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에 대하여 - 지금, 깊은 상실을 겪고 있는 당신에게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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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똑똑한 사람들도 슬픔 앞에서는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슬픈 감정도 절망한 상태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누군가를 잃는 슬픔은 잔인한 종류의 배움이다. - P14

슬픔은 내게 새로운 거죽을 씌우고 눈에서 비늘을 벗겨 낸다. 나는 과거의 확신들을 후회한다. 너는 물론 애도하고, 이야기로 풀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돌파해야 해. 아직 진정한 슬픔에익숙하지 않은 자의 우쭐대는 확신이었다. - P23

너무 깊게 생각할 엄두를내지 않는다. 안 그랬다가는 고통뿐만이 아니라 숨 막히는 허무주의에 질 테니까. 아무 의미도 없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아무것에도 아무런 의미도 없어, 라는 생각의 반복. 나는 의미가있길 바란다. 설사 지금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내가 모르더라도. 현실 부정에는 품위가 있다는축스 오빠의 말을 속으로 되뇐다. 이 현실 부정,
이 외면은 피난처다. - P24

나는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닌다. 친절한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사실을 안다고 해서 상처를 덜 받지는 않는다. - P36

"그 사람은 좋은 선생이 아니구나. 문제를 못 풀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모른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기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모를 때 모른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걸까? 아버지는 내게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했다. - P50

친구가 내 장편 소설의 한 구절을 보낸다. "애도는 사랑에 대한 찬미다. 진정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진짜 사랑을 경험한 운 좋은 사람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쓴 글을 읽는 것이이토록 고통스럽다니. - P78

나이지리아는 늘 그렇듯이 모든 일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든다. 다채로운 무능이 사방으로 사지를뻗어 사악한 광채로 모든 것을 오염시킨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환멸은 어제오늘 일이아니지만 이 정도로 강렬한 적대감은 신선하다. - P84

어떻게 자신의 무의식이 그토록 잔인하게 자기를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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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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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에겐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6살의 나이로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지네트라는 언니가 있다. 이는 10살 때 우연히 엄마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엿들으면서 알게 된다. 그런 화자는 언니를 성모처럼 신성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실체가 없는 텅 빈 형체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5살 때 파상풍으로 죽다 살아났는데, 그때 자신은 이미 죽었고 다른 사람, 글을 쓰기 위해 지난 자신의 육체를 빌려 들어온 새로운 자아라고 생각한다.
부모와는 언니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서로 과거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으며 말을 꺼내선 안 되는 비밀과 침묵으로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건 예의나 배려라기보다는 괴롭힘에 가까웠고,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남아있게 됐다.

지네트의 나이인 6살을 넘어가자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진 부모는 화자가 거북하기도, 벅차기도 했다. 지네트가 착한 딸이라고 했던 엄마의 말로 인해 ‘나쁜 딸’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화자는 6살 때까지는 부모에게 지네트를 연상하기 위한 도구로 다뤄졌다 생각한 것이다.

화자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죽은 언니의 그늘로 여기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고 깊은 원한으로 남았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담담하게 죽은 언니에게 고백한다.

지네트가 언니였다면이라는 가정은 화자에겐 고통이다. 외동을 고집했던 부모에게 둘은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부모에겐 고통스러운 언니라는 존재를 대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에 지배당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로 인정받기보다는 존재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불완전함에서 오는 결핍에 대한 분노가 응어리로 남아있다.

외동을 고집했던 부모는 꼭 외동이라는 원칙을 위해서 지네트를 슬픔에 묻어두고 비밀로 간직해야 했을까. 진실을 나누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려 소통을 포기하게 되고, 서로에게 의심스러운 추측과 그로 인한 상처만 남게 된 것처럼 보여 안타까웠다. 나 스스로 완전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를 전제해야 존재가 증명되다니, 그 자아의 공허함을 평생 고통으로 간직하고 살아야 했단 말인가.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사진이 그렇듯, 이야기의 장면도 한 곳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않습니다. - P19

난 외동딸이었기에 응석받이였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반에서늘 1등을 했어요. 말하자면, 나인 모습 그대로 살아갈권리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 P21

내게 가장 잘 맞는다고 여겨진 단어는 ‘잘 속는‘이었답니다. 치욕적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는 잘 속는 아이였어요. 그동안 착각 속에서 살았던 거지요. 난 외동딸이 아니었어요. 무에서 솟아난또 다른 아이가 있었으니까. 내가 받았다고 믿었던 모든 사랑은 가짜였던 거예요. - P25

