불화만 가득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성인이 돼 다시 만난 장민석이 원도가 가졌던 장민석에 대한 열등감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 수치심이 몰려와 장민석을 죽여버린다.(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전개상 원도가 장민석을 죽인 듯하다.)
원도는 은행을 다니며 공금을 횡령해 자산가가 되지만 퇴직 후 횡령이 드러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도피생활을 한다. 허름한 여관에 들러 자살을 시도하는 원도는 여관주인에게 발각돼 쫓겨나면서 자신은 왜 죽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자문한다. 평생 자신의 살아 있는 이유의 답을 찾지 못하는 원도는 새아버지 친구인 치료사에게 자신의 실제 아버지는 죽은 아버지가 아니라 새아버지라는 얘기를 들었다. 누가 자신의 친아버지인지 끝내 답하지 않는 엄마는 노년이 되어 장민석의 이름도 잘 기억 못하고, 원도는 죽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아버지를 믿으라’는 이야기만 계속 되뇌인다.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이다. - P11

하나하나 옳은 말이라서 딱히 새겨들을 말이 없었다.
그것운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어디에서나 읽을 수 있는, 분명 옳은, 모두의 말이었다. - P13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온 사람의 형편을 까다롭게 따지고 심사하다 보면 때론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 P20

쓰레기통에 그득 쌓인 종이 쪼가리와 돈이 다를 것 없어 보였고, 늦가을 길바닥에 나뒹구는 노란 은행잎을 보 면서도 저것과 돈이 뭐가 다른가 생각했다. 때가 되면 차고 넘치는 것. 의미를 잃으면 쓰레기에 불과한 것. - P20

초반엔 실패도 했다. 실패의 원인은 신중함에 있다고 원도는 생각했다.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욕심을 내야 했 다. 치밀한 셈보다 과감함이 필요했다. 망설이지 않아야 했다. 셈과 판단은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했고, 이성보 다 감각을 믿어야 했다. - P21

생각은 무계가 없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것은 유령처럼 사람을 흘린다.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들릴 듯 들 리지 않는 숨소리.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림자, - P24

완도를 비롯한 남자들은 자기 아닌 모든 것에 무관심한 척하면서도 내심 상대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자 발적으로 자존심을 다치거나 열등감을 느꼈다. - P26

단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경쟁 속에서 원도는 점점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무엇에 관해서건 평가를 하 고 단점을 찾고 트집부터 잡아야만 손해 보지 않는 기분이었다. 일단 반대하고 거부하여 상대의 마음을 조인 뒤 내키지는 않지만 인정하고 수락한다는 포즈를 취하는 데 익숙해졌다. 얕보이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믿 었고, 그 믿음은 원도의 성격을 형성했다. - P29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며, 그 후 에는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고, 그 이치를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성 숙과 성장이 완성된다고들 했다. 하지만 원도는 어른보다, 성숙보다, 성장보다 원하는 그것을 갖고 싶었다. 그 것 아닌 다른 것은 원치 않았다.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하늘의 뜻 따위로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것이 경쟁이라면, 그것을 굳이 경쟁이라고 부를 이유가 있는가 생각했다.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한 뒤 기다리는 것이 고작 하늘의 뜻이어야 하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것을 통째로 운에 맡겨 제비뽑기나 사다리 타기 로 승패를 가르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 운이라는, 혹은 우연이라는 여백을 전제하 는, 경쟁의 상황도 조건도 천차만별인, 그래서 그다지 공정하지 않은 경쟁을 공정하다 믿고, 믿으라고 강요하 는 것 아닌가. - P29

어른 원도는 누구보다 경쟁의 물을 정확히 인지하고 이용할 줄 알았다. 경쟁에 깃든 우연이란 함정을 원망하 기보다 그것을 최대한 기다리고 활용하여 자기 몫을 챙겼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만 경쟁하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회는 원도에게 결코 이롭지 않았다. 빈틈과 불합리와 부조리가 있는 곳에 승산도 있었다. - P30

자살은 죽음의 형식일 뿐 내용이 아니다. 내용에 대해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 P39

선택을 너무 오래 미루면 결국 누구도 원치 않는 최악의 선택이 나를 선택하게 마련이지. 후회해봤자 소용없 어. 시간을 되돌릴 순 없잖아. - P41

