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부모들이여, 푸르디푸른 십대 때 꽃다운 뜻을 품어본적이 있었던가요?

그 풋풋한 시절에 날카로운 희망에 가슴을 깊이 찔려본적이 있었나요?

하여, 부모들이여, 아름다운 시절에 가졌던 꿈을 지금 이루었나요?

혹여나, 지나간 그 시절에 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요?

하면, 못내 아쉬움에 시간의 뒤안길을 돌아다보지는 않았나요?

어젯밤 꿈속에서나, 투명한 소줏잔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 꿈의 실체를 보지는 않았나요?

 

누가 이 질문과 대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한때 꿈 많은 소년소녀였는데 말이지요. 많은 우리의 부모님들은 보릿고개를 넘고, 산업화의 파도를 힘들게 넘느라 매일 매일 자라는 아이들의 꿈을 몰랐을 테지. 다행히 그때 아이들의 하루는 배고픔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의 가슴은 많이들 비어있었으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어떤 꿈을 갖고 어떤 아름다운 뜻을 품고 살고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성인들도 불편한 이 사회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미담보다는 악담을, 배려보다는 경쟁을 먼저 알아버린 우리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편리한 전자기기 속에 파묻히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기계적으로 반복학습을 하는 아이들에게 파릇한 새싹이 돋아날 토양이 남아 있을지 의문입니다.

 

 

#2.

누군가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대부분 나는 이런 저런 직업을 갖고 싶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꿈은 직업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지요. 물론 꿈과 성취한 직업이 같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꿈은 직업이라는 상태의 범주를 벗어난 행위와 실존의 카테고리입니다.

 

문제는 꿈과 직업을 동일시하는 성인과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이는 치열한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맹점중 하나입니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선망하는 직장에 취직을 하는 것이 이라는 이름으로 과대 포장됩니. 우리가 진정 바라는 꿈을 담을만한 여유가 그들 가슴속에는 없습니다. 과잉정보와 과잉경쟁이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무엇으론가 꽉 채워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까닭입니다. 여백이 없는 공간에 원하는 물건을 채울 수 없듯이, 여유가 없는 가슴에도 원하는 뜻을 채워넣을 수 없습니다.

 

하여, 잠시 멈추고, 비워두자는 이야기가 선문답을 넘어 시대의 화두가 되는 이유입니다.

 

꿈은 무언가 간절하고, 이루어야 할 뜻이 있고, 가슴에 여유가 있을 때 푸르게 자라납니다.

 

 

#3.

우리 사회의 과도한 경쟁은 아이들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깊은 성찰 없이 사회시스템을 만들어낸 기성세대 때문이지. 숨 막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들고 격차가 큰 계층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배울 것은 죽어라고 공부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공부만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그럴듯한 직업을 갖더라도 이 답답한 사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는 있습니다. 단지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직업현장을 떠나 아이들의 교육현장을 돌아봅니다. 정권이 바뀌고 교육부장관이 바뀔 때마다 너무 당연하게 바뀌는 교육정책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거기에 무슨 아이들을 위한 철학이 있고, 이 나라의 백년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습니까? 외국에서 몇 년 공부해 교육공학 학위를 받아온 기술자나 이론적으로나 체험적으로도 미숙한 탁상관료들이 만들어 낸 조잡한 정책이 있을 뿐입니다. 일명 좀비양산 프로그램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조물에 아이들이 맞춰지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미신을 품습니다. 하지만 정권은 유한하고, 교육부장관은 단명하고 남는 것은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주어진 혼란뿐입니다. 일례로 대한민국에서 입학사정관은 웃기는 얘깁니다.

 

우왕좌왕하는 교육현장, 죽어라고 공부하지 않으면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사교육시장의 상인들과 독서실의 원장밖에 없습니다. 부모들도 경쟁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피로사회의 주인공이 됩니다. 충혈된 눈으로는 아이들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 , 아름다운 뜻이 자라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암기식 공부할 시간을 줄여주고, 삶의 양분이 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는 정책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자기 생각 없이 10대를 보낸다면, 그 다음 20, 30대에는 생각이 저절로 만들어지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복마전 같은 20대의 취업시즌과 대략 난감한 30대의 결혼시즌에서 또다시 홍역을 치르느라 자기생각을 만들어낼 겨를이 없지요. 오히려 정체성 없는 사회에 대한 분노만 키우고 맙니다.

