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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를

 

허둥지둥 살지 않으리라

빨랫줄에 아기기저귀 펼쳐 널고

나의 하루도 맑은 햇빛에 비춰보리라

 

바쁘게 살지 않으리라

거미줄 너머 세상을 보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거미의 생각을 읽어보리라

 

지나치듯 살지 않으리라

한 올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스치는 아이의 미소에 눈을 맞춰보리라

 

버리듯 살지 않으리라

행복과 불행 사이에 무심히 버려지는

시간을 한 땀 한 땀 수선하며 살아보리라

 

앞만 보고 쫓기듯 살지 않으리라

꿈의 일부도 담지 못하는 신분증보다는

꺾임의 지혜를 따스한 저녁밥상에서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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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을 하면, pc를 켜고 커피잔을 든 후 첫 행동은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다.  

출근할땐 초2인 셋째이자 큰아들 손을 잡고 꿈얘기를 하면서 느리게 걷는다. 하늘이 파랗다.  

퇴근할땐 우리집 막내인 네살배기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토성길을 지나며 고추잠자리를  본다. 반짝이는 개밥바라기와 먼저나온 반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지하철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휴대전화는 최대한 진동으로...때론 명상할 것.

친구와의 통화는 따뜻하고 진지하게,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를 분명하게. 때론 과감하게 "NO"라고 사양할것.

저녁식탁은 단촐하지만 이야기거리는 풍부하게 아이들과 웃으며...그리고

늘 여유를 가지고 여운을 남길것. 하루를 마감하며 마음을 청소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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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2014416일부터 기록된 세월호의 기억들. 5대양을 넘어서 또 하나의 바다를 만들만큼 눈물을 흘린 부모들. 이것은 단지 슬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삶의 동기를 잃은 부모들의 심정을 형용하기 위한 단어를 찾을 길이 없다. 간절했던 희망의 시간, 돌아오지 못했다는 절망, 남겨진 가족의 슬픔, 공동체의 체념을 넘어서 이제 상처는 분노에 머무르고 있다.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리더와 시스템의 부재가 우리들 가슴과 머릿속에 커다란 싱크홀을 만들었다. 잊어서는, 잊혀서는 결코 안 될 숫자 “0416”. 국가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심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이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던 세월호의 아픔을 가슴으로 새긴다.

 

노란 리본이 그토록 간절한 희망이 상징인줄 몰랐다. 오늘도 안산에 있는 합동분향소에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에 공감하고 용서를 구하는 발걸음이 줄을 잇고 있다. 꽃피우지 못한 어린 생명들과 선생님들에게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헌화한다.

 

헌화

 

우리 살아

이토록 슬픈 봄이 또 있을까

영혼으로 피워낸 어린 꽃들이여

하릴없이 저버린 가여운 꽃들이여

그대들의 애처로운 부름에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였거늘

우리는 그대들의 부음을

영원토록 전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었다면

한순간만이라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대들의 웃음을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오늘 같은 잔인한 사월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을 터인데

우리는 이 찬란한 봄을 용서할 수 없다

봄빛을 탐하던 그대들의 사랑스런 눈빛이

진정 그리워질진대

그대들을 저버린

우리, 우리 모두에게

더 이상의 봄날은 없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긴 여행도 돌아올 집이 있으므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누군가를 잃은 것이다. 주인을 잃은 교복과 빈방에 깃든 적막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느끼는 애틋함은 본능 이전의 감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그 소중함을 잊고 산다. 하여, 그 상실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먼 훗날, 다시

 

먼 훗날

혹여, 이 땅에

다시 엄마, 우리 엄마로부터

따뜻한 숨결을 이어받는다면

감사하다는, 말과

용서한다는, 말을

두 주먹에 쥐고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리라

슬픔만이 낮게 깔린

부끄러운 하늘 아래

사라진 봄날과 함께 돌아오리라

잘 다려진 교복에

또렷이 이름을 새기고

못다 이룬 소풍을

또 다시, 사월에 다녀오리라

현관문에 찰랑이는

목어소리와

신발 네 켤레가 나를

기다리는

저녁식탁으로

이제는, 웃으며 돌아오리라

 

평범한 일상의 소소한 얘깃거리들은 모두 행복의 근원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된장국과 나물 몇 가지가 차려진 저녁식탁에서 하루를 이야기하며 크고 작은 웃음을 터트릴 줄 알아야 한다. 아이들과 눈 맞추고 친구이름을 듣고, 작은 불만에도 크게 반응을 보일 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그러한 부모의 모습에 마음을 연다. 부모 자식 간의 소통이 별건가.

