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일 출근길을 셋째인 10살짜리 큰아들과 함께 한다. 아들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오늘은 집에 언제 몇 시에 올거야?”

 

아빠는 아들에게 대답한다.

“당연히 땡하면 빨리 와야지. 집에 와서 같이 레고도 하고 저녁 먹고, 퀴즈게임도 하고 해야지”(숙제도 봐주고, 축구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엄마랑 저녁준비도 하고, 누나들 고민상담도 하고, 다섯 살짜리 막내 그림책도 읽어주고…)

 

오후 여섯시가 가까워질 때 아빠의 안타까운 전화.

“아들 어떡하지. 아빠 회사에 아주 급한 일(주로 친구와 술약속)이 생겨서…”

 

아들은 “그러면 몇 시까지 올거야?”

 

아빠는 “당연히 빨리 가야지. 걱정하지 마”

 

 

#2.

오늘도 지나간 세월을 헤아린다. 지나감의 구분은 달력이나 시간의 기억에 의한 것이다. 어쩌면 내 몸에 기록된 풍화의 느낌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반복되는 건망증과 새치를 넘어선 흰머리의 습격은 심히 당혹스럽다. 마음은 세월의 침식에도 당당하지만 몸은 자연스럽게도 그 부침에 적응한다. 어쩌면 그 인식의 차이가 우리를 더욱 서럽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억이나 몸에 기록된 시간의 흔적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삶의 시계열적 총량에서 과거에 기록된 흔적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일이어서 그럴까? 아니면 낙관적 긍정의 본능에서 미래의 시간들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아무튼 매일 야근을 하고, 친구들 동료들과 술약속을 하고, 주말에는 골프와 테니스 각종 동호회 모임에 단골 멤버로 출현하면서도 내일이라는 시간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이 많다는 증명할 수 없는 낙관론이 스스로를 지배하기 때문이리라. 추산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떠올릴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궁금하다.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3.

누구든지 스무 살이던 때가 있었다. 영화 세씨봉의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그저 아름답다 말할 그때가 있었다. 봄날 분분한 벚꽃의 낙화를 호기 있게 바라보면서 그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풋풋했던 스무 살 때의 기억은 사진속이거나 몇 안 되는 추억거리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렇듯 우리에게 시간은 늘 지나가기 마련이고, 본능처럼 상처나 후회를 남긴다.

 

가족과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한 개인의 행복지수를 결정한다. 물론 일이나 그 밖의 외부활동에서 주로 행복을 느끼는 예외적인 분들도 꼭 있지만.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일상의 시간은 퇴근 후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 중에서 혼자 하는 가사활동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일 것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이들과 같이 저녁준비를 하고, 함께 식탁에 앉아 오손도손 저녁을 먹고, 하루에 있었던 각종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다양한 표정을 살피면서 마음속을 보듬어주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출퇴근하면서 길에 버리는 시간, 동료와 차 마시며 수다를 떠는 시간, 지루하게 반복되는 회의시간에 비해 그 시간은 어떤 비중을 가질까? 진정 계산하기가 두렵지 않은가?

 

 

#4.

스마트폰을 무제한약정이 아닌 일정 요금약정제로 사용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매월 데이터소진량이 통지된다. 약정했던 데이터 총량의 80%를 소진하게 되면 “고객님의 모두다올레35-안심차단 제공데이터가 80% 사용되었습니다. 제공데이터 소진시 데이터 접속이 제한됩니다. 추가 충전은~ ~”식으로 각 개인에게 친절하게 상황을 알려준다. 모두 소진시 재충전할 수도 있다니 고맙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가 가진 시간의 총량이 어느 정도이고, 현재까지 어느 정도 소진되었는지, 그리고 전부 소진시 충전이 가능한지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다. 누군가 알려주면 진정으로 고마울 것 같은 데…. 우리 인간이 가진 시간은 스마트폰 무제한약정제와 같은 요금체계가 없다.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한정 사용할 수 있다거나 다시 충전할 수 없다는 얘기다. 가끔 무제한제로 착각을 하기는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준다면 눈물 나도록 고마울 것 같다.

