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리커버)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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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도 집다운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늘 보통의 집이라고 하는 아파트, 단독주택, 빌라 같은 형식을 벗어난 독특한 형태의 집에서 살아왔고, 그런 결핍으로 인해 나는 안정적이고 안락한 분위기의 거주형태를 갈망하고 산다.

작가는 초등학교에서 ‘너 어디 사니?’라는 질문을 계기로, 사는 곳이 계급을 상징하는 기준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부유하게 태어나 자연스럽게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사회에 편승해 자본주의의 구성원이 되는 과정을 볼 듯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찾아온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가난해졌고,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에 상경하면서 빈부격차를 더욱더 현실감 있게 체험하며 빈곤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처음엔 낯선 부잣집 딸내미의 배부른 삶의 애환을 들어줘야 하는 책인가 싶었지만 이내 곧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월세나 전세로 원룸과 투룸을 전전하며 살아가던 나의 20대, 그곳에서 타의로 이룬 자립. 아등바등.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흔한 고통이지만 드러내기는 차마 부끄러운 처지를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작가가 좋아지고 글을 대하는 나의 감정도 달라진다.

집이란 것은 좋은 점만 보자면 한없이 자랑만 할 수도 있고, 안 좋은 점만 보자면 끝도 없이 불평만 늘어놓을 수도 있다. 안목이 좋았는지 생각이 긍정적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자신이 거쳐온 어떤 집이든 그 대상을 ‘친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어떤 형태든 집은 나의 은신처고 삶을 지탱해주고 살아가는 힘을 충전하는 곳이니까.

일곱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지만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가 말년에 살던 마르탱의 오두막은 네 평이었고,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은둔의 장소로 삼았던 월든의오두막도 비슷한 크기였으니 불만스러워할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원룸은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엘리베이터와주차장, 외부 도어락과 빌트인 가구의 혜택까지 누릴 수 있었다. - P55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자취방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포클레인이 밀어버릴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신림동의 일곱 평짜리 원룸은 마포의 아파트와 난곡의 판자촌 중 어디에 더 가까울까? 아무리 노력해도 한강 전망의 브랜드 아파트가 대변하는 삶에 진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노력을 게을리하면 도시 빈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달동네 판자촌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난곡의 안쪽을 바라볼 때마다 ‘여기‘가최악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저기‘로 굴러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저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저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서나마 쫓겨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그 절박함 앞에서 느끼는 안도와 불안이 부끄러웠다. - P59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동네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 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나는 매사에 ‘내돈을 써야 하는 일인가만 생각하는 사람, 폭력적인 시선으로남을 쳐다보는 사람, 남의 차에 가래침을 뱉는 사람,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쓰는 사람이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어떤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끝내 화만 남은이들에게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이웃들을 좋아할 수 없었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다. - P84

"이제 나도 서른이니까."
동생의 책상 위에는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이 놓여 있었다. 나는 동생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때 서른 살은 온다"는 구절을 읽고 그런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짐작했다. 왜 그런지 동생의 회사에 찾아간 날이 떠올랐다. 나는 로비에서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의 인테리어도,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근사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쪽으로 걸어오는 동생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슬립 드레스에 디자이너 브랜드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동생이 그 장소에 잘 어울려 보이는 데 안도하면서도 그 아이가 매일 느낄 괴리감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려한 사람들로가득한 건물을 빠져나와, 만원 전철을 타고, 어둡고 가파른 골목을 걸어올 때의 기분을. 그동안 동생은 누구에게도 우리의 남루함을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따로 살자."
우리는 이 집에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없"는 시간을 너무 오래 보낸 것이 아닐까? - P86