 

 

#4. 잠시, 삼천포로 빠지면

요새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직업체험을 시작합니다. 당연 학교 과제물이죠. 다양한 직업세계를 미리 알아보고 조사하고 체험하라는 의미에서 일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직업이나 소득수준에 따라서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은 한계가 지워집니다. 소득이 높은 직업에 종사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직업이나 유사 직업의 소개를 통해 아이들의 눈높이를 높이고자 합니다. 반면 소득이 낮거나 사회적 인지도가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는 것조차 꺼려합니다. 부모의 직업이나 소득수준에 따라서 직업체험의 편차가 발생하는 문제점은 어떻게 볼 것인가요? 이는 직업의 대물림까지는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편차가 빚어낼 결과물 때문에 속내가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들은 보고 듣는 대로 자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가진 고품질의 교육이 중요하고, 공동체를 조망할 수 있는 체험학습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깊은 고민이 부족합니다. 결국은 좋은 의도가 바람직한 결과를 빚어내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육당국에서는 핀란드식이니 아일랜드식이니 무늬를 바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지만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실질적이지는 않습니다. 예산 문제니 전문가 확충이 문제니 하면서 졸속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구조적인 한계는 시스템적 반성을 불러오기보다는 종국적으로는 한 가정의 문제로 다시 환원됩니다. 결국 부모의 책임이고, 부모의 문제라라는 얘깁니다.

 

 

#5.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꿈의 새싹을 틔울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해답은 꿈이 자랄 수 있는 양질의 토양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양질의 토양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이 어려운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사회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사회는 아주 나쁜 사회입니다. 교육문제 또한 부모들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는 부정의를 넘어 부당하기까지 합니다. 국가나 정치사회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는 구성원의 안전과 행복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구성원이 국가나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불행하다면 그 구성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 사회시스템을 조정하는 사람들의 문제라는 겁니다.

 

아이들은 생각을 낳는 좋은 책을 읽고, 배움이 될 만한 사례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 체험의 공간이 제공되면 자연스럽게 꿈을 꿉니다. 숨 막히는 학교시간표, 치열한 시험의 연속, 학대에 가까운 이중언어 습득의 공포,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교육의 부실로 인해 아이들은 메말라갑니다.

 

과거 핀란드나 아일랜드도 자살문제나 교육문제가 큰 사회적 문제였던 적이 있는 나라들입니다. 현재는 어떠한가요? 교육시스템과 사회안전망에서 세계적인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현저한 개선의 이면에는 문제 있는 사회시스템을 바꾸고자 노력했던 정치인들과 전문가들,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려울까요? 우리에게는 없는 그 무언가가 그들에게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현재의 우리가 그들과 다른 것은,

 

우리사회가 가진 근시안적 조급증, 미래를 내다보는 교육철학의 부재, 졸속정책에 대한 진지한 반성적 고려의 부족, 사회적 합의도출을 위한 노력의 부족, 정치인과 교육관료들의 문화적 사대주의. 이것들은 우리가 과감히 버려야할 과거의 유산입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이것들은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한 시간을, 진지한 반성을 토대로 전문가, 정치권 및 공무원,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무조건 핀란드의 정책을 도입하면 한국의 아이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핀란드의 교육정책이 꽃피우는 것은 핀란드의 사회현실을 토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체질개선 없이는 종국적으로는 귤화위지가 되고 말 것입니. 먼저 한국적인 교육문제를 냉정히 분석판단해보고 그 토대위에 외국의 선진화된 교육정책의 도입필요성을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 우리의 답답한 교육정책이 환골탈태가 가능하다면 굳이 외국의 제도를 수입해야할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의 분노수준을 높여주는 이 문제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6.

양질의 토양을 만들기 위해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첫째는, 공부시간 이외에 여유시간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여유시간이란 놀 수 있는 시간, 비어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여유 있는 시간이 있어야 교실을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고, 자연을 느끼고, 타인들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의문과 고민과 생각을 위해 다양한 책을 읽을 수밖에 없고, 풀리지 않은 어떤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대화를 시도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가진 생체에너지가 공부하는 데만 소용되어질 때 아이들은 행복을 못 느낍니다. 열려진 공간에서 마음껏 뛰놀고, 소리 지르고 에너지를 여러 방향으로 발산할 때 아이들은 살아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것입니다. 예체능과목 수업시간이 줄고, 학원이 아니면 함께 놀 친구가 없고, 공부라는 하나의 기준에서 성적순위만이 유일한 평가기준이 되는 이 교육현실이 부모들은 반갑습니까?

 

둘째는, 아이들의 사교육 의존도를 낮춰주어야 합니다. 학원을 끊어버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줄 수 있는 부모의 관심과 노력이 있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인생의 주체가 됩니다. 특히 공부에 있어서는 알아서 자기주도학습을 하게 된다는 거죠. 수동적인 학습이라는 타성에 젖게 되면 암기된 공부만 남게 되고 공부하는 주체는 소외됩니다. 스스로 학습방법과 학습량을 결정하고, 자신의 노력한 결과에 만족할 줄 알게 되면서 아이들은 정신적인 성장을 합니다. 그러한 성장은 직업이라는 좁은 범주를 뛰어넘어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진짜 하고 싶은 꿈을 발견하고 자라게 할 것입니다.