 

“당신이 가진 시간데이터가 60% 소진되었으니 다시 빵빵한 충전을 원하시면 www.life.or.kr에서 ‘인생데이터 충전’이라고 입력하세요.”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지금 시간은 오후 여섯시. 당신이 가진 오늘 하루의 시간데이터는 75% 소진되었고, 당신의 열정과 에너지는 90% 소진되었으니 이제는 재충전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세요. 지금 돌아가지 않을시에는 완전히 방전되어 전혀 쓸모가 없을 수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의 총량이 얼마인지를 아는 순간이 있기는 하다.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그때이긴 한데, 그때의 알아차림은 불행하게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시 헤아려본다. 진정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과 그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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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ytone 2015-04-07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이런 문자 받고 싶은걸요~~

지성파파 2015-04-07 22:43   좋아요 0 | URL
요원한 희망사항이긴 하지만, 살면서 가장 간절히 바래보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보다 현실적인 것은 오늘, 지금, 이시간을 소중히 여겨서 가장 소중한 가치인 가족에게 아낌없이 써버리는 것이겠지요...
 

모퉁이를 돌다

 

모퉁이를 돌아본 사람은 안다

아쉬움에 대한 응시는

장미넝쿨 저 너머에

두고두고 가시로 남는 법

내 상처를 남기고 가거나

네 상처를 가져가더라도

늘 그렇듯이, 삶의 경계는

순간 모퉁이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돌아선 다음에야 아는 것임을

 

모퉁이를 돌아본 사람은 안다

뻥 뚫린 것은 가슴이 아니라

그저 삶이고 하루라는 것을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보지 못하거나

혹은 애처로운 부름에 답할 수 없음에

흐르는 강물을 놓친 것처럼

햇살을 잃은 봄날에

가는 꽃잎으로 날리는 것임을

 

모퉁이를 돌아본 사람은 안다

별빛 담장아래에서

툭 터지듯 기다려지는 것이

편지나 전화 따위가 아닌

생각만으로도 그려지는

너의 잰 발걸음이라는 것을

거슬러 오르는 뜨거운 몸부림 속에

작약을 탐하는 달빛처럼

조금씩 다가오는 거미의 마음인 것임을

 

나는 어느 모퉁이에서

삶과 이별에 관한 질문을 던질까

 

모퉁이를 돌아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

아무리 큰 대로를 걷더라도 반드시 모퉁이가 있습니다. 출근길에 지하철역에 닫기 위해 여러 모퉁이를 돌아 나옵니다. 세탁소와 반찬가게와 치킨집이 있는 사거리를 지나면서 우리는 여러 모퉁이를 지나옵니다.

 

살다보면 직선으로 혹은 큰 원을 그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더라도 역시 모퉁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모퉁이가 전환점이거나 변곡점이거나 마주하는 이유가 어찌되었건 간에. 하루에 벌어지는 많은 선택과 갈등도 이 모퉁이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길을 가던 우리에게 모퉁이는 운명이거나 필연입니다. 삶을 한참을 살아낸 후에야 우리가 지나친 모퉁이에 대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사소한 길 찾기부터 우리네 인생행로까지 많은 결정과 경계에 늘 모퉁이가 있었다는 것을.

 

때로는 길을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 아픈 이별을 남겨두기도 하고, 때로는 인생의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이라는 모퉁이를 돌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의 삶에 관해서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까요?

 

모퉁이를 제대로 돌아본 사람만 알고, 모퉁이를 돌아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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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대를 부르거든

 

푸른 하늘이 그대를 부르거든

감사한 얼굴로 어제를 돌아보라

간밤의 거센 바람과 모진 비에

괴로워하는 그대를 볼 것이다

 

사연담긴 편지가 그대를 부르거든

설레는 얼굴로 그 때를 돌아보라

세상의 부름과 사람 사이에서

기다리는 그대를 볼 것이다

 

밤하늘 종소리가 그대를 부르거든

경건한 얼굴로 오늘을 돌아보라

머뭇거리다가 주위를 돌보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그대를 볼 것이다

 

못 다한 이야기가 그대를 부르거든

진지한 얼굴로 거울을 돌아보라

소녀와 클로버와 하얀 밤과 대화하는

생각에 잠긴 그대를 볼 것이다

 

못다 이룬 사랑이 그대를 부르거든

서러운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라

더 주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던

사랑을 잃은 그대를 볼 것이다

 

----------------------------

 

누군가는 우리사회를 피로사회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한국사회를 위험사회라 말합니다. 견디기 힘든 경쟁에 시달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험하거나 가슴 아픈 소식들에 분노와 먹먹함이 교차하곤 합니다.