그녀는 혼자 원룸-방에 사는 것 같지만 남편과 아이가 있고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 있다. 여자는 남편이 출근한 뒤에 방으로 가고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흐르고 아내가 다른 공간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남편이 여자를 미행하여 방에 들이닥친다. 그리고 혼자 사는 여자들이 안전을 위해 흔히 그러듯 현관에 놓아둔 남자의 구두를 본다. 남편은 아내의 외도를 확신하지만 그곳은 자기만의 공간과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여자의 ‘자기만의 방‘일 뿐이다. ‘집’은 여자가 가사 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는 공간, 독립과 자유의 실현을억압하거나 최소한 보류하게 만드는 장소다. 그녀가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지적 갈망을 충족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곳은 집이 아니라 ‘방‘이다. 여자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에서 끊임없이 읽고 쓴다.
여자가 집 바깥에 마련한 자기만의 방이 서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읽는 것은 다른 삶, 다른 사유, 다른경험을 흡수하는 일이다. 과거에 여성은 아버지, 남편, 오빠 같은 남성 가족이 허용한 책만 읽어야 했고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성이 여성의 독서를 불온하게 여겼던 이유는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을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책은 전복적 세계, 또는 세계의 전복을 꿈꾸게 만든다. - P133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인테리어 업체에 의뢰하는 대신 각 시공마다 개별적으로 인력을 섭외하기로 했다. - P153

학교가 가까워지자 아빠가 물었다.
"좀 떨어진 데 내려주는 게 좋겠지?"
"왜? 학교 앞에 내려줘."
아빠는 내 대답에 흐뭇한 표정이었다. 학교 앞 사거리에서신호를 기다리며 그가 말했다.
"며칠 전에 재경이도 학교에 데려다줬는데 이 녀석이 멀리떨어진 골목에서 내려달라는 거야. 화물차 타는 걸 친구들이 보는 게 싫었나 봐."
장난기가 발동한 아빠는 동생의 속내를 모르는 척 정문에내려주겠다고 했고, 당황한 동생이 거듭 사양하면서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일로 장난치는 아빠가 좀 어이없었다. 아빠는 동생의 표정이 떠올랐는지 쿡쿡 웃더니 기쁜목소리로 말했다.
"재영이는 착해서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지."
물론 나는 화물차를 운전하는 아빠가 부끄럽지 않았다. 착해서가 아니라 직업의 귀천을 따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워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도 아빠는 우리가 함께 살던 시절의 몇 가지 일화를 근거삼아 나를 ‘착한 딸’이라고 확신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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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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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인간들은 다들 미쳤다. 작가가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ADHD가 아닌 사람들을 다 정상범주에 넣어버리는 것은 지나친 과오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조금 불편했던 점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표현 자체다. 그렇다고 이를 ADHD와 비(非)ADHD라고 구분하기에는 억지스럽지만, 내가 보기엔 ADHD도 보통의 삶에 안착해 있는 정상인이다. 인격을 재단하는 것은 누구도 함부로 시도해선 안 되는 영역이다. ADHD를 이해했다느니 응원한다느니 같은 감상은 주제넘어 보인다. 그 자체로 인정하면 될 일이다. 세상엔 우리가 반대하고 싸워야 할 일(차별? 편견? 격차?)이 무수한데, 타인의 산만한 행동 같은 것들을 지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내가 ADHD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성찰하거나, 보듬어 줄 수 있는 책이다. 거기다 유난히 두드러지는 재능인 ‘글발’ 덕에 통렬하게 유쾌하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우리의 자기반성을 위해서든, 자존감을 위해서든.

세상에는 ‘네가 무엇이든 소중하고 아름답다‘라는 식의 낙관이 유행했지만 내게 적합한 안심은 아니었다. - P10

나는 차라리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상투적 표현을 감투처럼 뒤집어쓰기로 했다. 스스로를 바꾸자 와닿지 않았던 충고들도 전부 새로워졌다.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너무 흔해서 모욕적이기까지 했던 위로들이 생동감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지거나 걱정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지지 않을까? 이렇게까지 걱정할 일일까?‘ 내게 반복해 물어볼 순 있었다. - P18

심리 테스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스스로를 모르니통계로 정의되길 갈망하는 것이다. - P20