50년대에 어른들은 아이들의 귀는 무시해도 된다고 여겼고, 단지농담의 대상인 성적인 이야기만 제외하고는 아이들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모든 걸 얘기할 수 있었어요. - P29

나는 처음부터 ‘우리 어머니‘라든가 ‘우리 부모님‘이라고 쓸 수도, 세 명으로 이루어진 내 유년의 세계에 당신을 끼워 넣을 수도, 공동의 소유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어요. - P45

침묵은 그들과 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이 나를 지켜주었어요. 가족 중에서 죽은 아이들을 숭배해야 하는 부담을 피하게 해주었으니까요. 그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알 수 없는 비참한 마음을 안겨주어요. 내가 분노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그 당사자였으니까요. - P54

‘당신‘은 덫입니다.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가진채, 역겨운 슬픔의 냄새를 풍기며 당신에 대한 가상의친밀감을 만들어내요. 나를 비난하려 가까이 다가오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믿게 하며, 당신의 죽음을 우위로 두어 내 존재 전부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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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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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느낌은 아니다. 그때의 감정을 잊지 않고 여실하게 보여줄 뿐, 무엇인가 설득하거나 어떤 감정을 이입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불륜관계를 가지고 있다. 혼자 사는 여자에게는 그 남자를 기다리고 욕망하는 일과 생각이 그녀의 삶을 차지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집을 예고 없이 드나들지 않도록 하고, 괜한 적선을 하기도 하며, 소소하게 불편하거나 짜증스러운 일상에도 불편을 느끼지 않고 그 남자만 생각하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떠올리거나 기대하며 행복해 한다.
남자가 그녀를 조심히 대하고 깊이 빠지려는 것을 자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그녀는 남자가 그녀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의 욕망을 선물로 여긴다.
여자는 그의 적당한 거리 두기에 만족하려고 하지만 내적으로 질투심과 욕망, 조바심에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러다 그가 본국인 러시아로 떠나자 그의 부재로 인한 심한 혼란을 겪는다. 그에게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쓰고, 꿈에서도 나타나고, 그와 함께했던 장소를 배회하며 공허한 기다림과 갈망의 시간을 보낸다.
시간이 지나 그에 대한 욕망이 덤덤해질 때쯤, 전쟁이 터지고 그가 잠깐 프랑스에 와서 짧은 재회의 시간을 가졌지만 꿈인 듯,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그에게 이전과 같은 과한 열정은 없다. 다만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67p.)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감정의 경험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인지, 지난 과거에 나 자신의 청승맞기도 했던 그 부끄러운 감정들이 다시 살아났다. 나만 기억하고 싶고, 남에겐 들키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인데, 그것들을 꺼내서 당신도 한번 돌아보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에 빠지는 감정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예고 없이 찾아와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순순히 굴복해 버리기도 한다. 순전히 받아들이고 내 감정을 뻔뻔하게 드러나도록 나 자신을 풀어버리면 좋겠다. 아주 단순한 열정처럼.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 P17

그는 외국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프랑스의 지적이고 예술적인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로 그다지 매료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P27

‘그 사람은 욕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하고 있잖아‘ - P29

속옷이나 구두를 보면, 예전엔 한 남자를 위해 샀지만 이젠단순히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내겐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 사랑을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저런 것들을 갖고 싶어할 까닭이 있을까? 온몸에 한기가 몰려와 숄을 둘러야 할 지경이었다.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을 거야.‘ - P48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싶었기 때문이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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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야기‘라는 욕구에 끌리고, 책은 이야기에 관한 다양한 형식(구전, 책, 영화 등등)중의 하나라고 정리한다. 책 읽는 행위는 그런 원초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행위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그 방식들 중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반복적인 행복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독서의 가장 큰 강점이다. 독서를 확장시켜 쓰기로 나아가면 뭉뚱그려진 감정과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독서는 자신의 성찰과 타인의 삶 사이에서 선택하는 과정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다는 점도 기억해둬야겠다.