 

어려운 숙제와 같은 인생살이, 오늘 하루는 축제가 아니던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감히 아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몇 명이 되었건 우리의 아이들과 오늘을 소소하게 살아가는 부모가 가장 행복하다.

 

세월호특별법의 올바른 제정을 촉구한다. 유민아빠, 김영오씨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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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 칼릴지브란(예언자)

   

해마다 5월이면 많이들 인용되는 칼릴지브란의 예언자 중 "아이들에 대하여" 일부분이다.

누구든지 부모가 되면서, 아이들이 커나가면서 떠오르는 의문 중 하나는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

 

배냇저고리를 처음 입혀주며 눈시울을 적시는 부모, 처음 걸음마를 내디딜때 뭉클했던 그 순간.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부정확한 발음으로 듣던 그 순간에도 떨리는 건 부모였고,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조마조마 한근반 두근반 앞날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던것도 부모였다.

 

모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사랑과 자신의 생각, 지식까지도 주고 싶어한다.

자신의 분신으로 살아가리라는 근거없는 확신도 부모들에겐 차라리 하나의 종교다.

이때문에 부모는 아이들을 소유하려고 하며, 이로부터 모든 문제가 고개를 처든다.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 칼릴지브란은 부모와 자식에 대한 본질을 명확하게 설파하고 있다.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들의 생각까지 줄 순 없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마저 줄 순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자신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아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가지고 내일을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한 한국사회에서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 그로부터 발생하는 여러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가정문제의 사회문제화 현상이 우리시대의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누구부터 .. 스스로 질문해본다.

진실되게 의문을 갖는다. 내 영혼과 피로 만들어낸 자식인데 과연 소유할 수 없는 것인가.....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이것은 질문입니까?

 

당신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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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점가에는 자기계발을 촉구하는 책들이 줄을 서있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손에 잡힐듯한 신기루 같은 성공의 꼬리를 그냥이라도 잡을 것만 같다. 그야말로 무한경쟁의 한국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구석 어디에선가 나도 책 한권을 빼든다.

 

자녀양육서도 마찬가지다.  자녀교육 유대인처럼, 핀란드처럼. 외국의 본받을만한 자녀양육/교육의 세태를 부모들에게 친절하게 소개해주는 저자들의 책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네명의 아빠이자 성급한 부모인 나도, 솔깃한 심정에 그들의 주장에 귀를 귀울인다.

 

모두 맞는 얘기다.

 

그렇지만, 우리 애들한테, 우리 한국사회에서, 우리 엄마 아빠들이 이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책장을 넘기는 내내 속내를 불편하게 한다. 왜, 그럴까?

 

왜 우리 전통의 자녀양육의 장점을 다루거나, 조상들의 자녀교육의 지혜가 담긴 책은 보이지 않을까. 이 또한 사대주의의 잔재이려나ㅎㅎ... 물론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체험을 집필한 책도 간혹 보이기도 한다.

 

뒤집어보면 2010년대 우리에게 맞는 우리시대의, 부모들의 자녀양육법은 부정적이거나 없거나다. 이러한 결론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의 잘못일까....

 

생각해보면(단편적으로), 하나같이 칭송하는 핀란드에 비해 한국사회의 과열경쟁구도는 말도 안되는 시스템이다. 핀란드는 배관공과 치과의사가 연봉차이가 그리 크지 않고, 각각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나 정년후 연금체계가 차이가 별로 없다. 핀란드가 가진 합리적인 사회복지제도와 뿌리깊은 안정감은 경쟁하기보다는 각자가 자신의 인생 즐기기를 원한다. 세상에...

 

한국사회를 보라. 한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순간이 어디 한두번인가.....사농공상의 밑도끝도없는 유령과 같은 관념이 만들어낸 직업의 서열 때문에. 그 누군가는 서럽고, 또 누군가는 삶을 버리기도 한다. 이런 된장..

 

이런 경쟁구도 속에서 어떤 부모가 경쟁에서 뒤떨어진 자식보기를 원할것인가. 적어도 내 자식이 소년등과는 아닐지라도 번번한 직업을 갖기를 고대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공부라는 하나의 척도로 줄을 세우는 한국에서 애시당초 핀란드와 같은 사회의 자녀양육/교육은 요원하다. 우리의 획일적인 교육시스템과 낡은 관념을 청산하지 않는한 자라나는 청소년을 위한 봄날은 없다. 대한민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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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라, 스스로에게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어릴 적 부엌에서 들려오는 리드미컬한 도마소리, 솥단지 끌어내리는 소리에 아침잠을 깼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의 부엌(우리가 정개라고 했던)은 남방가옥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부엌에서 비롯되는 소리는 모든 방에 전달되었다.