짝사랑은 슬픈 것이지만 상호 혐오라면 해피 엔딩이라고 본다. - P24

나는 홀로 있을 기회로부터 도망쳤어야 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요양이 아니라 고립이었다. 전에는 ‘혼자‘라고 느껴도 군중 속의 고독이었는데 이젠 진짜 물리적으로 혼자인 거였다. 내가 생각보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못 보게 되니 그리워진 심보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외로웠다. 지루했고 고루했고 기약이 없었다. - P46

소주 기준 두 병을 넘기면 자기 고백 욕구와 과잉된 감성이 흔든 콜라처럼 터지곤 했다. - P58

나는 장래희망이 가난뱅이인 사람처럼 돈을 쓴다. 저축도 없고 저축없이 승승장구할 묘수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지출한다. - P78

공동생활에서 끊기는 건 늘 나의 인내심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인간관계도 끊기게 되니까 나는 혼자 사는 게 나았다. 실제로 혼자 살고 있는 지금 부모님과 자매들을 훨씬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이 변했다. 어떤 사랑은 거리감에서 온다는 걸, 아니 거리감에서만 온다는 걸 독립으로 배운 셈이다. - P86

누군가 이토록 예민하다는 건, 그가 늘 화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 P88

누군가 내게 "넌 정말 싸가지가 없어."라고 하면, 나는 슬퍼하는 대신 이렇게 생각한다.
"한 발 늦었어요. 그 사실은 29년 전의 제가 먼저 발견했답니다. 아직 저의 고향이 엄마 배 속이던 시절에 말이지요."
그러면 욕을 먹고도 윙크할 수 있는 기분이 된다. 약간의 유머를 더하면 변형도 가능했다.
"저는 싸가지만 없는 게 아니에요. 집중력도 없고 기억력도 없지요. 두 사실을 조합하면 님이 지금 하는 말에 집중하고 오래 기억할 수도 없다는 얘기랍니다." - P90

행복을 정의하지 말고 행복해지려는 노력이 뭔지 정의하자는 뜻이다. - P100

어쩌면 난 성숙함 자체보단 ‘성숙해지고 있다‘라는 미래지향적 환상에 집착 중인지도 모른다. - P151

흔한 말로 가족을 둥지라고 한다. 흔한 표현은 싫지만 아직 ‘둥지‘만큼 멋진 두 글자를 찾지는 못했다. 엄마 아빠는서른을 앞둔 내게 아직도 훌륭한 둥지였고, 때문에 난 독립된 세계를 홀로 꾸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 P161

내가 단순히 흥미를 위해 고양이를 들이는 건 아닐까?
고양이가 계속 내 흥미를 끌어 주지 못하면 내가 맷돌이를 짐짝처럼 여기게 되지 않을까? 맷돌이가 갑자기 죽으면 나는 어떡하지? 못난 생각들이 반죽처럼 뒤섞였고 어떤 빵으로도 구워지지 않았다. 맷돌이를 생각하면서도 실은 내 처지만 첨예하게 궁리하고 있었으니, 그때까지의 나는 이타적이고 싶은 이기적인 사람에 불과했다. - P167

많은 인연을 떠나보내며 느낀 건 사람에 대한 기대를 거두어야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 P168

그러나 같이 산다는 건 매일매일 환상을 깨부수겠단 결심이어서, 나는 곧 맷돌이의 잔악한 두 얼굴을마주하게 되었다. - P173

그래서 타인은 지옥이고 내가 선의의 피해자였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피해자는 역시 내 지인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슬프게도, 수없이 지적당해 외울 지경인 스무 가지 증언들은 거의 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되갚지 못할 남의 인내를 마구 끌어다 쓰는 게 감정적 사채 빚과 같다는 걸 몰랐다. 관계라는 게 그렇다. 상대방이 양보할수록 내 삶은 편안해진다. 나의 패착은 편안함을 느낄 때마다 착취적으로 굴었다는 데 있었다. 한 개를 내어 주면 두 개를 달라고 하고, 두 개를 받아 낸 후엔 세 개를 취했다. "멀쩡한 네가 나 좀 참아줘." 이런 바람을 은연중에 보였는지도 모른다. - P209

