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저녁

 

골목 어귀에 뭉툭해진 하루가 누워있다.

빨간 감을 매단 채 늙어가는 저녁은

굴뚝 너머로 애써 얼굴빛을 붉힌다.

어깨를 낮추며 손을 내미는 노을빛 연기는

별빛을 부르는 소심한 파수병일까?

어둑해진 창문은 목이 긴 커튼을 부여잡고

외로이 눈뜬 가로등을 가여워한다.

돌개바람이 몸을 누이러 대문을 두드리고

서성거리던 사랑이 담에 기대어 고백을 한다.

안쓰러웠을까. 서걱거리던 시간들

전봇대 옆에 조용히 그리운 깃대 하나 세운다.

밥 짓는 냄새가 찌개냄비를 끌어올리면

하루의 생을 소진하고, 또 다른 하루의 생으로

회귀하는 허기진 뒷모습이 백열등 아래 부풀어 오른다.

바닥을 뒹굴며 소란스럽던 아이들의 웃음이

제각기 별자리를 찾아 사라지고, 자전(自轉)을 멈춘 듯

지친 두 바퀴는 구석에 제자리를 찾는다.

어둠의 여백을 찾아 골목의 저녁이 저물어가고

하루를 견디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불 밝힌 창문은

모퉁이를 돌아 그림자가 길어져간다.

오늘도, 상처를 안고 돌아와 살며시 대문을 열어

가족을 보듬는, 속 깊은 골목의 내력을 믿고 싶다.

---------------------------------------------

 

가을은 남자를 이유없이 센치(?)하게 만듭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낙엽 쌓인 퇴근길. 넉넉한 웃음으로 시장바구니를 든 엄마들. 골목 어귀에 걸린 빨간 홍시감. 그 너머에 고개를 떨구는 오늘 하루.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고향집에 계신 어머니도 생각해봅니다. 골목길을 들어서면 고등어를 굽고 청국장을 끓이는 냄새가 시장기를 부릅니다.

 

우리 아이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골목에서 집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았을 그 골목에서 요란스러웠을 그들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어느 집 대문 앞에는 자전거가 서있습니다. 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가 집을 향해 걸어가고, 그 집에는 아이를 기다리는 창문이 환합니다. 모퉁이를 돌면서 바라보는 골목안의 풍경이 그림 같습니다.

 

아침 일찍 골목을 벗어나 해질 무렵 돌아오는 아버지들. 오늘도 우리 가족이 즐겁게 하루를 지났을까 되물으며 현관문을 엽니다. 자신의 상처는 감추고 가족을 살필줄아는 아빠가 바쁘게 다가가는 그 골목길의 힘을 믿습니다. 온기가 살아있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저녁노을

 

해질녘 저 너머에 커다란 눈이 나를 바라본다

거친 호흡은 온통 불붙은 억새밭이다

그 시선이 붉은 산 빛을 담고 강의 온기를 머금은 채

다가서면 차마 바라보지 못할 흰 소의 눈망울

우시장이 서기 전날, 그 두려운 밤에

뒷걸음치며 손길을 거부하던 물기어린 눈동자

멀리 드문드문 별빛을 응시하던 어찌할 수 없는 몸부림

마지막을 고하는 듯 숨소리가 잦아들고,

불그스레한 소의 눈망울이 말갛게 사그라지더니

이제야 어머니의 야윈 몸과 사위어진 눈동자가

어리고 여린 별빛으로 돋아난다

소의 눈망울이, 아니 어머니의 눈물이 잉태한

작은 별바라기가 서쪽하늘에서 조각달과 새로이 자란다

별은, 아 별빛은 노을이 낳은 것이다

 

-----------------------------

서울에서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기란 참 어렵습니다. 바빠서. 

일설에 의하면 농촌지역보다 도시지역의 노을이 더 그럴듯하다고 합니다. 온갖 미세먼지와 스모그가 결합된 먼지구름이 노을의 때깔을 이쁘게 한다는...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아차산과 용마산에 올랐습니다.

모처럼 가을하늘은 맑았고, 산등성마다 사람들은 붐볐습니다.

