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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오랜시간 연락이 두절된 채 지내던 두 자매가 만나 동생을 사모했던 한 남자가 자살한 후 보낸 편지를 두고 벌어지는 며칠 간의 여정이다. 언니 마레그레트는 남편과 결혼하여 아이는 없지만 세상에 온건하게 대처하고 살아가는 신문사의 기자인 반면 동생 니나는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행동하는 성공한 작가이다. 니나를 사모했던 열 살이나 연상인 슈타인 박사는 니나를 알고난 뒤 18년을 짝사랑했지만 결국 니나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자살한 남자이다.
스웨덴으로 이민간 뒤 잠시 들렸던 호텔에서 마레그레트는 니나를 우연히 마주친다. 니나는 영국으로 이사가기 전, 마레그레트에게 할 말이 있다며 만나자고 연락을 했고, 마레그레트가 니나의 집으로 도착한 날 슈타인 박사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니나는 슈타인 박사의 사망 소식에 잠시 반응을 보였을 뿐 소포로 받은 슈타인 박사의 일기장과 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레그레트는 슈타인 박사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였고, 그 일기를 통해 니나의 과거를 알게된다. 슈타인 박사의 일기와 편지를 보며 놀라고, 같은 사건에 니나의 생각을 물으며 며칠동안 대화를 나누며 지낸다.
니나는 전 남편인 퍼시와 약혼 중에 다른 남자 알렉산더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결국 약혼자인 퍼시와 결혼하였고, 퍼시의 아이를 임신한 중에 낙태를 결심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아들을 낳았다. 퍼시와 이혼 후에는 퍼시의 새 아내인 클레레를 통해 퍼시가 비밀경찰에 붙잡혀 곧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의 자살을 돕기 위해 치사량의 카페인을 감방으로 가져다 준다. 니나의 이런 굵직한 과거의 사건은 모두 슈타인 박사의 도움을 거쳐갔다. 퍼시의 아이를 지우고 싶을 때도 슈타인을 찾아가 임신 중절을 요청했으며, 퍼시의 자살을 돕는 무모한 행동을 할 때도 독약을 슈타인에게 요청하여 퍼시를 도울 수 있었다. 슈타인은 그때마다 니나를 도우며 언젠가는 니나와의 결합을 기대했지만, 변화와 모험이 필요한 니나에게 슈타인은 생각만 많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강단이 부족한 ‘참아내기 힘든 사람’(225p.)일 뿐이었다. 슈타인의 니나에 대한 순애보는 그가 아네트 아주머니로부터 상속받고, 니나가 좋아해 언젠가 함께할 곳이라 꿈꾸던 집까지 처분할 정도로 큰 상처로 돌아온다.
니나가 가스 자살을 시도하고 위기를 넘겼을 때도 슈타인은 니나의 딸 루트를 집에서 보살피며 니나의 요양을 돕는다. 슈타인의 동생인 헬레네는 니나에게 집착하는 슈타인을 보며 니나를 경멸했고, 다른 주변의 지인들도 슈타인에게 니나를 멀리하라며 경고하지만, 그는 니나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한다.
니나는 반나치주의자들의 망명에 협조하고 유대인들을 도와주다 내란방조죄로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슈타인은 그의 친구인 알렉산더가 니나의 딸인 루트의 친아버지임을 알게되면서 깊은 상심에 빠지기도 하다 결국 니나를 만난지 18년이 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니나는 큰일이 생기면 슈타인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둥 그의 사랑을 불모로 사람을 착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약자에게 관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작가로 성공하기 전 신문사의 요청으로 한 과학자를 인터뷰하러 갔다 상처한 사실을 알고 연민을 느껴 동침을 하고, 반나치주의자로 위험을 감수해가며 동료들의 망명을 돕고, 학교에서는 인종 처분에 대해 반대하는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자퇴를 하기도 한다. 어쩌면 슈타인 박사는 의사이고 사회적 명망이 높은 사람이라는 점도 니나의 마음을 얻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슈타인 박사의 답답함이 소설에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니나라는 매력적인 인물 덕분에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놀라울 정도는 아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에 니나라는 캐릭터의 파급력이 상당했을 거라 짐작이 된다. 특히 슈타인과 마레그레트의 시각에서는 읽히지 않는 니나의 정의감이 인상적이었다.