그러면 나는 누구의 사랑과 이해를 받아야 할까? 대체누가 이다지도 엉망인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 줄까. 심지어 내게 이용되길 원하면서도 무보수에 동의하는 사람이어야했다. 부족한 나를 발전시키려 들지 않고 오히려 보존하려 애써 주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완전무결의 상냥함이다.
모든 조건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래도 적합한 사람 하나를 알긴 알았다. 그는 본인의 결심만 선다면 요구받은 것보다 내게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를 최고 등급의 행복으로 적시고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위로와 응원을 퍼부어 줄 수도 있다. 그가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렇게 멋진 사람이 지금껏 나를 외면했던 이유는, 내가 그를 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치 있는사람이라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사는 내내 그 애를 배척하고 흠잡아 오지 않았던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들어도 들어도 직접 발음하긴 어색한 이름을 불러 본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명치에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건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유대감과 충족감이다.
내가 부른 이는 나다.
결국 나에겐 나만이 유효하고 고유하다. 나는 너무 나답게 아름다워서 모든 타인에게 해석에 대한 실패를 주었다. - P223

수치스러울 때는 수치에 솔직해지는 게 낫다. - P234

혹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자존감까지 결여된 주제에 음침하게 관종요소를 갖춘 이들이 ADHD를 싫어한다면, 그건 놈들이 우릴 부러워한다는 뜻이다. 그런 이들과는 상종을 말고 멀리하자.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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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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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를 풍미했던 하위문화들을 기록하기 위해 반드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책.

다만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나’의 살인미수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태리의 공갈 협박죄는 그가 살인미수 피해자이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희영은 정말 친구들을 조종해 이용해 먹는 아이인가. 윤도는 그저 호색한에 불과했나.

나는 이 책을 사자마자 읽고 바로 알라딘 중고로 팔아 버렸다. 박상영의 책을 모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지만, 이 책은 잘 모르겠다…

그때, 그 눈물의 시간을 통해 무늬는 진심이라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어떤 형체가 실은 매우 연약하다는 진리를 배웠다. 나미에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경했고 무늬는 결심했다. 할 수 있는 한빨리 서울로 갈 것이라고. 그저 부모님만의 기대에 불과했던 특목고,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외고 진학이 이제는 무늬 본인에게 더 간절한꿈이 되었다. - P85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모든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조리 쏟아내 죄책감을 떨쳐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나는 언제나 침묵해버리는 사람이니까.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상처를 썩혀버리는 종류의 사람이니까. 그것이 내 삶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지만, 내 유일한 삶의 방식을 바꿀 수는 없었다. - P240

윤도는 쑥스러운지, 아니면 정곡 찔려 기분이 상한건지 별다른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영화가 다 끝날 때쯤 윤도가 내게 말했다.
"우리도 같이 이과수폭포에 가자."
윤도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 거니. 윤도는 나를 목마른 사람처럼 만든다. 자꾸만 기대를 하게 만든다. 보고 있어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윤도는 내게 좋은 사람일까.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게 마땅할까. 믿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지만 나는 자꾸만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싶어진다. 번번이 실망하게 될 걸 알면서도 바보같이 또 기대를 하고 마는 나를 더 미워하게 된다. - P263

생각해보니 윤도와 태리를 신경쓰지 않기위해 공부로 도피한 결과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일지도 몰랐다. 커다란 고민에 맞닥뜨렸을 때 충실히 고민하는 대신, 일상의 과업들로 도망쳐버리는 사람. 그렇게 함으로써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다잡고 기어이 모든 감정을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리는 사람. 바꿔말하자면, 한국의 시험이라는 것은 무감각한 기계가 될수록 유리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실연의 아픔을 겪은 뒤 전교 1등을계속 유지하는 무늬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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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내 마음 돌보기
안주연 지음 / 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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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검열이나 완벽에 대한 강박 같은 개인적 차원의 자기학대, 성과주의나 열정페이 같은 부조리한 사회시스템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로를 ‘번아웃’이라는 용어로 재정의했다. 그간 ‘힐링’, ‘공정’, ‘정의’라는 키워드로 출간된 책들을 다시 한번 복습할 겸 읽어볼 만하다.