착각하지 마. 우리는 선택하지 않아. 선택당하지. - P41

아무리 불품없고 비천한 것이라도, 그런 입장과 역할이라도, 장민석이 가지는 순간 그것은 무엇보다 좋고 담 나는 것이 되었다. - P49

유경은 잘못을 지적하려고 원도 곁을 지키는 사람처럼 굴었다. 당구 채로, 이해한다는 말로, 몇 대 맞을래라는 말로 원도의 오류와 책임을 지적하면서 원도 아닌 다른 존재를 요구하는 선생이나 부모처럼, 유경은 사랑이라 는 말을 방패 삼아 있는 그대로의 원도를 부정했다. - P55

나는 고장 난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인간이라고, 원도는 생각했다. 원래 이런 인간인데 유경은 나를 고장 난 인 간 취급하고, 이러저러한 것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 P55

앞으로 잘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드물었으며, 그 말을 따르더라도 ‘잘해보는 것‘의 정의는 그야말 로 제각각이었으니 결국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 P58

무조건적으로 돈이 되니까 그런 겁니다. 사랑 싫어하는 사람 없죠. 돈 싫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그것을 원합니다. 김태경 씨. - P68

산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어서 자식을 누구보다 반듯하게 키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그래서 친아버 지 이상으로 애쓴다고 원도는 생각했다. 하지만 ‘친아버지 이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 라는 생각 자체가 이 미산 아버지를 친아버지와는 거리가 먼 아버지로 만들어버렸다고 - P80

하지만 자유를 생각하지 않는 존재에게 자유는 불필요하다. 자유를 생각하는 존재에게 자유는 불가능하다. 그 러므로 자유는 없다. 자유분 아니다. 평등, 평화, 공정, 정의 등 사람이라면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것 모두 마 찬가지다. 각자의 마음에 존재하는 그것에 대한 정의는 지문과 같다. 같을 수 없다. - P82

자신의 오해에 대해, 아무도 밝히려 하지 않았던 진실, 흰히 드러나 있기에 밝힐 필요가 없었던 진실, 모두가 알고 원도만 모르는데 원도만 모른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진실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오해하고 착각하 는 삶이 나았다. 간단명료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결론을 내리기 두려웠다. - P86

왜‘라는 질문을 잃어버리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질문을 제거해버리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 P89

너는 외동이어서 모르겠지만 엄마의 사랑은 형제와도 나눌 수 없는 거야. 생존 문제니까. 대부분 내가 더 사랑 을 많이 받았다, 혹은 내가 더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공평하게 사랑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 어. 그런데 형제도 아닌 너와 나라면 말이지. - P90

아르바이트생들 푼돈이나 벗어 돈을 모으니까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거라고 원도는 생각했다. 푼돈이나 벗어 봤자 재산은 겨우 그 정도 불어날 뿐이다. 1만큼 벗으면 1만큼 얻고 10만큼 벗으면 10만큼 얻는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10만큼 가진 자를 공략해야 한다. 하지만 사장 주변에는 1만큼 가진 자분이었다. 사장 역시 3정 도 가진 자에 불과했다. 10을 가진 자는 사장이나 원도 주변에 없었다. - P95

잘 사는 기준은 타인의 시선과 인정으로 만들어졌다. - P116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 역시 아니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이다. - P120

나는 지금 소통의 불가능을 믿는다. 타인의 몰이해를 믿는다. 그 믿음이 나의 입구며 출구다. - P1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평점 :
품절


글이 써지지않는다고 투덜거리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 다. 지금 네 나이에 어떻게 글이 잘 써지겠느냐고, 나이가 더 들어야 한다고. 나는 그것이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어떤 경험치에 관한 이야기라고 여겼다. 너는 아직 숙련공이 아 니므로 요렁과 노하우를 더 쌓아야 한다는 흔하고 뻔한, 그 래서 다소 맥 빠지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더 흐른 뒤 나는 그 말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건 단순히 실력을 쌓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시 간을 감각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 P7

십 년은 긴 시간일까.
수지는 역사 앞에서 미란을 배웅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십 년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 P103

희나는 무심하게 대꾸했지만 마음속에서 뿌옇게 자리 잡고 있던 뭔가가 깨끗하게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 간, 어느 때보다 수연의 마음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수연 안에도 꺼내지 않았던 수많은 말 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그런 말들이란 기다리면 어느새 또 저절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그 기다림 덕분에 관계가 이 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였다. - P128