다시 한번 누군가가 "이동진 씨, 왜 책을 읽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사실 제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있어 보이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목적 독서‘입니다. 그러므로그 목적이 사라지면 독서를 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지속적이지 않죠.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책을 읽는다면 책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오래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 P26

그러니까 깊이가 전문성이라면 넓이는 교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적인 영역에서 교양을 갖추지 않는다면 전문성도 가질 수 없죠. 사람들은 대체로 깊어지라고만 이야기하는데, 깊이를 갖추기 위한 넓이를 너무 등한시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국경과 시간적 제약이 점점 무의미해지는 현대에는 넓이에 주목하는 게 더욱 중요해진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넓이를 갖추는 데 굉장히 적합한 활동이 바로 독서입니다. - P33

한 번 시행하는 연극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타인이라면 다양한 상황과 특정한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주고 감정을 이입하게 해줍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 - P35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직접적인 경험이불가능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완벽하게 파악하고 예측할수 있겠어요. 인생에는 변수가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그런 변수들을 통제하고 정리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관계에 대한 문제인지, 인간이 고독을 즐길 수 없는 무능력에 관한 문제인지, 과연 어떤 문제인지를보게 해주죠. 그러니 우리는 직접적인 체험보다 책, 특히 소설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으로 삶의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됩니다. 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관한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거죠. 미국에 직접 가보고도 알수 없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죠. - P36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문학은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보통 언어는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 P36

베스트셀러들도 물론 그렇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어떤 책들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무엇이 결여되었다고 느끼는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 P44

책을 읽은 후 우리는 그냥 뭉뚱그려진 감정과 생각의 덩어리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글이나 말의 형태로 옮기지 않는 한 생각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또 표현하기 위해서라도말하고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 P55

그런데 좋은 독서를 위해서는 책을 읽는 자체가 아니라 책을읽음으로써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 그것에 주목해야 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서에서 정말 신비로운 순간은, 책에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을 때 책과 나 사이 어디인가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은 신비로우면서도 황홀한 경험입니다. - P86

줄거리 요약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든 취미로 관심이 있어서 쓰는 사람이든 너무나 많은 경우에 줄거리는 보도자료나출판사 책 소개 같은 것을 대충 베껴놓고 ‘중요한 건내 의견에 해당하는 이 뒷부분이야‘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비평을 잘하는 사람들은 줄거리를 자기화하거든요. 줄거리를 재구축하는 방식이 비평으로 들어가는 첫 단계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고요. - P123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선사시대부터있는 거잖아요. 역사도 이야기고. 한 사람이 죽으면 남기는 게 결국 이야기잖아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굉장히 듣고 싶어 한단 말이죠. - P129

현대인들이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소비하는방식은 대부분 소설 아니면 영화가 됐거든요. 두 매체가 경쟁한단 말이죠. - P130