둘째, 최선을 다해서 원하는 성과를 내는 것만이 바람직한 삶의 길일까요? 우리 삶에는 우연이나 환경 등 수많은 변수가 개입합니다. 어떤 일을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설사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다른 노하우를 익히거나, 새로운 방향을 찾거나, 깨달음 또는 통찰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실패하면서 자신에 대해 알게 되거나 내면이 더 단단해지기도 합니다. 일이 안 풀릴 때 오히려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기도 하고요. 즉 우리 삶에는 계획한 대로 일을 하는 것 외의 다양하고 소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경쟁적이고 성과 중심적인 사회는 실패해도 굴하지 말고처음에 목표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꾸준히 노력하라고 등을 떠밉니다. 그리고 급기야 ‘마땅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열심히 한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이댑니다. - P22

우리는 워커홀릭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중독자‘ 혹은 ‘워커홀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꽤있었습니다. 열정적으로 회의하고 야근하는 모습을 이상적으로그리는 광고도 많았고요. 이런 모습이 마치 현대적이면서 자기삶을 주도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열정적으로 일하는 건멋지고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한데요. 사회적 압력에 따라 반드시그래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 P24

불안과 강박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우선 예기불안이라는 게 있습니다. 예측하고 기대해서 불안해지는 것을 말하는데요. 예를 들어 내일 중요한 시험이나 발표가 있으면, 그걸 미리생각하면서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죠. 시험이나 발표 당일에도 분명 불안을 느낄 텐데, 미리 예측하고 걱정하며 불안을두세배로 느끼는 셈입니다. - P37

인도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 Krishnamurti는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 건강의 척도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번아웃은 개인의 취약함이 아닌 직무나 사회환경의 문제입니다. - P50

사회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지 말고, 팍팍한 기준에 맞추어 노력해야만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입을 막았잖아요. 그렇게 힘들게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는데 이제는 직장이 문제입니다. 지치네요. 사회가 바뀔 수 있기는한가요? 사회를 바꾸려는 생각 자체가 불온한 것일까요? - P53

그리고 번아웃을 일으키는 주범인 ‘과로 권하는 사회’와 가시적인 효율만 강조하는 기업과 경영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문제의식도 계속 표현하면 좋겠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도나누고요. 한국의 직장문화에서 회사나 상사에게 바로 불만을 표현하거나 시정을 요구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되었다‘라는 개개인의 문제의식이 모이면 직장 분위기가 바뀌고, 결국은 이것이 사회를 변화시킨다고생각합니다. - P54

우리는 잘못된 각도에서 문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매슬랙교수는 세계보건기구가 번아웃을 병을 일으키는 위험 인자로 분류한 것을 걱정합니다. "세계보건기구가 번아웃을 질병으로 분류한 것은 회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잘못되었다는 정의를 제공하려는 시도였다"라고 설명합니다. 번아웃이 질병으로 분류되면 사람들은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고 여기고, 그 문제의 원인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사람을 번아웃으로 몰아간 환경, 즉 고용주나 조직의 책임이 아니라 한 개인의 문제가 되고 말죠. - P58