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킬 수 있었던 것,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잃지 않았던 모든 것.
케이크의 맛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응축시켜놓은 것처
럼 아주 진하고 깊다. - P1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풀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8
강화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집단 내에서도 비교와 차별이 존재한다. 항상 동생한테 지고 살았던, 엄마에게 늘 비교 대상이고 무시를 당했던 지수가 평생 생각지도 못했던 운동을 시작해 ‘자극점’을 깨닫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가족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건 지수뿐이 아니다. 지수의 아빠는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고모부에게 무시를 당하고 할머니도 그 둘을 비교하며 고모부의 행패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차별과 억압은 가정에서 제일 만연하게 이루어진다.
운동으로 동기를 찾았다는 부분도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평생 운동에는 소질이 없을 것 같던 사람들이 취미를 찾으며 인생의 관점이 달라지는 일은 생각보다 흔한 것 같다. 누구든 자신과 확신을 찾아내는 일은 좋은 일이니까.

여자는 말했다. 현대인들은 삶에 기대가 너무 많다고. - P18

그래서 어린 시절, 지수는 영애 씨에게 늘 꾸중 을 들었다. 영애 씨도 부모였으니까. 어쩔 수 없었 을 것이다. 원래 부모는 자식을 통해 이상을 추구 하고, 결핍을 보상받으려 하니까. (그러다 아이들 을 망치는 것 역시 부모의 위대한 숙명이다.) 영애 씨는 잔뜩 화가 난 날이면, 지수의 미래에 대해 험 악한 예언을 늘어놓았다. 정신 안 차려? 대체 뭐가 되려고 그래? 너 이러다가 아무것도 못 해. 형편없 는 인간이 되고 싶니? 미수에 대해서는 달랐다. 미 수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는 물론, 체육과 음악, 미 술 등등다방면에서 도드라지는 성과를 냈다. - P40

아, 이런 거구나. 우리가 알아서 참고 맞춰주니까,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구나. 무 슨 말을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구나. 저 사람은 우리가 참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상황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구나. - P65

본래 영애 씨는 누구에게도 신세 지는 사람이 아 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부탁만 하고 다니다 떠난 남편 때문인지, 영애 씨는 아쉬운 소리를 하 는 걸 누구보다 끔찍해했다. 동시에 누군가의 호 의를 견디지 못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믿 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 덕에 그녀는 친구들을 하나씩 떠나보냈고, 결국에는 혼자 남았지만 덧없는 신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 일은 없 었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강건한 사람으로 나이 먹었다. (동시에 건조하고 어려운 사람으로) 그녀 는 자신의 그런 상태가 꽤 좋았다. 누군가에게 의 지할 필요 없이 오직 자기 자신만 지키며 살면 되 는 삶. - P79

"나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듣는 사람 아니야. 그건 다 언니 착각이야." 지수는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다. "다들 네 눈치 보느라고 말하지 않은 거겠지. 너는 그런 사람 아니면 옆에 안 두잖아?" - P1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늘과 가죽의 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4
구병모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뻔한 결말이라는 감상평들을 보고서야 뻔한 결말을 예측하지 못한 나는 아무래도 책을 읽는 동안 안과 같은 의식의 흐름을 지나왔나 보다.
불멸의 안이 후회하는 지난 (공방 제자 시인의 어머니, 아주 오래전 가죽 공장에서 함께 일하다 연을 맺고, 그 인연의 끝이 불행할 것이라 떠나버렸던) 사랑을 재연하는 미아를 탐탁지 않아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면서 자신의 이별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를 얻고 미아를 지지해주는 결말.
작가의 필력에 통속적이고 교훈적인 결말을 예상치 못하고 재밌게 봤으니, 아무렴 즐거웠다. 같은 내용도 어떻게 쓰냐가 작품의 질을 좌우하는 거 아닌가.