언니는 그 사람과……… 니나는 망설였다. 그러다가 재빨리 말을 마쳤다. 행복했어? 휴, 니나. 행복이 뭐니? 우리는 평화롭게사는 거야. - P36
니나, 나는 말했다. 알다시피 나는 이제 마흔아홉 살이야. 오십이 다 된 여자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해야 해. 그러나 다 지나간 일이야. 대개 적어도 이 나이면 지나갔다는 것이기쁠 뿐이야. 나 같은 사람들은 지나간 것들을 눈물, 히스테리, 갈등,화해,끝없는 오해, 몇 번의 아름다운 밤, 오랜 기다림 등이 서로 막 뒤섞여 있는 것으로 추억하지. - P36
우울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다 우울하지. 니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네가 삶을 기쁘게 사는 줄알았는데. 왜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그랬지. 니나는 대답했다. 우울은 인식의 시초일 뿐이야. 갑자기 니나는 웃었다. 무슨 현명한 말이라도 하는 것 같군. 물론 나는 기쁘게 살아. 그런데 이 세상에는 거짓 우울도 있는 법이야. 니나는 계속했다. 언니는 사람들의 눈을 보아야만 해. 많은 사람들에게 우울은 겉으로만 그럴 뿐이고 어떤 의도 내지 센티멘털리즘의 표시일 뿐이야. 정말로 우울이 깃들인 눈에는 활기, 집중, 분주함 같은 것들이 있지. 그러나 이것은 무대의 막일 뿐이야. - P65
내 생각에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생기에 차 있을 때야. 그리고 마치 미친자가 자기의 고정 관념에 몰두하듯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야. 나는 인생에서 정말 불행했어. - P68
웃지 마. 니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의욕이 없어지면 늙기 시작하는 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매일 아침 무슨 특별한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어. 나는 마치 아침마다 문간에 서서 몸을 쭉 늘이고 바람 속에 코를 쳐든채 사냥에 대한 욕심으로 몸을 부르르 떠는 사냥개와도 같았어. 그런데 지금, 지금 나에게는 놀랄 일이 없어. 그리고 인생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있는 힘을 다짜내야 하는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일 뿐이야. - P69
언니는 알아? 니나는 계속 말했다. 윤리가 아무 소용이 없고, 양심조차도 아무 소용없는 상황이있다는 것을. 갑자기 법도 안중에 없어져. 어디론가 내던져진 거야. 누구에게 내던져진거지? 모르겠어. - P70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 P78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게 나는 싫어. - P151
이런 노인들과 교제하다 보면 모든 인간에게 염증을 느끼게 돼요. 팔십 세가 돼서까지 악의를 품고 있고, 고집불통이며, 시기하고, 이기적이며, 끝없이 탐욕스럽다면 인생이란 뭐죠? 인생에 치인, 또 다른 사람들은 보람이 없었다고 말해요. 나는 나이가 들면 좋아지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늙는 것에 대해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내가 그렇게 된다면? 그러면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요? - P171
니나의 편이 되어서 싸운 두세 명의 학생들은 완치될 수 없는 정신병자가 아직 인간인지 이미 인간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불치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하며, 오진의 가능성도 있고, 치료 방법이 개발될 수도 있으며, 여태까지 불치로 간주되었던 질병도 고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 니나가 정신병과 비정상을 구별할 수 없으며, 불치의 병자이면서도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반면에 건강하지만 반사회적인 사람도 있다는 것을상기시켰다고 말했다. - P198
너는 많은 것을 지불하고 많은 것을 얻고, 나는 거의 아무것도 지불하지않고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공평하지 않아? - P209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희생자들을 밟고 선 자들은 가치가 있는 자들인가요?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건강할지 몰라요.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요? 건강한 육체에……… 그래요. 나도 알아요.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해요.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가치와 무가치를 판별하려고 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죠? 그들은 미쳤어요. 그들은 마치 병을 박멸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요. 항상 병은존재하게 마련인데. 건강과 병은 항상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있는데. 의학의 생물학적인 관점은 틀렸어요. 근본적으로 틀렸어요. - P213
나도 오래전부터 남녀간에는 정절이란 없으며 다만 습관적으로 함께 사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떤 난간도 안전하지 않으며, 어떤 계단도 견고하지 못하고, 어떤 다리도 어떤 도로도 항구적이지 못하며, 모든 것이 안개나썩은 나무로 만들어져서 어디로 가든 추락할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 P234
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다시는 사랑할수 없다는 것, 그것이 중요해. - P239
이런 성격을 니나는 어디에서 획득한 것일까? 대신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니나는 차갑지 않았으며, 메마르지 않았다.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열정이 있었으며 예민한 감각을 갖고있었다. 이런 여러 정신적 자세를 얻기까지 니나는 어떤 대가를치렀을까? 이제 나는 니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토록 강력한힘과 용기를 요구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 앞에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P255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며 아네트 아주머니가 말한 것처럼 <인생에 대한 희망>이었다고 고백해야만 했다. 니나를 잃은 고통은장난감을 잃은 고통과 다름없었다. - P277
아마 슈타인은 자기가 나를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을 막은 것이 곧 그를 살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어. - P305
젊은이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군. 행동은 너무 조금하는 대신.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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