저는 쾌락은 일회적이라고, 행복은 반복이라고 생각해요. 쾌락은 크고 강렬한 것, 행복은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에 있는 일들이라고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습관론이 나오게 되는데, 행복한 사람은 습관이 좋은 사람인 거예요. 습관이란 걸 생각해보면, 습관이없으면 사람은 자기동일성이나 안정성이 유지가 안돼요. - P150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기성찰과 반성을 위해서라는 말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깊은 방식일 수 있지만 그 역시 핵심은 아닌 것 같아요. 핵심은 그 둘 사이 어디에 있다는 거죠.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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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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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머리말에서 존 레이 박사는 이 원고를 변호사 클라크에게 받은 범죄자 험버트 험버트의 회고록이라고 밝힌다. 상당히 금기시되어있는 소재를 다뤘고, 소설에서 작가와 화자를 동일시하는 보통의 독자들(혹은 나같이 독자와 화자를 동일시하는 경우)을 고려한 장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험버트는 스위스 태생의 유복한 집안에서 유산을 물려받은 미남이다. 그는 어린 시절 이모의 친구 딸인 에너벨과 같이 뜨거운 여름을 불태웠으나 애너벨은 티푸스로 사망하고, 그의 애너벨은 그가 선호하는 ‘님펫’의 원형이 되어 이후 험버트가 소아를 갈망하는 원천이 된 듯하다.(웬만한 서술어가 피동형으로 쓰일 것 같은데 이는 소설이 독자를 관찰자로 밀어내려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험버트는 자신의 성적 취향을 (나이 차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30대가 되어서야 깨달았다고 밝힌다. 그는 물론 또래의 여성과 결혼을 했다. 발레리아라는 폴란드인 의사의 딸이었는데, 4년 결혼생활 후 험버트의 이모부가 막대한 재산을 험버트가 미국으로 와서 사업을 경영하는 조건으로 남겨, 그는 발레리아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절차를 밟아가던 중에 발레리아가 러시아 퇴역장교와 외도한 고백을 듣게 되고, 둘은 이혼해 험버트 홀로 미국으로 오게 된다. 험버트는 뉴욕에서 신경쇠약에 시달리기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의사들을 기만하기를 일삼고, 북극을 탐험하러 가는 등의 생활을 보내다 회사의 직원이 여름 휴가기간 동안 자신의 친척 맥쿠씨 집에서 요양할 것을 제안해 그곳으로 떠나지만, 맥쿠씨의 집이 화재가 나 맥쿠부인의 친구인 샬럿의 집을 소개받는다. 그는 그곳을 바로 벗어나려 했지만, 샬럿의 딸인 로(롤리타)를 보자마자 그 소녀에게 사로잡혀 샬럿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다. 험버트는 로를 지속적으로 염탐하지만 험버트에게 관심이 많은 샬럿은 험버트를 딸의 위험요소로 생각하지 않고 되려 로이를 서로 험버트의 애정을 차지하려는 경쟁자로 인식했다. 샬럿은 로이를 캠프Q에 데려다주면서 험버트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며, 자신과 결혼하여 로의 아빠가 되든지 뉴욕으로 돌아가든지 선택하라는 편지를 남겼고, 험버트는 이 제안을 로를 좀 더 가까이서 추행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샬럿과 결혼한다. 하지만 샬럿은 로를 기숙학교에 보내 험버트와 단둘만의 결혼생활을 계획하고 있었고, 험버트는 이 문제의 상황을 해결할 궁리를 한다. 하지만 샬럿이 험버트의 서랍을 뒤져 그의 본심이 탄로나고, 샬럿은 험버트에게 당장 램스데일을 떠나라고 하며 이 상황을 고발하는 편지를 붙이러 가는 길에 차 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험버트는 이를 기회로 캠프Q로 달려가 엄마가 아프다는 핑계로 로를 캠프에서 빼내고, 이미 죽은 엄마의 병원으로 가는 길에 모텔에서 로와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험버트는 성행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어린 소녀의 육체를 탐하는 욕망만을 가지고 있었다. 로에게 수면제를 먹여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려 계획했지만, 로에게 수면제가 잘 먹히질 않았고, 아침에 한 침대에서 눈을 뜬 험버트는 자는척하며 로의 반응을 지켜보았는데, 로는 되려 그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험버트에게 다가가 접촉한다.

정신병자의 회고록이라 자기 합리화로 보이지만, 험버트의 ‘진술’에서 로는 성에 일찍 눈을 뜨고 험버트를 상대로 자기 욕구를 채우는 소녀로 묘사된다. 험버트가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후반에 소설의 반전이 일어나듯이, 로는 험버트를 조종하고 이용하고 있었다. 험버트는 그날 아침 로에게 샬럿의 소식을 전했고, 로에게 의지할 것이라고는 험버트만 남은 상황에 험버트는 아주 손쉽게 로를 차지하다.

험버트와 로는 그길로 함께 미국을 여행한다. 그 과정에서 험버트는 롤리타가 자신이 욕망했던 예쁘장한 인형이 아니라 예민하고 변덕이 심한 사춘기의 소녀라는 것도 깨닫는다. 로가 성질을 부리면 감화원에 보낸다고 위협하며, 자신과 함께하는 자유를 계속 만끽하고 싶다면 자신을 따르라는 가스라이팅도 일삼는다.

‘미성년자인 네가 고상한 모텔에서 어른의 윤리의식을 흔들어놨다고 고발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자. 그때 네가 경찰한테 내가 너를 유괴하고 강간했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 ...... 그럼 나는 감옥으로 가는 거야. 그래, 가지 뭐. 그런데 고아인 너는 어떻게 될까? ...... 물론 전망이 좀 어둡긴 해. 미스 팔렌처럼 근엄하면서도 훨씬 더 완고하고 술도 안 마시는 아줌마가 네 립스틱이랑 예쁜 옷들을 압수하겠지.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고! ...... 만약 우리 사이가 들통난다면 너는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나서 공공시설에 수용될 거야. 귀염둥이야, 그게 결말이란다. ...... 이런 상황이라면 아빠 곁에 있는 편이 낫지 않겠니, 돌로레스 헤이즈?’(240-241p.)