장인과 기술자는 경력과 노하우 상관없이 대체로 동일 강도의 노동을 하지 만 이 부분만은 확실하게 다르다는 안의 견해에 동의한 소수의 수강생이 지금의 교실에 등록하고 있다. - P27

1년 내내 혹서와 혹한이 반씩 지분을 차지하는 극단적인 기 후는 사람을 닮았다. 백 아니면 흑. 나 아니면 너. 우리 아니면 그들. ‘아니면‘의 자리에 ‘과나 ‘와‘가 들어가는 일은 흔치 않다. 간혹 짝지어서 불리는 예외도 있는데 죽음과 삶을 가리킬 때. 죽음과 같 은 삶. 삶이자 죽음. 생명이 거한 곳에 어김없이 절 반의 지분을 차지한, 삶과 죽음. - P12

이미 어머니를 위한 홀컷 구두를 통해 고양감을 가져본 데서 나오는 자존심 같은 것인데, 안은 가능한 한 그것을 지켜주는 쪽 으로 가고 싶다. - P29

자신들의 피와 살과 뼈와 근육을 가진 인간이 되어버린 그 어느 시절에 대 해, 무한의 껍질을 벗고 얻게 된 불완전한 유한에 대해, 이 상태를 진정한 유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 P36

그러던 중 안과 헤어져 다다른 이 나라에서는 어느 공장이나 버스 회사나 가릴 거 없이 산업 전반에서 싼값에 고용 했다 내칠 수 있는 젊은 여자의 수요가 많은 것 같 았는데, 가만 지켜보는 동안 자잘하게 힘쓰는 일, 큰일을 밑에서 떠받치는 일, 무언가를 생산하여 구체적인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 고되지만 그 중 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그늘에 가려지거나 지워 지는 일들의 상당 부분이 아주머니라고 불리는 여 인들에게 맡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주머니 는 철저히 멸시당하는 동시에 그 멸시의 원인 가 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그악스러움이 생명력을 상 징하기도 하는, 아이러니하면서도 대상화된 존재 로, 그런 취급과 인식이 그리 새롭지는 않다. 사람 들이 통틀어 옛날이야기라고 부르는 전설이나 신 화, 민담에는 그런 이들 천지다. 저주와 천대와 박 해를 받지만 사실은 유능하거나 은밀한 축복을 받 은 이들이, 잘난 척하다 곤경에 빠진 친인척을 구 해내고 기운 집안의 부를 일구거나 마을을 구한 다. 미아는 형제들과 세상을 거닐 적에 그런 인간 들을 비롯하여 그런 인간들을 부리고 버리는 인간 들을 숱하게 만나보았으며, 그들에게서 삶의 대처 방식을......무엇보다 인간의 바닥을 배웠다. - P64

그러나 객원으로서는 변변히 두각을 드러내 지 못하고 나이 들어가면서 초조해지던 때, 부상 당한 고관절과 무릎 인대가 좀체 회복되지 않는 동안 기량은 확연히 떨어지기만 하여 귀국을 선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종목만 좀 바꿔가면서 아무 스포츠나 예술 분야에 갖다 얹 어도 유사 사례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보편 적인 패턴이다. 극소수만이 정상에 도달할 기회 와 권리를 획득하며 그 이하로는 빠르게 부정과 망각의 대상이 되는. - P72

물론 다른 이들의 불운을 열거해야만 자신의 행 운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 P75

키가 자라고 만질 수도 있고 저마다의 몸에 품었던 묘 향은 극히 일부만 남은 채 개인적 특성을 지닌 냄 새를 풍기며, 무엇보다 부를 수 있는 이름을 가지 고, 이름으로 존재를 규정함으로써 원래의 존재가 내포하고 있던 수만의 속성이 축약된다는 생각에 는 미처 이르지 못한 채, 실재와 환영이 뒤섞인 길 을 떠난다. 세상의 물결에 속해 흐를 수 있고 가끔 머물러야 할 곳에라면 고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딧불이만 한 믿음을 갖고. 그렇게 언젠가 환영 이 실재에 압살당할 때까지. - P83

그러므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습 에서 최선의 목표는 자급자족 시대를 살아본 적 없 는 도시의 소비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처음부터 끝 까지 무언가를 해보았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 P118

"그래도 일단 갖고는 있으려고요. 생각해보면, 이제 아이가 없다고 해서 하던 작업을 중단한다는 게,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누구도 신지 않을 것,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더는 쓸데 없어진 것이라는 이유로, 아름답게 완성시키면 안 되나?" - P141

이후 시인의 어머니, 노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여인을 본 뒤 안은 오래전 그녀를 보낸 자신의 선 택이 더욱 옳았다고 여긴다. 점유할 수도 당겨 쓸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인 간과 인연을 맺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고.
그럼에도 그 무의미를 선택한 미아에게 자신은 무 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남아 있는 날 들의 목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 P110

