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등학교 하교시간, 종이 울리면 기다리는 엄마들은 손을 흔들고 노란색 미니버스는 문을 연다. 교과목을 가르치는 학원부터 태권도, 악기, 각종 체육활동을 지도하는 학원까지 그 유형도 다양하다. 반면 하교시간 시끌벅적해야할 골목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다. 간혹 학원을 오가는 학생들의 바쁜 발걸음과 폐지를 주어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들만 보인다. 중학교, 고등학교의 하교시간 풍경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요즘의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더 이상 놀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놀 시간이 없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풍경은 경쟁이 치열하고 학원이 많은 동네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학원의 강의실이 그들이 부대끼는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간혹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도 함께 놀 수 있는 친구가 없어 집밖에 나오지 않는다. 집안에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이용한 게임과 24시간을 시청할 수 있는 TV가 있어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하지는 않다. 부모 입장에서도 뉴스에 나오는 흉흉한 소식에 오히려 아이들이 집에 머무르는 걸 환영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디서 무슨 놀이를 하면서 놀까?

 

#2.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고 지적한다.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놀이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모든 즐거움은 아닐지라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유희의 상당 부분이 놀이로부터 비롯된다. 생의 에너지를 제대로 방출할 수 있는 재미가 덧붙여진 놀이가 없다면 그 무엇이 인간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일에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부분의 진실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일과 놀이를 구분할 줄 안다. 심지어 누군가는 즐겁지 아니하면 인생이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얘기다.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놀이 자체가 하루의 중요한 일부이던 때도 있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신작로와 동네의 골목길은 온통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학교 운동장뿐만 아니라 마당, 산골짜기, 들판이 모두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의 아이들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배고픔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도 모르고 육체적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 소모된 에너지는 다시 선순환의 고리를 거쳐 내일을 위한 충만한 열정의 원천이 되었음을 그때를 지내본 사람들은 안다.

 

온전히 사계절의 순환을 느끼고, 자연 속에서 사물과 감정을 교류하고, 또래친구들과 맨몸으로 부딪치면서 이들은 미래의 주체로서 자라났다. 비록 하루하루의 삶은 가난했지만 그들은 놀이라는 해방구를 통해서 양질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었고, 보다 창의적인 잠재력을 가진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냥 놀던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의 기억은 소멸되었을지라도 우리의 몸은 그 시절을 기억한다.

 

돌조각 몇 개로 팔방을 하고, 사금파리로 땅따먹기를 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골목길에서 부모들이 일하는 논밭으로 흘러간다. 그 웃음은 그 시절 부모들에게는 비타민과 같았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든 시원한 청량음료 같던 아이들의 미소로 인해 부모의 땀방울은 건강하게 흘러내렸다. 환상속의 유토피아는 그렇게 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2015년 지금, 초등학교 6학년생은 대학 수능을 걱정하고 부모들은 그 아이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불온한 상상에 그치면 좋으련만, 그저 웃고 지날 일은 아닌 것 같다.

 

 

#3.

우리가 생각하는 놀이공간인 골목은 따뜻한 햇볕, 아이들의 웃음과 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으로 구성된다. 바람직한 놀이공간은 땀방울 밴 웃음소리와 돌아보는 눈길이 서로 교차되고 공감할 때 완성된다. 아이들은 골목과 놀이터에서의 시간과 공간을 온몸으로 기억한다. 감나무 사이로 다가오는 뜨거운 여름태양과 나무대문 사이로 드나드는 부드러운 바람의 줄기를 기억한다. 소낙비에 분연히 일어서는 흙먼지 냄새와 다가설수록 멀리 물러서는 찬란한 무지개를 기억한다. 땅과 햇볕과 땀방울의 유혹을 느끼면서 아이들은 성장하는 것이다.

 

학교 운동장과 좁다란 골목,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아야 한다. 보습학원의 보충수업과 영어학원의 숙제를 걱정하지 않고, 하고 싶지도 늘지도 않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지 않고도 시간이 흘러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부모가 부르는 손짓에 배고픔이 사라지는 그 순간을 느껴야 한다.

 

아이들이 뛰노는 그곳은 단절과 차단의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 개방성을 원칙으로 하되,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동심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팍팍한 세상의 어두운 면으로부터 벗어나있되, 그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향해 마음껏 외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한다. 그 곳에서 아이들은 달력과 시계속의 시간이 아닌 스스로 몸이 원하는 시간을 누리며 하루를 채워나가야 한다. 그 채움으로 인해 아이들은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삶의 원리를 몸으로 체득할 필요가 있다. 즐거움은 놀이로부터 온다는 사실. 놀이로부터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진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놀고 있을까? 우리, 부모들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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