 

셋째는, 책을 읽을 수 있고, 세상과 공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청소년일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었나요? 공부라고 대답하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부모들은 독서와 부모와의 대화의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책은 인간에게 생각을 일깨우고, 그것을 크게 하고, 또 다른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게 합니다. 어느 비범한 천재도 하늘아래 새로운 것을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만들어 논 동서양의 고전과 양서를 통해 현자들은 하나의 발자취를 남깁니다. 또한 책은 세상과 공감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입니다. 책 한권을 통한 간접체험의 힘은 주변의 평범한 인간관계에서는 얻지 못할 지혜를 주기도 합니다. 책을 많이 읽고, 사색할 수 있는 가족 공동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올곧게 바라보고, 가슴으로 세상을 안을 수 있는 힘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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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빠서 시간 내기 어려운 친구들이 강남 모처에 모여서 민물장어를 먹었다. 장어가 이렇게 비싼 줄 몰랐다. 이글거리는 석쇠에 두 번째 판을 굽고 있는데 메뉴판을 보니, 1인분 가격이 한 달 지하철정액권이다. 남자들에게 좋다고 해서 지금까지 장어랑 천생연분이라는 복분자까지 여러 번 먹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효험은 없었다. 기력회복이 필요 없는 체질인가 싶다.

 

   오늘의 주된 메뉴는 장어였지만, 어느 정도 배가 부르니 이야깃거리가 안주가 되어 쏟아졌다. 40대 후반의 남자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 중 태반은 일, 가정, 인생 이야기다. 굳이 추가하자면 여자 이야기 정도가 있을까. 명예퇴직을 걱정하는 친구, 건강을 걱정하는 친구, 아이들 문제를 상의하는 친구, 부부애정문제를 고민하는 친구의 이야기가 골고루 섞인다. 여성 호르몬이 분비되기 시작되는 나이라 그런지 십대 소녀들처럼 말이 많다.

 

   모임에는 늘 늦는 친구들이 꼭 있다. 이 친구처럼. 본인 회사근처에 약속장소를 마련했건만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합류했다. 넥타이를 풀어 제치며 급하게 맥주잔을 들이키는 이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한마디 한다. “, 왜 이렇게 사냐?, 좀 여유롭게 살수 없냐?”

 

   늦게 온 이 친구 하는 말. “아이고 친구야, 나도 그러고 싶네. 집에 빨리 가고 싶고, 애들하고 저녁도 먹고 싶고.....” 씨익 웃는다. 희끗해진 귀밑머리를 한 안녕 쓴 중년이 우걱우걱 장어를 씹고 맥주를 마신다.

 

술자리에서 넋두리처럼 던지는 말. . ....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아니 좀 더 범위를 좁혀서 일도 잘하고 가정에도 충실할 수 있을까?

오늘 술값은 누가 내지???

 

 

#2. 영화이야기 둘

 

* 이야기 하나

   영화 클릭은 주인공(웃기는 아담 샌들러)이 자신의 일상을 조정할 수 있는 만능리모컨을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영화다. 주인공은 복잡해 보이는 일상을 좀더 단순하게 하나의 리모컨으로 조정하고자 한다. 주인공은 건축설계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파트너로 승진하기 위해서 가정을 소홀히 하게 되고, 가정용품 전문 가게의 beyond(저너머)라는 비밀 공간에서 만능리모컨을 얻게 된다.

 

   그 리모컨은 번잡하고 불편한 일상을 건너뜀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일과 시간으로 그들 이동하게 하는 특별한 기능이 있다. 성공의 열망에 달뜬 주인공은 리모컨을 이용해 직업적 성공에 관한 시간과 장소로만 이동을 하고, 그는 큰 성공을 거둔다.

 

   문제는 그가 리모컨을 빨리 돌림으로 해서 참여하지 못한 가족과의 일상은 그의 기억에 없다는 점이다. 직업에 있어서 성공은 거두지만 그가 함께하지 못했던 가족과의 일에 대해서는 기억의 부존재라는 실패를 가져온다. 아이들을 돌보는 문제, 부부간의 애정문제, 저녁식탁에서의 소소한 이야기 거리들은 성공을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가 빨리 감기를 하는 동안 가족에게 그는 껍데기만 존재했던 것이다.

 

   그 리모컨을 통해 결국은 그는 성공을 쟁취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은 그로부터 멀어져간다. 바쁜 회사생활 때문에 아내와도 헤어지고, 애들이 어떻게 자랐는지도 깨닫지 못한다. 결국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을 후회하는 순간에 주인공은 꿈속에서 임종을 맞이한다. 물론 이 모두가 꿈에 불과했지만....