 

너무들 앞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가끔은 어제 혹은 지난날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돌아보는 것이 오늘의 불안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문득 눈이 부신 푸른 하늘에 시선을 빼앗길 때, 이제는 잊혀져간 그 옛날의 손 편지그리울 ,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은은한 교회종소리가 가슴에 메아리칠 ,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한 아쉬움이 발걸음을 잡을 , 지나간 옛사랑이 사무치도록 그리울 때

 

그때는 무조건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누군가 그대를 부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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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등학교 하교시간, 종이 울리면 기다리는 엄마들은 손을 흔들고 노란색 미니버스는 문을 연다. 교과목을 가르치는 학원부터 태권도, 악기, 각종 체육활동을 지도하는 학원까지 그 유형도 다양하다. 반면 하교시간 시끌벅적해야할 골목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다. 간혹 학원을 오가는 학생들의 바쁜 발걸음과 폐지를 주어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들만 보인다. 중학교, 고등학교의 하교시간 풍경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요즘의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더 이상 놀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놀 시간이 없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풍경은 경쟁이 치열하고 학원이 많은 동네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학원의 강의실이 그들이 부대끼는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간혹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도 함께 놀 수 있는 친구가 없어 집밖에 나오지 않는다. 집안에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이용한 게임과 24시간을 시청할 수 있는 TV가 있어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하지는 않다. 부모 입장에서도 뉴스에 나오는 흉흉한 소식에 오히려 아이들이 집에 머무르는 걸 환영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디서 무슨 놀이를 하면서 놀까?

 

#2.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고 지적한다.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놀이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모든 즐거움은 아닐지라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유희의 상당 부분이 놀이로부터 비롯된다. 생의 에너지를 제대로 방출할 수 있는 재미가 덧붙여진 놀이가 없다면 그 무엇이 인간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일에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부분의 진실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일과 놀이를 구분할 줄 안다. 심지어 누군가는 즐겁지 아니하면 인생이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얘기다.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놀이 자체가 하루의 중요한 일부이던 때도 있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신작로와 동네의 골목길은 온통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학교 운동장뿐만 아니라 마당, 산골짜기, 들판이 모두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의 아이들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배고픔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도 모르고 육체적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 소모된 에너지는 다시 선순환의 고리를 거쳐 내일을 위한 충만한 열정의 원천이 되었음을 그때를 지내본 사람들은 안다.

 

온전히 사계절의 순환을 느끼고, 자연 속에서 사물과 감정을 교류하고, 또래친구들과 맨몸으로 부딪치면서 이들은 미래의 주체로서 자라났다. 비록 하루하루의 삶은 가난했지만 그들은 놀이라는 해방구를 통해서 양질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었고, 보다 창의적인 잠재력을 가진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냥 놀던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의 기억은 소멸되었을지라도 우리의 몸은 그 시절을 기억한다.

 

돌조각 몇 개로 팔방을 하고, 사금파리로 땅따먹기를 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골목길에서 부모들이 일하는 논밭으로 흘러간다. 그 웃음은 그 시절 부모들에게는 비타민과 같았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든 시원한 청량음료 같던 아이들의 미소로 인해 부모의 땀방울은 건강하게 흘러내렸다. 환상속의 유토피아는 그렇게 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2015년 지금, 초등학교 6학년생은 대학 수능을 걱정하고 부모들은 그 아이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불온한 상상에 그치면 좋으련만, 그저 웃고 지날 일은 아닌 것 같다.

 

 

#3.

우리가 생각하는 놀이공간인 골목은 따뜻한 햇볕, 아이들의 웃음과 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으로 구성된다. 바람직한 놀이공간은 땀방울 밴 웃음소리와 돌아보는 눈길이 서로 교차되고 공감할 때 완성된다. 아이들은 골목과 놀이터에서의 시간과 공간을 온몸으로 기억한다. 감나무 사이로 다가오는 뜨거운 여름태양과 나무대문 사이로 드나드는 부드러운 바람의 줄기를 기억한다. 소낙비에 분연히 일어서는 흙먼지 냄새와 다가설수록 멀리 물러서는 찬란한 무지개를 기억한다. 땅과 햇볕과 땀방울의 유혹을 느끼면서 아이들은 성장하는 것이다.

 

학교 운동장과 좁다란 골목,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아야 한다. 보습학원의 보충수업과 영어학원의 숙제를 걱정하지 않고, 하고 싶지도 늘지도 않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지 않고도 시간이 흘러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부모가 부르는 손짓에 배고픔이 사라지는 그 순간을 느껴야 한다.