해돋이를 잘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저녁노을도 장관입니다.

한강과 김포 저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눈망울을 보다보면 괜스레 짠해집니다. 팍팍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하루의 삶이....

 

허전한 속내를 달래기 위해 서둘러 막걸리 집으로 향했습니다.

노을이 낳은 별빛 몇 자락이 우리를 바라봅니다. 그 옆 초승달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부분의 분쟁이나 갈등의 원인에는 서로 다른 시선이 있다. 그 시선 이전에는 서로 다른 인식과 생각이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의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올바르거나 바람직한 시선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어리석다. 애당초 시선이라는 것이 평가적 기준을 정할 수 없는 극히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불행하다.

 

  “미움받을 용기”란 책이 2년여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아들러의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쓰인 대화체 형식의 이 책의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라는 주문에 대한 화답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타인의 시선에 얽매인 삶을 살고 있어서일까? 대한민국이라는 피곤한 삶속에서 얻은 이 책의 영광이 역설적으로 안타깝다!

 

  시선은 그물코다. 각 그물이 목적하는 만큼 그물이 가진 코의 크기는 다양하다. 농어를 잡거나 전어를 잡는 그물이 같은 코를 가질 수는 없다. 농어 잡이를 주로 하는 배의 어부와 전어 잡이를 주로 하는 배의 어부는 서로 우열을 따지거나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배가 가진 그물의 그물코가 그 배의 품격이나 어부의 인격을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서로 같은 바다에서 그물을 내릴 때에도 같은 어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경쟁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없다. 서로의 그물이 얽힌다면 그것은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조급함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하루를 산다. 우리 자신의 시선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은 결코 나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한다. 내 자신의 시선도 타인의 속내를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시선의 교차 속에서 혹은 비교 속에서 괴로워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내면이다. 바라볼 수도 보여줄 수도 없는 내적인 세계가 가볍게 스치는 바람 같은 시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다. 무언가 옳지 않다. 심지어 부당하기까지 하다.

 

  조정래의 시선, 조르바의 시선, 니체의 시선 등 그 어느 것도 나를 구속할 수는 없다. 그들의 시선이 위대하고 존경스러울지라도 그렇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내 사고체계로 걸러진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한낮의 태양에서 빛의 줄기보다는 따뜻함을 받아들이듯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내게 유리한 자양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도 독립적으로. 내 삶의 온기와 만족도는 내가 정한다. 그것이 내 삶을 위한 진정한 용기다.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시선의 꿋꿋함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내 방식대로 산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삶은 아니다. 그것은 서로간의 시선이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름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방식의 삶이다. 또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하루를 지날 것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내가 정하는 삶이다.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내방식대로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느 착한 사람의 변명

 

어느 시인이 말했지

곡선이 이기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아하게 돌아갔다

아주 많이 늦었다

 

어느 교수가 말했지

흔들려야 청춘이라고

그래서 수없이 흔들렸다

없는 멀미가 생겼다

 

어느 스님이 말했지

멈추면 비로소 보일 것이라고

그래서 오랫동안 멈추었다

앞서가는 이들의 뒷모습만 보였다

 

다른 어느 교수가 말했지

노는 만큼 성공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열심히 놀았다

계속 놀 것 같다

 

어느 정치인이 말했지

저녁이 있는 삶을 살라고

그래서 일찍 들어갔다

가족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이상한 정치인이 말했지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고

그래서 무엇을 줄 것인지 생각했다

줄게 별로 없었다

 

---------------------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은 말 잘하는 사람들의 세상이라고

착한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믿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들의 믿음만큼 세상은 순진하거나 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말 속에 숨은 진실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아니 진실을 찾아낼 수 없었기에

착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변명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역사교과서를 핑계로 역사를 바꾸고자 합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들일지라도 이 말만큼은 믿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살다보면 변명이 필요하지 않는 믿음과 선택도 있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퇴근 후에 넷째인 막내아이를 데리고 풍납토성길을 걷는다.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어서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푸릇한 잔디위로 땅거미가 걸린다. 어둑해진 거리에는 주점의 불빛이 술꾼들을 부르고, 아득해진 노을 꼬리에 조각달이 얼굴을 내민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에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물도 차분해진다. 온종일 주위를 헤매던 시선도 이제는 안으로 향한다. 다섯 살 먹은 아이와 함께하는 저녁은 순결하고 평온하다.