 

   스토리는 뻔한 결말을 예고하지만, 일과 성공의 강박에 쫓기는 아빠들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가족영화였다. 이 영화 곳곳에 배꼽을 빠지게 하는 우스운 장면들이 있다. 진짜 웃으면서 눈물이 났다. 감정이입이라도 된 것처럼.

 

* 이야기 둘

   영화 패밀리맨도 남자의 성공에 대한 열망과 가족의 소중함이 서로 등가교환으로 교차하는 딜레마를 그린 영화다. 연인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월가에서 성공가도를 걷던 주인공(케서방, 니콜라스케이지)은 어느 크리스마스 전날 우연한 기회(천사의 도움을 받아)에 또 다른 운명 속으로 빠져든다. 그 현실에서는 자신은 연인과 결혼해서 아이 두 명을 기르는 평범한 남자로 생활한다.

 

   이 상황은 그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약속을 지킴으로 해서 맞이하게 되는 또 하나의 삶. 그는 본인의 현재의 삶과 전혀 다른 현실에 어리둥절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적응하게 된다. 점차 그에게도 과거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과의 사이에 팍팍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속 인상적인 대사가 하나 있다. “지난 세월동안, 난 한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을 거야이 대사 속에는 연인과의 사랑의 맹세를 저버리고 성공을 택한 남자의 뼈저린 후회가 듬뿍 담겨있다.

 

   천사의 도움을 받은 시간여행을 통해 자신의 다른 인생을 돌아보게 된 주인공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영화는 드러내놓고 가족의 소중함과 진실한 사랑을 말한다. 또한 일에 파묻혀 살면서 가족과의 삶을 버리고 성공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영화속 또 다른 삶처럼 실제 우리의 삶은 무겁고, 어렵고, 번잡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라 해서 지금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화려한 삶을 열망하지만, 그 삶은 평범하지만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몇 번을 봐도 그 감동은 새롭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사랑하는 아내, 아이들, 그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성공을 위한 일보다는 우리를선택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늦게 온 그 친구 이야기

   작년에 고등학교 친구 중 한명이 대기업계열사에서 등기이사로 승진했다. 사기업체에서 임원으로 승진한다는 것은 모든 샐러리맨들의 소망이다. 통계에 의하면 대학 졸업후 입사한 동기 중에서 임원으로 승진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에 가깝다.

 

   별을 단 이 친구의 승진은 축하받아야 마땅하다. 임원승진은 이 친구가 조직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헌신했는가에 대한 반대급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친구가 그동안 어떻게 조직생활을 했는가를 들어보니 고개가 좌우로(이건 아니다!!) 움직였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출근시간 1시간 전에 사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하고, 퇴근시간은 따로 정해지지 않은 생활을 20년 동안 했다고 했다. 부장승진 이후부터는 사무실에 아예 간이침대를 두고 쪽잠을 자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이 친구는 동기들에 앞서 승진을 거듭했다.

 

   얘들의 양육과 교육문제는 모두 집에 있는 친구아내의 몫이었고,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식탁은 한 달에 서너 번에 불과했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실제로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물었다. 현재 생활에 만족하냐고, 그동안 행복했느냐고. 그 친구는 웃고 있었지만 말이 없었다. 다 아는 것을 왜 묻느냐는 눈빛이었다.

 

이 친구야, 다음부터는 약속시간에 빨리 좀 오셔.....

    

 

#4.

   살아가면서 밸런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마주친다. 학창시절 공부와 연애가 양립이 가능한가는 모두에게 숙제였다.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게 되면 가정과 일이 균형이 가능한가가 또 하나의 과제로 다가온다. 어느 자기계발서에서는 일과 가정의 균형이 불가능하다는 이상한 결론도 내리고 있으나,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 균형을 소망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상사주재원으로 있는 친구에 따르면, 그 나라 사람들은 일과시간 이외에 야근이란 게 없단다. 상사가 부당하게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했을 경우에는 근로자복지관련 법률에 의거 벌금을 부과한다고 들었다. 때문에 퇴근 후에는 가족과 평일에도 하이킹을 하고, 야외에서 레저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늘 영업에 시달리고 각종 회식과 접대술자리에 찌들었던 친구와 그 가족들도 처음에는 남는 시간이 어색했지만 곧 적응했다고 한다. 그 친구 카카오스토리에 보면 가족들 표정에서 여유와 행복하다는 느낌이 뚝뚝 묻어난다. 빈에는 모차르트 초콜릿과 클래식 음악 이외에도 중요한 삶의 여유가 있었다. 참고로 수제 모차르트 초콜릿은 비싸고도 맛있다!!!