어느 날 갑자기 로와 자신의 법적 관계가 염려스러웠던 험버트는 로를 동부로 데려와 비어즐리 사립학교에 입학시킨다. 로는 학교에서 연극도 참여하고, 험버트는 로의 친구들과 크리스마크 파티를 열어주는 등의 일상을 보낸다. 시간이 지나면서 험버트는 로가 점점 소녀를 벗어나 숙녀의 티가 나는 것을 느끼던 중, 피아노 레슨을 빠지고 로가 무엇을 했는지 추궁하는 과정에 큰 다툼이 일어난다. 로는 험버트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미국을 여행하자고 제안하고, 둘은 다시 여행을 떠난다. 험버트는 여행 중 계속해서 자신의 사촌 트랍을 닮은 남자가 미행하는 듯한 불길한 기분이 들고, 로가 트랍같이 생긴 남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포착하지만 로는 지나가는 남자라며 둘러댄다. 험버트는 호텔 테니스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테니스 복식 경기를 하자는 제안을 거절하던 중 호텔에서 비어즐리 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말을 듣고 갔으나 그 전화는 누군가의 교묘한 장난이었고, 그 사이 로는 트랍같이 보이는 남자와 넷이 복식 경기를 하고 있었다. 타이어가 펑크난 상황에서 자신의 차를 미행하던 트랍에게 가는 험버트를 다시 그들의 차로 유인하기 위해 로는 차를 출발시키는 등 수작이 이어지자 험버트는 계속해서 로를 추궁하지만 로는 다른 구실을 대며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다. 로의 연기를 보며 험버트는 로에게 연극수업을 받게 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로는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했고, 그 사이 어느 남자와 험버트를 따돌리고 도주한다.
험버트는 사설탐정까지 고용하여 로를 찾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로를 찾지 못했고, 세 번 이혼한 여자 리타를 만나 동거를 하던 중 로에게 자신은 딕이라는 남자와 결혼했으며 곧 출산하고 알래스카로 이주할 예정이며 돈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받는다. 험버트는 편지를 추적해 로를 찾아내고, 로는 퀄티라는 남자와 비어즐리에서부터 험버트 몰래 연애를 하다 병원에서 탈출했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로는 함께 떠나자는 험버트의 제안을 거절하고, 험버트는 램스데일로 돌아와 퀄티를 추적해 그림로드에 있는 퀄티를 찾아가 죽여버리고 오는 길에 난폭운전으로 체포된다. 로는 분만 중에 숨을 거두고, 험버트는 구금 중 질병으로 죽는다.

험버트가 극악무도한 소아성애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험버트가 성인이 된 로에게 끝까지 집착해 파국에 이른다는 전개가 조금 의아하기는 할 것 같다. 특히 롤리타라는 대명사가 소아성애의 피해자로만 인식했던 또 다른 편견은, 로가 생각보다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퀄티와의 도주계획에 험버트를 이용하는 등의 전개로 미루어 역시 의아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작가도 외설적인 내용을 고려하여 범죄자의 ‘회고록’이라는 트릭으로 독자들을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점이 새롭다. 그 회고록에서 굳이 퀄티라는 반전을 뒤에 숨겨두고 있어 책 전반부를 샅샅이 뒤져 퀄티라는 인물을 찾아가는 과정이 독서를 고난스럽게 했다. 번역자의 의견대로 이 책은 두 번 읽어봐야 하는 책이니까.

그러나 20대 때는 물론이고 30대 초반까지도 내 번민의 본질을 명료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육체는 자기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았지만 정신은 육체의 하소연을 모두 외면해버렸다. 한순간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무모하리만큼낙관적으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온갖 금기가 목을 졸랐다. 정신분석가들은 가짜 성욕을 해소하는 가짜 치료법을 권했다. 내가 짜릿한 연정을 품으려면 상대가 애너벨의 자매이거나 하다못해 그녀의 몸종이나시녀쯤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때로는 광기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 P32

이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인데, 아마도 여러분은 내가 벌써 게거품을 물고 흥분하는 모습을 떠올리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그저 작은 잔에 즐거운 생각을차곡차곡 담아둘 뿐이다. 여기 사진이 몇 장 더 있다. - P33

