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브레이커 -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자신의 길을 찾는 소년의 이야기
파올로 바치갈루피 지음, 나선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최근 SF 팬덤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예 작가입니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로 휴고상과 네뷸러상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2006년에 <칼로리맨 The Calorie Man>으로 시어도어 스터전상을 수상했고, 2008년에는 중단편집인 <펌프 식스와 그 외 이야기들 Pump six and other stories>로 로커스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에 발표한 첫 번째 장편인 <와인드업 걸 The Windup girl>로 마침내 SF계의 양대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석권함으로써 (존 캠벨 기념상 정도를 제외한) 국내 SF팬들에게 잘 알려진 SF계의 유명상들을 모두 휩쓴 화려한 수상 경력은 바치갈루피를 예정된 미래의 대가로 주목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강한 임펙트감을 주었습니다.

 

 

<십브레이커 Ship Breaker>는 휴고상과 네뷸러상 동시 수상으로 국내 SF 팬들에게도 큰 화제를 모았던 <와인드업 걸> 이후에 발표한 장편입니다. 2010년 내셔널 북어워드 최종 후보에 올랐고, 아마존 에디터 선정 최고의 책에도 꼽혔으며, 2011년에 마이클 프린츠 상을 수상했는데, 출간은 <와인드업 걸>과 같은 해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네요.

<십브레이커>700(국내판 기준)에 달했던 <와인드업 걸>에 비해 절반이 조금 넘는 416쪽 분량인데, 판형이 조금 작기 때문에 실제 분량은 <와인드업 걸>의 절반 정도입니다. 내용과 구성 면에서도 <와인드업 걸>이 여러 등장 인물들을 병렬식으로 나열해 가며 이야기를 얽어나가는 다소 복잡한 구성과 심각한 내용을 담고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인공 소년의 모험담을 직선적이고 흥미진진하게 그려나간다는 점에서 보다 단순명료하고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와인드업 걸>을 비롯한 바치갈루피의 작품들이 공통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는 그가 그려낸 근미래의 수축 시대입니다. 지구의 자원을 무분별하게 남용하며 거대 도시들을 확장해 나가던 팽창 시대가 자원의 훼손과 그에 따른 지구 환경의 파괴로 인해 발생한 거대한 자연 재해의 결과로 거대 도시들이 대부분 수몰되고, 살아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너지원이 되는 각종 자원들을 채취하거나 약탈하며 생존을 유지해 나가는 포스트 홀로코스트시대가 되어 버린 근미래를 바치갈루피는 자신의 작품들에서 팽창 시대와 대조되는 수축 시대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수축 시대의 시작이 된 거대한 문명의 파괴가 핵전쟁이 아니라 무분별한 자원의 남획과 그에 따른 앤트로피의 증가가 북극의 만년설을 녹여 대홍수를 발생시키고, 남벌된 산림이 홍수를 막아주지 못해서 결국 거대 도시들이 물에 잠기는 참사가 발생한다는 설정은 80년대 이후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반복되어 그려져서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세대에 발생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점에서는 섬찟하기까지 한 경고입니다.

 

 

 

 

 

주인공인 13세 소년 네일러는 황폐화된 해변에서 술주정뱅이 약물중독자에 툭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해안에 좌초된 선박들의 덕트 내부에 들어가 구리나 전선 등을 채취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경량팀의 일원입니다. 작은 도시 크기인 거대한 유조선 내부에 끝없이 이어져있는 좁은 덕트를 때때로 생명의 위협조차 받으며 힘겹게 기어다니며 고된 노동을 하지만, 그나마도 조만간 몸집이 커지면 팀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따라다니는 네일러의 삶은 근미래 대부분의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으로 암울하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도 빈부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여, 문명의 대대적인 붕괴에서 살아남은 상류층(스왱크)들은 새로 건설된 안전한 도시에서 생활하며 탄소 섬유와 첨단 장비들을 갖춘 쾌속선을 타고 바다를 누비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과 동물을 교배시켜 창조한 반인들을 하인으로 부리며 호화롭게 살아갑니다. 기름으로 오염된 해안이 아닌 넓고 푸른 바다 위를 질주하는 하얀 쾌속선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네일러의 취미라는 설정은 다분히 전형적으로 보입니다.

 

 

거대한 폭풍우가 지나간 후 네일러는 우연히 해안에 좌초된 화려한 쾌속선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빈사 상태의 소녀 니타를 발견하고 구해내게 됩니다. 거대한 선박 회사의 오너 가문의 상속녀인 니타는 회사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라이벌의 추격을 피해 폭풍우 속으로 들어갔다가 좌초되었는데, 네일러는 니타를 죽이고 그녀의 몸에 있는 금붙이들을 빼앗는 대신 그녀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그리고 네일러와 니타는 반인인 과 함께 그녀를 집으로 돌려 보내기 위한 머나먼 모험길에 나섭니다.

 

 

문명이 파괴된 암울한 미래 세계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 속에는 꿈을 지니고 있던 소년이 우연히 상류층의 소녀를 구하게 되고, 그녀를 귀환시키기 위해 조력자와 함께 모험길에 나선다. <미래소년 코난>의 이야기지요? 물론 <화성의 존 카터>에서부터 <스타워즈>에 이르는 고전 SF의 전형적인 클리셰들도 금방 떠오르고요.

바로 이런 낯익은 설정과 전개, 직선적이고 오락성이 풍부한 이야기 구성으로 인해 이 작품은 <와인드업 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고 재미있는 대중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수포녹병이나 칼로리 같이 <와인드업 걸>과 공유되는 설정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와인드업 걸>에서처럼 신기술과 유전자 공학에 대한 묘사나 자세한 설명은 자제되고, 그대신 소년의 심상에 주목하는 전형적인 성장 소설의 분위기도 있고요.

 

 

이야기 구조가 낯익은 만큼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력과 읽는 재미일텐데, 이 부분에서 이 작품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첫 장면에 그려진 좁은 덕트 안에서의 숨막힐 듯한 밀폐감과 원유 탱크에서의 아슬아슬한 탈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폭풍우와 쾌속선의 내부 묘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날레의 긴장감 넘치는 쾌속선 추격씬과 아버지와의 대결 장면은 오락적인 재미와 흥미진진함을 최고조로 끌어 올립니다.

장면 묘사들과 전체적인 구성과 결말 등이 마치 헐리우드 장르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간결하고 직접적이어서 두터운 <와인드업 걸>을 읽고난 후에 가벼운 기분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상쾌한 휴식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hajin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