 

   밸런스를 필요롤 하는 것들은 양자 모두 동일한 것을 요구한다. 가정과 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시간, 열정, 에너지가 이들에게 필요하다. 하지만 가정에는 특별한 요구사항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사랑. 물론 일도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가정은 사랑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이고 사랑이 가정을 살아나가게 하는 자양분이라는 점이다.

   가족의 소중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늦게 귀가한 아빠가 손으로 아이의 키를 재는 상황은 영화 속 설정만으로도 족하다.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은 비극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일을 건너뛰거나 생략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지 다 때가 있기 마련이고, 그때가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가족과 함께하는 하루의 삶을 소중히 하고, 그러한 일상을 사랑하게 되면서 행복이란 나무가 자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아빠들이여, 적절한 균형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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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처럼 고향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의 얘깃거리들이 안주로 등장했다가 결국에는 아이들 문제에 모두 자리를 내주었다. 시작은 학업성적으로 시작해서 학교생활에 관한 문제, 이성교제 문제, 인성문제에 이르기까지 교육전문가들이 따로 없을 정도로 다양한 대화를 나눈다. 이런 자리에는 반드시 분노를 내보이는 아빠들이 꼭 있다. 바로 이 친구처럼.

 

   나쁜 놈들에 대한 기소권을 독점하는 기관에 근무하는 친구는 부부공무원으로 두 딸을 키우고 있다. 근무하는 조직의 특성상 폭탄주를 잘 제조하기 때문에 자기 앞에 늘 술잔을 쌓아놓고 있다. 이 친구 하는 말이 고1인 딸이 남자친구 문제 때문에 고민이란다. 엄마한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아빠에게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고 한다. 가끔씩 외식을 하면서 자그마한 정보라도 얻을라치면 딸이 묵묵부답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라는데 같은 부모입장에서 충분히 이해가 간다. 큰 아이에 관한 정보교환이 잘 안된 것을 보면, 부부간에도 대화가 잘 되고 있지는 않아보였다.

 

   이 친구는 20년 이상 행위가 나쁜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가정이나 사석에서도 조직의 특성에 걸맞은 말투를 구사한다. 마치 나쁜 행동에 대해 캐묻는 것 같은 말투이다 보니 친구들도 가끔씩 눈살을 찌푸릴 때가 있다. 특정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분들의 토속적인 말투나 특정 직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직업적인 언어구사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과 선의의 충돌을 빚기도 한다.

 

   물론 아빠의 말투가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딸의 침묵에 본질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평소에 아빠와 딸의 대화기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학교문제, 공부문제, 이성문제까지 원만하게 진행된 가족이라면 이러한 사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친구는 잦은 야근과 친목모임,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테니스장에서 동호회활동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친구가 저녁식사 시간에 집에 있을 확률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그나마 가족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도 아이들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본인의 호기심에 따른 대화를 일방적으로 했었음에 틀림없다. 술잔이 몇 순배 돌면서 친구들의 눈빛은 ‘그러니까 가족한테 평소에 잘하지’라는 의미의 그것이었지만, 내심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 겉도는 아빠의 가련한 신세.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엄마도 안심할 순 없다.

 

 

#2.

   우리 집에는 중2인 큰딸에 이어 중1인 둘째딸이 버티고 있다. 대형폭탄(?)을 2개나 안고 있는 셈이다.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날 때가 가끔씩 있다. 서로 간에 공용 언어(?)도 약간 다르고, 대화주제의 전제나 시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요사이 중학생들이 쓰는 단어는 거의 외국어 또는 외계어 수준이다. 줄임말도 그렇거니와 소위 카톡을 비롯한 채팅은어는 짐작조차 쉽지가 않다. 낯선 신조어를 못 알아들어서인지 대화 자체가 단절되거나 삼천포로 빠지기 십상이다. 때로는 찬바람을 동반한 썰렁한 분위기로 종결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대화의 불통을 세상 탓이나 아이들 문제로만 돌려서는 안 될 것 같다. 청소년 시기의 특정단어 사용문제나 부모와 아이들 간의 대화단절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386세대인 부모들도 한때 “X세대”라 불리던 시기가 있었다. 불과 20여 년 전에 언론에서는 청년층인 20대, 30대 초반에 대해서 소위 X세대라고 명명했다. 언론은 그들의 의식과 행동이 기성세대들과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 주목을 했었고,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평가했음에 틀림없다. 하물며 그들이 10대 때에는 어떠했겠는가. 그들은 문제 많은 청소년들이었다. 모조리.

 

   유교적 관념이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세대 간의 대화가 원활하지 않다. 그 이유는 사회구조상 뚜렷한 위계서열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고. 가정이나 조직 내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주로 부모나 상급자들이 갖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현장을 돌아보자.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선생님에 의한 일방적 교수법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 학생의 입장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말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이는 개인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회시스템상 한계다.