슬픈 현상이 계속됩니다. 우리는 여가 활동(좋은 것)을 하면불안해지고, 과로(나쁜 것)를 하면 필요한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만족감을 느낍니다. 친구나 애인을 만나 수다를 떨고 좋은 시간을 보내면 피로가 풀려 기분이 좋았다가도, 사람들과 헤어지고집에 돌아오면 다시 우울해집니다. 노느라 시간을 낭비한 것 같고, 다른 필요한 일을 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거죠. 반대로 공부를 하거나 과로하면 힘이 들지만, 힘든 일을 하고 나면오히려 기분이 좋고 무언가를 성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현상이 심각해지면 한시도 쉴 수 없게 됩니다. 쉬면서도 기분이 나쁘니까요. 이럴 경우 우리 몸의 스트레스 관리 시스템이나 감정 조절 시스템도 고장 나기 쉽습니다. - P63

누구에게나 자아 성찰은 필요합니다.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지난 하루가 어땠는지 되새겨보는 일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죠. 다만 자아 성찰은 어떤 일이 끝나고 몰입에서 빠져나온 후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스스로를 감시하는 CCTV가 되어실시간 자기검열을 하면 문제가 됩니다. 이런 검열이 오래 지속되거나 과도해지면 시시각각 시험을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매일 나를 평가하는 심사위원이 있는데, 그 심사위원이 바로 나자신인 거예요. 도저히 떼어버릴 수가 없죠.
관찰자아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경험자아에 쓸 힘이 부족해집니다. 경험 자체에 집중하기 어려워지니 감정을 생생히 느끼지못합니다. 무언가를 할 때마다 잘하고 있는지를 자꾸 생각하니까요. - P67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매우 중요합니다. 젠더감수성이나 인권감수성이 낮은 사회는 구성원들을 피로하고 지치게 만들고, 이런 사회에서는 혐오도 불평등도 차별도 많죠. 최근 뉴스를 보면감정적으로 지치는 날이 많지 않나요? 특히 젊은 세대는 이런 사회 분위기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 P71

이런 개인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스트레스는 말 그대로 자극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자극이든 나쁜 자극이든 모두스트레스라고 지칭하고, 이로운 스트레스(유스트레스 eustress)와 유해한 스트레스(디스트레스distress)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나쁜 일은 아니지만 비교적 긴장이 되는 새로운 일, 예를 들어 연애를 시작하거나 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스트레스입니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남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도 모두 스트레스고요. - P82

저와 같이 번아웃에 대해 강의했던 심리학자 선생님이 청중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몇 퍼센트나 와 있나요?" 사실 강연장에, 학교에, 회사에 내가 온전히 다 와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몸만 와 있기도 하고집에 나 자신을 10퍼센트정도 남기고 온 경우도 있고요. 잔업을생각하면서 회사에 나를 남기고 퇴근하기도 하고, 내일 시험을 걱정하면서 학교에 남아 있기도 하고, 친구랑 연락을 주고받다가 알 수 없는 일로 찝찝하게 끊겼다면 거기에 15퍼센트 정도 가있기도 한다는 거죠. 물론 늘 100퍼센트 지금 여기에 충실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많고 걱정에 얽매여 있을 때는 몸을환기해주고, 감정이나 느낌, 신체에 집중하며 신경을 활성화하면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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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지돈 지음, 윤예지 그림 / 마음산책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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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잡다한 하위문화를 수집해다가 부지런히 써먹는 작가

집 전체를 가득 채우는 책장과 책장과 책장 사이를 오가며 새롭게 추가된 책과 사상, 사회현상과 예술적 아이디어에 따라 그만이 알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연결은 비약이 심하고 억지스러웠으며 가끔 민망할 정도로 야심만만했다.
그는 자신의 연결이 지닌 가치를 과대평가했다. - P60

비혼주의야?
무슨 주의 같은 건 우스워. 그냥 생각이 없는 거야. - P95

희정은 지금도 가끔 말한다. 정말 친구지만………… 친구라고할 수 있을까? 어릴 때 친구들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자라기 이전에, 사고와 취향과 생활환경이 굳기 이전에만난 이들과 우정이라는 명목으로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있을까. 어릴 때 우정이 진짜 우정일까. 어쩌면 우정이나 애정 같은것들은 일종의 유사성을 나누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그런 면에서 희정과 나 사이에는 더 이상 나눌 유사성이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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