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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리커버)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생각해 보면 나도 집다운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늘 보통의 집이라고 하는 아파트, 단독주택, 빌라 같은 형식을 벗어난 독특한 형태의 집에서 살아왔고, 그런 결핍으로 인해 나는 안정적이고 안락한 분위기의 거주형태를 갈망하고 산다.
작가는 초등학교에서 ‘너 어디 사니?’라는 질문을 계기로, 사는 곳이 계급을 상징하는 기준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부유하게 태어나 자연스럽게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사회에 편승해 자본주의의 구성원이 되는 과정을 볼 듯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찾아온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가난해졌고,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에 상경하면서 빈부격차를 더욱더 현실감 있게 체험하며 빈곤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처음엔 낯선 부잣집 딸내미의 배부른 삶의 애환을 들어줘야 하는 책인가 싶었지만 이내 곧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월세나 전세로 원룸과 투룸을 전전하며 살아가던 나의 20대, 그곳에서 타의로 이룬 자립. 아등바등.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흔한 고통이지만 드러내기는 차마 부끄러운 처지를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작가가 좋아지고 글을 대하는 나의 감정도 달라진다.
집이란 것은 좋은 점만 보자면 한없이 자랑만 할 수도 있고, 안 좋은 점만 보자면 끝도 없이 불평만 늘어놓을 수도 있다. 안목이 좋았는지 생각이 긍정적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자신이 거쳐온 어떤 집이든 그 대상을 ‘친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어떤 형태든 집은 나의 은신처고 삶을 지탱해주고 살아가는 힘을 충전하는 곳이니까.
일곱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지만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가 말년에 살던 마르탱의 오두막은 네 평이었고,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은둔의 장소로 삼았던 월든의오두막도 비슷한 크기였으니 불만스러워할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원룸은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엘리베이터와주차장, 외부 도어락과 빌트인 가구의 혜택까지 누릴 수 있었다. - P55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자취방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포클레인이 밀어버릴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신림동의 일곱 평짜리 원룸은 마포의 아파트와 난곡의 판자촌 중 어디에 더 가까울까? 아무리 노력해도 한강 전망의 브랜드 아파트가 대변하는 삶에 진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노력을 게을리하면 도시 빈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달동네 판자촌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난곡의 안쪽을 바라볼 때마다 ‘여기‘가최악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저기‘로 굴러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저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저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서나마 쫓겨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그 절박함 앞에서 느끼는 안도와 불안이 부끄러웠다. - P59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동네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 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나는 매사에 ‘내돈을 써야 하는 일인가만 생각하는 사람, 폭력적인 시선으로남을 쳐다보는 사람, 남의 차에 가래침을 뱉는 사람,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쓰는 사람이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어떤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끝내 화만 남은이들에게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이웃들을 좋아할 수 없었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다. - P84
"이제 나도 서른이니까." 동생의 책상 위에는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이 놓여 있었다. 나는 동생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때 서른 살은 온다"는 구절을 읽고 그런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짐작했다. 왜 그런지 동생의 회사에 찾아간 날이 떠올랐다. 나는 로비에서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의 인테리어도,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근사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쪽으로 걸어오는 동생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슬립 드레스에 디자이너 브랜드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동생이 그 장소에 잘 어울려 보이는 데 안도하면서도 그 아이가 매일 느낄 괴리감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려한 사람들로가득한 건물을 빠져나와, 만원 전철을 타고, 어둡고 가파른 골목을 걸어올 때의 기분을. 그동안 동생은 누구에게도 우리의 남루함을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따로 살자." 우리는 이 집에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없"는 시간을 너무 오래 보낸 것이 아닐까? - P86
그녀는 혼자 원룸-방에 사는 것 같지만 남편과 아이가 있고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 있다. 여자는 남편이 출근한 뒤에 방으로 가고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흐르고 아내가 다른 공간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남편이 여자를 미행하여 방에 들이닥친다. 그리고 혼자 사는 여자들이 안전을 위해 흔히 그러듯 현관에 놓아둔 남자의 구두를 본다. 남편은 아내의 외도를 확신하지만 그곳은 자기만의 공간과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여자의 ‘자기만의 방‘일 뿐이다. ‘집’은 여자가 가사 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는 공간, 독립과 자유의 실현을억압하거나 최소한 보류하게 만드는 장소다. 그녀가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지적 갈망을 충족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곳은 집이 아니라 ‘방‘이다. 여자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에서 끊임없이 읽고 쓴다. 여자가 집 바깥에 마련한 자기만의 방이 서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읽는 것은 다른 삶, 다른 사유, 다른경험을 흡수하는 일이다. 과거에 여성은 아버지, 남편, 오빠 같은 남성 가족이 허용한 책만 읽어야 했고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성이 여성의 독서를 불온하게 여겼던 이유는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을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책은 전복적 세계, 또는 세계의 전복을 꿈꾸게 만든다. - P133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인테리어 업체에 의뢰하는 대신 각 시공마다 개별적으로 인력을 섭외하기로 했다. - P153
학교가 가까워지자 아빠가 물었다. "좀 떨어진 데 내려주는 게 좋겠지?" "왜? 학교 앞에 내려줘." 아빠는 내 대답에 흐뭇한 표정이었다. 학교 앞 사거리에서신호를 기다리며 그가 말했다. "며칠 전에 재경이도 학교에 데려다줬는데 이 녀석이 멀리떨어진 골목에서 내려달라는 거야. 화물차 타는 걸 친구들이 보는 게 싫었나 봐." 장난기가 발동한 아빠는 동생의 속내를 모르는 척 정문에내려주겠다고 했고, 당황한 동생이 거듭 사양하면서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일로 장난치는 아빠가 좀 어이없었다. 아빠는 동생의 표정이 떠올랐는지 쿡쿡 웃더니 기쁜목소리로 말했다. "재영이는 착해서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지." 물론 나는 화물차를 운전하는 아빠가 부끄럽지 않았다. 착해서가 아니라 직업의 귀천을 따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워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도 아빠는 우리가 함께 살던 시절의 몇 가지 일화를 근거삼아 나를 ‘착한 딸’이라고 확신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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