 

   사회적 분위기나 전통적 의식에 깊게 뿌리박혀있는 부당한 것들을 한꺼번에 바로 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가정 내에서의 대화문화는 부모가 좀 더 노력한다면(아이들과 함께 노력한다면) 개선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우리 부모세대들은 생존의 문제에 관한 압박 때문에 그저 ‘무뚝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모뿐만 아니라 70년대와 80년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다정다감한 부모의 모습은 거의 보기 힘들었다. 그때에는 부모나 자식이 함께 둘러앉은 대화의 장도 별로 없었다. 요즈음의 부모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경제적 여유와 수준 높은 교육으로 인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나갈 가능성이 많아졌다.

 

   문제는 주어진 환경의 가능성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대화주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부모와 아이들이 마음을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3.

    세계적인 임상심리학자인 토니 험프리스는 ‘아는 만큼 행복이 커지는 가족의 심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건강한 가족의 대화법을 이야기한다. 첫째,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둘째, 상대방을 판단하지 마라. 셋째, 어떤 말이든 포용하라. 넷째, 상대방에게 공감하라. 다섯째, 상대방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라. 여섯째, 가능성을 열어두고 단언하지 마라. 일곱째,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표현하라. 여덟째, 말과 행동에 대해 일관성을 지켜라.

 

   전문가들의 이야기는 구구절절 옳다. 특히 이론에 필 꽂힌 일부 심리학자들 말고, 경험이 풍부한 임상심리학자나 일부 정신과의사들의 현장체험담은 일반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토니 험프리스 박사의 책에 기술된 방법론도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얘기할 수 있는 내용으로 아주 유익하다. 다만 내 몸에 체화되지 않는 이상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사전예고 없이 직면하는 현실의 불편한 상황에서 이러한 대화법을 기억해 행동으로 나타내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건강한 대화를 위한 기술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하고, 밥상머리나 거실뿐만 아니라 가족이 존재하는 모든 공간에서 적용된다. 우리 가족에게 맞는 대화법은 무엇일까? 스스로 고민해보자.

 

 

#4.

*부모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자

   너무나 당연하게도, 먼저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가정이나 조직에서 부모나 윗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고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분위기가 훨씬 자연스럽다. 아이들이나 아랫사람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은 상담이거나 고충처리에 그칠 공산이 크다. 지금 부모들 세대처럼 부모들 대하기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을지라도 아이들에게 부모는 여전히 편하면서도 어려운 존재다. 문제 있는 상황을 인식하거나 그 해결방법에 관한 고민도 살아온 세월과 경험이 많은 부모의 몫이다. 대화주제를 선정하는 것은 공동으로 할 일이지만 부모들이 체득한 지식과 경험은 아이들을 풍부한 간접체험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

 

   아이가 이런저런 실수를 하거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풀이 죽어있을 때 부모가 먼저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그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실수한 아이에게 실수로 인한 당혹감과 부모에 대한 책망이 배가되어 상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풀이 죽어있는 아이에게도 기분전환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모가 성적표에 나타난 숫자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아이 스스로가 분발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물론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고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평소에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나 행동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식탁에서, 거실에서, 때로는 공부방에서 수시로 나누는 대화 속에서 부모가 조금만 관심을 더 기울인다면 아이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의 맥락의 의미를 가슴속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람직한 대화의 기본중의 기본은 경청과 관심이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일방적인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다. 성인끼리 대화하는 경우에도 서로의 정치사회적 코드나 대화예법이 맞지 않으면 파열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갭이 크지 않았던 부모들 시절과는 달리 요즘의 물질문명은 속된말로 Lte급이다. 이러다보니 물질문명과 정신문화 사이에 지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지체현상은 부모자식간의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마치 화성남자 금성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아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나 사물에 관한 이해의 정도가 차이가 많을 수밖에 없다.

 

   우리 큰아들(초2)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빠에게 할 말이 많다. 오늘은 무엇을 먹고, 친구랑 무슨 놀이를 하였으며, 딱지를 몇 장을 잃었는가, 집에 와서 책을 몇 권 읽었는가에 대해서 속속들이 얘기를 한다. 둘째딸(중1)은 주로 친구와 학교생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친구와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영수 방과후교실에서 무슨 단원을 공부했으며, 친구 카카오스토리에 올라와 있는 갖가지 스토리를 이야기 한다.