 

  저녁시간의 토성길은 건강을 위해 산책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들으며 힘차게 걷는 이십대, 어린아이의 유모차를 미는 삼십대 부부와 유모차에 자신을 의탁하는 칠십대가 공존한다. 낮 시간에는 단절되었던 가족 간의 대화의 실마리도 활동하는 약동의 시간이기도 하다. 가끔씩 출입이 금지된 애완견이 가족인 주인을 따라 나와 달빛 환한 길을 뛰어다닌다. 이 시간만큼은 모두가 살가운 하나의 그림이고 풍경이 된다. 그래서일까. 바벨탑처럼 높아만 가는 롯데월드 타워의 위용마저도 정겨운 풍납토성의 구릉아래 한수 아래일 수밖에 없다.

 

  토성길 끝자락에는 화덕피자와 파스타와 맥주를 파는 이층집이 있다. 분위기 있는 음악과 시원한 맥주에 한층 흥에 겨운 목소리가 창문을 넘어 나온다. 토성이 내다뵈는 테라스에서 음식과 술잔을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은 붉게 물들어져 새하얀 달빛과 조화를 이룬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이층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냄새와 분위기에 군침을 다시고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을 한다. 그 집 3층에는 텐트와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캠핑도구들이 있다. 도심 속에서도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캠핑의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노을이 사라지는 순간 토성은 적막하다. 토성을 따라 지어진 아파트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지고 인간의 부재에서 존재로의 증명을 밝힌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사이로 아이가 세발자건거를 타고 지나간다. 이른 저녁을 마친 노인들은 하루라는 삶의 시간을 지나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들의 시선에 비친 아파트 창가의 토성은 쓸쓸하며 아늑하다. 천년을 넘어 이야기들이 쌓여 역사가 된 토성을 보면 쓸쓸하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부모를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들을 보면 아늑하다. 생명의 순환은 개별적인 이야기를 낳고 그 개별성은 모두 모아져 역사라는 강을 이룬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로부터 다섯 살배기 아이에게로 유전되는 기억은 곧 우리의 삶이 된다.

 

  어두운 하늘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성급하게 고개를 내미는 별빛 몇 개가 보인다. 어린 아이들은 그 별들의 조급함을 빨리 찾아내는 신통함이 있다. 별의 이름은 모르지만 저 별이 조금씩 움직이며 반짝이는 것도 그들의 눈에는 쉽게 들어온다. 어른들 눈에 어른거리는 별빛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찾아보려는 의지나 노안도 문제거니와 동심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둥글어지거나 사그라지는 달의 모양과 별의 움직임은 신기함 자체이다. 아이들에게는 한낮 동안의 운동장만큼이나 밤하늘도 호기심 가득한 놀이터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늘 묻고 또 묻는다.

 

  하루를 온전히 살아낸 대가로서 저녁밥상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반찬 가짓수를 따지지 않는다면 식탁에서 받아들이는 만족감도 공평할 것이다. 저마다 준비한 저녁거리가 분주한 손길을 거쳐 식탁에 오르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오붓하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돌아온 가족이 저마다의 외형적 직분에서 해방되는 시간이다. 오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식탁에 둘러 앉아 숟가락을 든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 가족 때문에 저녁시간이 유예된 가정도 많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저녁밥상은 가족이야기의 오아시스이며 향기로운 꽃밭이다. 그 밥상둘레에서 아이들은 부모들의 말과 태도와 감정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부모들은 아이의 눈동자와 말투 속에서 하루를 지나온 그들의 즐거움과 비애를 읽는다. 살아가는 참맛은 이렇듯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식탁에서 결정되지 않을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저녁은 바라볼 수 있는 별빛만큼이나 유한하다. 그 유한함을 숙명으로 여기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진지하게 찾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저녁은 풍성해질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저녁이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하루라도 그저 그렇거나 무의미한 저녁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