아니, ‘끔찍이도‘라는 말은 잘못되었다. 새로운 기쁨을 기대하면서내가 느끼는 흥분은 끔찍하다기보다 애처로웠다. 나는 애처롭다고 표현하겠다. 어째서 애처로우냐ㅡ지칠 줄 모르는 불길처럼 성욕이 활활 타오르는 상황에서도 성심성의껏 열두 살 먹은 아이의 순결을켜줄 작정이기 때문이다. - P103

다음은 매우 중요한 발언이니 부디 명심해주기 바란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내면은 신사적 측면보다 예술가적 측면이 우세하다. - P118

로마법에 따르면 여자는 열두 살부터 결혼할 수 있었고, 기독교 역시 이 규정을 채택했으며, 미국의 몇몇 주에서는 지금도 이런 일을 묵인해준다. 그리고 열다섯 살은 어디서나 합법적이다. 북반구에서든남반구에서든, 가령 지역 목사의 축복을 받고 술에 취해 잔뜩 흥분한마흔 살 먹은 짐승이 땀에 젖은 예복을 벗어던지고 어린 신부를 덮쳐뿌리 끝까지 삽입해버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신시내티 등지의 자극적인 온대성 기후에서 여자는 열두 살이 될 무렵에 성숙해진다" (이 교도소 도서실의 오래된 잡지에 실린글이다). 돌로레스 헤이즈는 바로 그 신시내티에서 채 300마일도 안되는 곳에서 태어났다. 나는 자연의 섭리를 따랐을 뿐이다. 나는 자연의 충실한 사냥개다. 그런데 어째서 이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할까? - P217

천진함과 기만, 매력과 천박함, 어둡고 시무룩한 표정과 밝고 명랑한 표정을 모두 갖춘 롤리타는 한번 심술을 부리기 시작하면 정말 울화통이 터질 만큼 밉살스러운 계집애였다. 때로는 따분해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때로는 시무룩하고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널브러지고, 때로는 그냥 건들거리기도 하는데―자기 딴에는건달처럼 거칠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바보 흉내에 불과했다―변덕이 하도 죽 끓듯 해서 도저히 감당할길이 없었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역겨울 정도로 평범한 계집애였다. - P235

지금쯤 독자 여러분도 알아차렸겠지만 나는 실무에 밝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전문가를 찾아조언을 구하지도 못할 만큼 무지하거나 게으르지는 않다. 그런데도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섣불리 운명의 흐름을 건드리다가, 즉 운명이 내손에 쥐여준환상적인 선물을 정당화하려다가 오히려 선물을 도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 P276

비스듬히 드러누워 손거스러미를 물어뜯으면서 냉혹하고 흐릿한 눈으로 나를 조롱하듯이 바라보았는데, 한쪽다리를 길게 뻗어 스툴 위에 올려놓고 신발을 신지 않은 발꿈치로 줄곧 스툴을 흔들어대는 그녀를 보는 순간, 2년 전 처음 만난 후로 그녀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한눈에 확인하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독한 환멸을 느꼈다. 아니, 최근 2주 사이에 일어난 변화일까? 그녀에 대한 애정은?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내 불타는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욕망의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무서울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아아, 그녀가 변해버렸구나! - P325

경찰이 이런저런 일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벌어지는지, 네가 어떤 곳으로 가게 되는지 너도 잘 알잖아. 그러니까그놈이 너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너는 그놈한테 뭐라고 대답했는지똑바로 대란 말이야. - P349

롤리타의 눈을 보니 놀랐다기보다 손익을 따져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어느 친절한 숙녀에게 아빠가 발작을 일으켰다고 말하는소리가 들렸다. 그때부터 나는 한참 동안 라운지 의자에 누워 진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다시 운전을 할 만큼 기운을되찾았다. (그후 몇 년 동안 의사들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지만 아무도믿어주지 않았다.) - P380

존 레이가 뭐라고 말하든 간에 『롤리타』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호기심, 감수성, 인정미, 황홀감등)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그런 책은 흔치 않다. 나머지는 모두 시시한 졸작이거나 이른바 관념소설인데, 마치 거대한 석고 덩어리처럼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조심스럽게 전해지는 관념소설도 사실은 시시한 졸작일 때가 아주 많다. 언젠가는 누군가 망치를 들고 나타나서 발자크와 고리키와 토마스 만을 힘차게 때려부수리라.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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