 

   큰딸(중2)은 사춘기 소녀답게 까칠하기 그지없다. 동생들에게도 존엄한 명령투로 이야기를 하고 부모에게도 선전포고에 가깝게 자신의 일상을 말한다. 주로 학교방송반에서 아나운서로 날린 멘트와 음악을 이야기하고, 아이돌 그룹 샤이니(난, 그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지만)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이야기하며, 자주 바뀌는 자신의 꿈과 직업에 대해서도 관심 없는 듯 이야기하곤 한다. 마치 남의 얘기처럼.

 

   부모에게는 관심 밖의 사항일지라도 아이들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있다. 또한 아이가 얘기한 주제가 하찮아 보이지만 아이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딱지치기, 간식거리, 아이돌 이야기가 부모들에게 무슨 감흥이 있을 것인가? 부모들에게는 공부이야기가 제일인데. 과연 그러한가? 아이들의 눈은 공부이야기를 할 때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놀이나 친구, 아이돌스타 일상을 얘기할 때 더 빛난다. 하지만 부모는 그 눈빛이 못마땅하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그 감정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너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왜 쓸데없는데 관심을 갖지!!”

 

   이렇듯 아이들이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 할 때 부모가 편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아이들은 자신이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 확신은 아이의 자존감 향상은 물론 스스로 더 깊은 속내를 부모에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중립적인 판단기준을 갖자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작은 실수로부터 돌아오는 부모의 반응이다. 작게는 그릇을 깨거나, 동생을 울리거나, 책상정리를 못한 것부터 크게는 시험을 망친 것까지 아이들이 실수할 수 있는 상황은 주위에 널려있다.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도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실수에 대한 아이들의 기준과 성인의 기준이 다르다보니, 성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아이들의 실수는 더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부모들이 아이들의 자잘한 실수에 대해 습관적으로 히스테릭하게 반응하게 되는 경우 아이들의 공포심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실수로 벌어진 상황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부모의 꾸중이 더 두려운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아이의 행동과 부모의 반응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크게 보면 아이들의 실수 또는 그 상황에 중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그로 인해 발생 가능한 아이들의 상처에 중점을 들 것인가가 문제다. 바림직한 것은 부모가 아이의 실수 자체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아이의 감정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곤혹스러운 상황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거기에 집중하다보면 아이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특정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다 보면, 비로소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보인다.

 

   아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중 하나는 “너는 항상 왜 그래?”일 것이다. ‘항상’이라는 단어 속에는 부모들이 은연중에 과거의 잘못과 현재의 상황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위 낙인을 찍고 있는 것이다. 네 살배기도 부모에게 야단맞았던 상황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부모의 눈치를 보곤 한다. 실제로 습관적으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기준에서는 아이의 잘못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이러한 엄격한 기준을 갖다보면 나도 모르게 “너는 왜 그래?”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입장을 바꿔보면 “너는 왜 그래?”는 부모 자신에게도 가장 듣기 싫은 소리임에 틀림없다. 편견을 가진 부모의 시각은 아이를 조화롭게 관찰할 수 없다.

 

 

*원활한 소통을 위한 기술을 갖자

   부모와 아이가 서로 편한 대화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위에서 말한 세 가지가 전제된다면 다른 방법론이 필요할까 싶지만. 굳이 덧붙인다면 아이들은 우회적이고 비유적인 표현보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원한다. 대화 도중에 해석이 필요한 말보다는 직접적이고 분명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직 아이에게는 중의적 표현이나 뉘앙스가 다른 표현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 수 있다. 시적해석이 필요 없게끔 분명하게 표현하자.

 

   아이들은 가정 내에서 부모의 말과 행동을 배우고 자란다. 외모나 성격을 닮는 생물학적 유전은 물론이고 행동습관이나 언어습관도 유전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특유의 말투나 상투어를 자신도 모르게 체화시켜 다시 부모에게 표현하곤 한다. 때문에 부모의 말과 행동이 일관성이 없는 경우 그 행동을 닮아가는 아이들의 배움에도 문제가 있다. 가정 내에서 부모의 말과 행동이 일관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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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더운 토요일 오후, 셋째인 큰아들 손을 잡고 잠실에 있는 교보문고로 향했다.

골목길을 걷는 도중에 초등 2학년생인 아들이 말했다

“아빠, 내가 나중에 크면 모든 자동차를 하이브리드나 전기차로 바꿀 거야. 그리고 모든 집에 태양열 발전장치를 지붕에 만들어서 전기도 만들고....”

아빠가 묻는다.(속으로는 의문을 갖고)

“왜 하이브리드고, 왜 태양열 장치야....”

아들이 대답한다.

“응, 책을 보니까 화석연료 때문에 오존층이 파괴되고,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 저지대의 국가들이 물에 잠긴데. 엄마, 아빠 신혼여행 갔던 몰디브도 2050년에 물에 잠긴다는데”

 

아빠는 생각해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눠본적이 있었던가? 같이 논길을 걷고, 리어카를 밀었던 기억은 있는데 대화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다시 아들이 묻는다.

