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라, 스스로에게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어릴 적 부엌에서 들려오는 리드미컬한 도마소리, 솥단지 끌어내리는 소리에 아침잠을 깼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의 부엌(우리가 “정개”라고 했던)은 남방가옥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부엌에서 비롯되는 소리는 모든 방에 전달되었다.
논밭이 많아 불만(?)이었던 소싯적.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기 전에도 어머니는 들일 나가기 전 가족의 아침밥을 챙겼다. 된장국을 끓이기 위해 애호박과 양파를 도마 위에서 써는 소리, 포기김치를 맛깔나게 써는 소리는 어린 아이의 귀에는 자명종과 다름없었다. 가마솥에서 솥뚜껑이 오르내리는 묵중한 저음과 구수한 밥내음은 잠자리에서도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희미한 삼십 촉 백열등이 속절없이 흔들거리는, 대화상대도 없던 고요의 공간인 부엌. 손 시린 찬물과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새벽에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밥을 짓고 아침상을 준비했을까. 어린 마음은 알 수 없었다.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까지도 어머니에게 묻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그냥 존재론적 어머니였다. 관념(?)에 가까운 아버지와는 달리 태생적 모성애는 그렇게 조용히 빛을 발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말없이 밥상머리에서 공감할 수 있었다.
세상살이는 힘들었지만, 부모의 노동과 땀방울을 논밭에서 마당과 밥상에서 지켜봤던 그때의 아이들은 부모의 헌신과 노력을 묵묵히 온몸으로 새겼다. 무관심한척하지만 아버지는 성적표보다는 아이의 표정을 먼저 살필 줄 알았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삽자루와 구멍 난 메리야스는 표현력이 부족한 부성애의 전유물이었고, 아이들은 술 취한 그 뒷모습에서 현실화된 아버지를 보았다.
까가머리나 단발에 교복을 입고 냉장고도 없던 시대. 말보다는 몸의 언어로 내보이는 부모의 속마음은 아이들에 또 다른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사전교육이나 연습할 수 없었던 부모의 역할이었지만 그분들은 배움 없이도 제 몫을 충실히 해냈다.
그 밥을 얻어먹고 자란 아이들이 지금 부모가 되었다. 지금은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지도 않거니와, 혹여나 밥상을 준비하더라도 주방의 정겨운 소리는 방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쿠쿠”라는 여성이 말 몇 마디로 나름 구수한 밥냄새를 길어 올리므로. 늘 수면부족인 아이들은 엄마가 준비한 아침밥상을 고대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피의 대상이 된다. 늦잠과의 경쟁에서 대부분 아침밥상은 질 수밖에 없다. 타협점은 빵이나 시리얼정도.
우리의 아침식탁이 왜, 무엇이 문제일까.
그렇다. 삼십년 전의 아이들과 지금 아이들은 연령대는 같으나, 세상과 부모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부모와 아이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긴 하지만, 삼십년 전 아이였던 부모와 현재 그들의 아이는 이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삼십년 전에 비해 훨씬(?) 민주화되었고, 사회 각 분야의 시스템은 정교해졌다. 그렇지만 그 기반위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가족의 삶은 더 각박해졌다. 가족은 아침식탁은 물론 저녁이 없는 하루의 삶을 살고 있다.
아파트라는 현대가옥이 가져온 폐해이긴 하지만 요즘의 아침밥상에는 부모와 아이들 간의 공감이란 것이 없다. 이게 반찬 중의 하나라면 좋으련만, 공감이 사라진 아침식탁엔 책가방을 매고 허겁지겁 뛰어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만 남는다.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교육시스템이 아니라 교육시스템을 위해 이이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객전도도 과잉 유분수다. 적어도 학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피곤한 아이들의 가슴에 무슨 창조의 불씨가 지펴지고 무슨 새파란 꿈이 살아나겠는가. 충혈된 그들의 눈에 어디 타인의 삶이 보이겠으며, 부모의 수고를 몸으로 느낄만한 여유가 있겠는가.
지난 시대의 획일적 공교육이 가져온 삶에 관한 철학부재의 우리들(현재의 부모들). 공교육의 붕괴로 사교육의 정치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학생과 그들의 부모들.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다. 경제적 풍성함이나 계산적인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교육방법론은 넘쳐나나, 현재의 아이들은 부모가 내보내는 몸의 언어를 알아채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하여, 부모들은 헛된 노고로 인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아침식탁에 다시 공감과 따스하고 향기로운 밥냄새를 반겨하는 아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까. 멀어져가는 부모와 아이의 거리감을 따듯한 시선으로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던지는 오늘의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