꽃받침에 아무리 단단히 매달리더라도 길어야 한두 주의 유예라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이 뿜어내는 모든 것들의 유효기간이 어쩌면 이리 짧은가. - P162

이 생에서 두 번을 만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녀의 사라져가는 시간을, 닳아져가는 삶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아주어야 한 다는. 물을 머금어본 적 없이 방치되어 말라비틀 어진 씨앗 같은 기억에, 이제라도 솜을 깔고 현재 를 분무해주어야 한다는. 그 행위가 비록 무용하 더라도, 씨앗을 간직해온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예의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망각과 기억 사이에 난 미로 같은 길들을 따라 육신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응하는 일이 자신의 몫인 것만 같다. - P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월의 바다를 모텔 옥상에서 바라보는 연과 천은 숙박업소 주인과 손님으로 아무 상관없어 보이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인연이다. 연의 남편 모수는 전직 공무원이었으나 내부 고발로 면직되었고, 그 문서를 받았던 천의 연인 한나의 엑스는 아나운서 실장으로, 모수의 제보에 관한 보도를 강행하려다 좌천되었다. 한나 역시 아나운서였으나, 방송에서 웃음이 터지는 사고로 실직하고, 연극 배우인 천을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하나는 엑스의 증세가 심해졌다며 천을 떠났다. 모수는 지병으로 병원에서 사망했다.

작가가 의도하려던 ‘침잠’과는 다르게 나는 ‘다음 구름에서 쉬어가요’라는 문구를 보며 연과 천의 다음 미래가 평안하고 고요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격동의 인연을 지나간 그들에게 찾아올 휴식을 말이다.

임계점을 지나 한번 무 너지기 시작하면 모든 것은 한꺼번에 급격하게 예 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무너진다. 인간의 몸도 인 간의 마음도 인간의 도시도 그럴 것이다. 마침내 인간이 없는 세상조차도. 그런 세상에는 ‘무너지 다‘라는 단어조차 없겠지만. - P47

어쨌든 왕은 선택해야 했어요. 삶으로 돌아가 서 삶을 긍정하고 진실의 일면만을 보고 살 것인 가, 죽음을 택해서 삶을 부정하고 진실의 온 모습을 볼 것인가. - P54

한나는 예술가가 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 각했고 그것은 진심이었다. ‘나는 예술가를 좋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 예술가는 인간과 세계 를 더 잘 이해할 것 같지만 실은 정반대니까. 그렇
•다는 것을 한나는 알고 있었다. 예술을 통해 인간 과 세계를 폭넓게 이해하기는커녕 몰이해만이 깊 어질 수도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자신의 작업 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 감각하지만, 그 와 동시에 자신의 자아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 에 대해 말하고 자신을 주장하는 것에 익숙해진 다. 그들은 자신의 말과 작업에 쉽게 몰두한다. 몰 두하고 도취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듯이. 그런 몰 두와 도취 때문에 그들은 몰이해의 늪에 빠진다.
실은 예술가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나는 생각했 다. 정치가도 논객도 비슷하다. 토론을 하고 논쟁 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외치지만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하는 당사자들에게 토론이나 논 쟁은 뜻밖의 영향을 미친다. 주장하고 논쟁하고 선언하고 공격하고 설복시키려는 사람들은 논쟁 이나 싸움을 통해서 지혜로워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입장과 논거의 포로가 된다. 끊임없는 확 증편향과 증오의 감정과 상대를 부정하는 논리의 개발에 골몰한다. 그들은 점점 진실에서 멀어진 다. 한나는 이런 것이 자신의 ‘입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 P107

해안선 침식에 관한 뉴스를 전하면서 앵커는 해
안선은 원래 변해가는 것이고 그것이 정상이라는 기상청의 설명을 덧붙였다. 바다가 해안선을 잠식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며 수온이 올라가면 오히려 새로운 어종이 나타나 어획량 이 늘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북방에서는 새 로운 농업과 산업이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 이 이어졌는데, 이 모든 멘트는 최근에 사장이 바 뀌면서 보도 기조가 바뀐 결과였다. 아나운서는 울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는 것을 그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입이 씰룩거 리며 무언가 다른 말이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 P110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에서." - P1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