 

논밭이 많아 불만(?)이었던 소싯적.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기 전에도 어머니는 들일 나가기 전 가족의 아침밥을 챙겼다. 된장국을 끓이기 위해 애호박과 양파를 도마 위에서 써는 소리, 포기김치를 맛깔나게 써는 소리는 어린 아이의 귀에는 자명종과 다름없었다. 가마솥에서 솥뚜껑이 오르내리는 묵중한 저음과 구수한 밥내음은 잠자리에서도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희미한 삼십 촉 백열등이 속절없이 흔들거리는, 대화상대도 없던 고요의 공간인 부엌. 손 시린 찬물과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새벽에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밥을 짓고 아침상을 준비했을까. 어린 마음은 알 수 없었다.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까지도 어머니에게 묻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그냥 존재론적 어머니였다. 관념(?)에 가까운 아버지와는 달리 태생적 모성애는 그렇게 조용히 빛을 발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말없이 밥상머리에서 공감할 수 있었다.

 

세상살이는 힘들었지만, 부모의 노동과 땀방울을 논밭에서 마당과 밥상에서 지켜봤던 그때의 아이들은 부모의 헌신과 노력을 묵묵히 온몸으로 새겼다. 무관심한척하지만 아버지는 성적표보다는 아이의 표정을 먼저 살필 줄 알았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삽자루와 구멍 난 메리야스는 표현력이 부족한 부성애의 전유물이었고, 아이들은 술 취한 그 뒷모습에서 현실화된 아버지를 보았다.

 

까가머리나 단발에 교복을 입고 냉장고도 없던 시대. 말보다는 몸의 언어로 내보이는 부모의 속마음은 아이들에 또 다른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사전교육이나 연습할 수 없었던 부모의 역할이었지만 그분들은 배움 없이도 제 몫을 충실히 해냈다.

 

그 밥을 얻어먹고 자란 아이들이 지금 부모가 되었다. 지금은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지도 않거니와, 혹여나 밥상을 준비하더라도 주방의 정겨운 소리는 방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쿠쿠라는 여성이 말 몇 마디로 나름 구수한 밥냄새를 길어 올리므로. 수면부족인 아이들은 엄마가 준비한 아침밥상을 고대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피의 대상이 된다. 늦잠과의 경쟁에서 대부분 아침밥상은 질 수밖에 없다. 타협점은 빵이나 시리얼정도.

 

우리의 아침식탁이 왜, 무엇이 문제일까.

 

그렇다. 삼십년 전의 아이들과 지금 아이들은 연령대는 같으나, 세상과 부모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부모와 아이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긴 하지만, 삼십년 전 아이였던 부모와 현재 그들의 아이는 이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삼십년 전에 비해 훨씬(?) 민주화되었고, 사회 각 분야의 시스템은 정교해졌다. 그렇지만 그 기반위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가족의 삶은 더 각박해졌다. 가족은 아침식탁은 물론 저녁이 없는 하루의 삶을 살고 있다.

 

아파트라는 현대가옥이 가져온 폐해이긴 하지만 요즘의 아침밥상에는 부모와 아이들 간의 공감이란 것이 없다. 이게 반찬 중의 하나라면 좋으련만, 공감이 사라진 아침식탁엔 책가방을 매고 허겁지겁 뛰어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만 남는다.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교육시스템이 아니라 교육시스템을 위해 이이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객전도도 과잉 유분수다. 적어도 학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피곤한 아이들의 가슴에 무슨 창조의 불씨가 지펴지고 무슨 새파란 꿈이 살아나겠는가. 충혈된 그들의 눈에 어디 타인의 삶이 보이겠으며, 부모의 수고를 몸으로 느낄만한 여유가 있겠는가.

 

지난 시대의 획일적 공교육이 가져온 삶에 관한 철학부재의 우리들(현재의 부모들). 공교육의 붕괴로 사교육의 정치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학생과 그들의 부모들.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다. 경제적 풍성함이나 계산적인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교육방법론은 넘쳐나나, 현재의 아이들은 부모가 내보내는 몸의 언어를 알아채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 하여, 부모들은 헛된 노고로 인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아침식탁에 다시 공감과 따스하고 향기로운 밥냄새를 반겨하는 아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까. 멀어져가는 부모와 아이의 거리감을 따듯한 시선으로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던지는 오늘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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