 

아이들이 뛰노는 그곳은 단절과 차단의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 개방성을 원칙으로 하되,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동심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팍팍한 세상의 어두운 면으로부터 벗어나있되, 그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향해 마음껏 외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한다. 그 곳에서 아이들은 달력과 시계속의 시간이 아닌 스스로 몸이 원하는 시간을 누리며 하루를 채워나가야 한다. 그 채움으로 인해 아이들은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삶의 원리를 몸으로 체득할 필요가 있다. 즐거움은 놀이로부터 온다는 사실. 놀이로부터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진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놀고 있을까? 우리, 부모들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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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 사소하지만 거대한 의문 한가지.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흘러가고, 무한하게 주어진 것일까? 마치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물처럼 끊임없이 내게 필요한 시간이 주어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깨달음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은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 깨달음을 얻는 순간 우리의 삶은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한 편의 정겨운 동화처럼 보이던 세상이 삭막한 현실로 가득한 일간신문의 어느 한 면이 되고 만다.

 

시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할 때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시간에 대한 관념이 명확해질 때에는 그 부족함으로 인해 허둥거리지 않기 위해 결국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결론이 무엇이던지. 한번뿐인 삶을 살아가는 동안 현자들은 모든 것을 알려고도 모든 것을 행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그 것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시간을 보낸다.

 

봄꽃처럼 한번 피고 지는 인생을 사는 우리는 가끔씩 시간여행을 꿈꾼다.

 

시간여행이라는 소망은 불편한 현재에 사로잡힌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기도 한다.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하루를 살다보면, 우리는 어느 하루 인생 최고의 하루를 살기도 하고 최악의 하루를 살기도 한다. 누구든지 최악의 하루를 산 날은 시간여행을 통해 비참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한다.

 

 

#2.

영화 어바웃 타임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가족의 이야기다. 시간여행의 능력은 이 가족들 중 남자들에게만 그것도 21살 이상이 되었을 때 생긴다. 평범한 외모의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적인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시간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프레디삼촌은 돈을 위해 시간여행을 했다가 불행한 인생을 살았고,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기위해 시간여행을 했다고 한다.

 

이 가족의 일원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최고의 가치에 시간을 투자한다. 우리에게 인생의 모든 시간을 바쳐 얻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은 세 가지 교훈을 얻는다. 두 가지는 아버지를 통해서, 마지막 한 가지는 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첫 번째 교훈은, 평범하게 하루를 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교훈은, 시간 여행을 통해 똑같은 하루를 다시 살아보라는 것이다.

 

똑같은 하루일지라도 두 번째 하루에서는 첫 번째 하루에 보지 못했던 숨겨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하루에서 보았던 삶의 비경과 삶의 비의로 인해 우리의 하루는 더욱 풍부해지고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깨달은 마지막 교훈은,

 

이제는 시간여행을 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오늘 하루가 이 세상 마지막 하루인 것처럼 열심히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다. 특별하면서도 즐겁고 후회 없는 하루.

 

아무리 시간여행을 거듭하여 과거를 바꾼다 할지라도 현재 사랑하는 가족과의 모든 경험과 기억마저도 바꿀 수는 없다. 때로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현재 간직한 소중한 기억을 뒤바꿔놓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이의 성별이 바뀌거나 최고로 기억되는 하루의 기억이 없거나.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시간여행을 하고, 그 중에서 선택된 최고의 하루를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선택한 이 하루를 즐기는 것이다.

 

 

#3.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반복된 시간여행을 통해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에 은퇴를 결정한다. 50대 초반에 대학교수라는 직업에서 조기은퇴하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하게 된 계기는 시간여행자마저도 변화시킬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이었다. 주인공은 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아버지가 가족과 본인을 위해 아주 여러 번의 시간여행을 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불어 시간여행자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3차원의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시간여행을 했다는 물리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데자뷰(기시감)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간혹 기시감에 시달리는 누군가는 스스로 시간여행을 했었다는 의혹을 가져볼만하다. 이 역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모생명보험회사의 광고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평균수명을 전제로 하루 중에 순수하게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의 총량을 계산하는 것이다. 가족과 잠자는 시간마저 빼보면 평범한 대부분의 개인들은 3년을 넘기가 힘들다. 당혹스런 결론에 의해 우리는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소소한 개인들의 애환과 가족의 참된 가치를 스스로에게 질문케 된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생의 소중한 가치는 나라는 개인과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발원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나에게 시간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에게 다시 되묻고 싶은 말이 있다.

 

두 번 혹은 그 이상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그 답이 무엇이던지 우리에게 남은 결론은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간여행을 아무리 반복해도 결국은 선택의 문제만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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