“아빠, 와인하고 코냑은 어떻게 달라”

아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집에 있는 와인 책을 보았군....쩝쩝

“응, 와인은 네가 알다시피(?) 포도를 발효시켜 만든 것이고, 브랜디(코냑도 브랜디의 일종)는 그런 과실주를 끓이고 증류해서 만든 거야”라고 아빠가 답했다.

 

호기심 많은 나이의 아들은 별걸 다 묻는다. “대통령은 어떻게 뽑는 거야? 앙코르와트는 어디에 있어? 지하철 한 칸은 얼마정도 할까? 아빠 꿈은 뭐야? 미국과 북한은 왜 사이가 나빠? 잠잘 때 꿈은 왜 꾸는 걸까? 포경수술은 꼭 해야 돼?....” 일일이 대답하기에 골치 아프다.

 

부모는 아이들의 보물창고가 되어야 하고, 고물창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

 

 

#2.

   요새 아이들은 공부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책을 읽고 수많은 정보를 얻는다. 분명한 것은 부모들이 책을 읽지 않거나 정보수집능력이 떨어지게 되면 아이들에게 책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거침없는 한마디. ‘아빠는, 엄마는 그것도 몰라“

 

   어느 날인가 부엌에서 소동이 일었다. 전후사정은 그랬다. 큰딸이 엄마에게 사회 관련 용어가 이해가 안 되어 물었더니, 엄마가 엉뚱한 얘기를 하더란 거다.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엄마는 평소에는 가지지도 않은 자존심을 (쪽)팔렸고, 아이는 엄마한테 다시 물어볼만한 신뢰를 잃었다. 이러한 등가교환은 중요한 결론을 가져왔다. 다시는 큰딸이 엄마한테 공부관련해서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짐이 아빠에게로 넘어왔다. 적지 않은 공부를 하고 상식이 풍부하다고 자처(?)하는 아빠지만 부담스럽다. 조만간 자존심을 팽개칠 위기의 순간이 올 것 같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오늘도 내가 알던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아이들의 머리가 커갈수록 부모의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3.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아빠랑 다정하게 손잡고 다니던 큰 딸이 중학생이 되더니 손은 고사하고 멀리 떨어져 걷는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런 질문을 해대던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꼭 필요한 말을 빼고는 묻는 법이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최근 우리 큰딸 같은 아이들에게 “중2”라는 사회적 신분을 부여했다. 심지어 “중2병”(중학교 2학년의 심리적 상태를 일컫는 말)이 실체가 있다는 연구보고도 있고, 북한의 김정은이 방위병과 함께 중2를 무서워한다는 소문도 있다. 외계인이 중2 때문에 지구침공을 못한다는 믿지 못할 말들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잃었다. 어찌되었건, 중2병을 앓고 있는 큰딸과의 대화는 어렵다. 아! 이런...

 

   아빠 입장에서도 어찌어찌해서 다정하게 말이라도 붙여볼라치면 싸늘하고 가시 돋친 대답이 돌아온다.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혼자서도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기 일쑤다. 우리 큰애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이기는 한데, 사춘기라 부르는 이 시기를 지혜롭게 잘 지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것 또한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누구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고 부모 스스로가 애걸 복절할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여러 경계를 지나 우리를 만들었듯이, 또 다른 시간이 우리 아이들을 어른으로 만드는 발효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의 눈빛은 분명 저항의, 이유 없는 분노의 그것이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엄마 아빠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의 말을 그냥 들어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맥락의 의미를 이해하고 편하게 아이를 받아들여줄 부모가 필요한 것이다. 어린아이로서 부모에 대한 응석이 아니라 성장해가는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인정받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날 때 부모는 또 다른 성장기를 지난다.

 

 

#4.

   저녁밥상에서 여러 설전으로 인해 밥알이 포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밥상머리의 기적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우리 집은 일주일 중 네다섯 번은 가족들 모두가 6인 상에 둘러앉아 조촐한 저녁을 맞는다. 아름다운 밥상을 예상하거나 둘러앉은 의도는 거창한데, 밥상은 늘 시끄럽고 어쩔 때는 말다툼으로 끝을 보고야 만다. 애들끼리, 부모끼리, 부모와 애들 간에 사소한 입씨름이 어느덧 반찬처럼 놓여있다. 멀리서 보면 평화로운데 가까이서 보면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애들 눈치(?)보면서 서로간의 대화를 끊이지 않게 하여야 한다. 아이들이 오늘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몇 마디 말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의 쏟아낸 말 속에는 하루를 지탱해온 감정의 농도나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때문에 부모들에게는 그 몇 마디가 지니는 행간의 의미까지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내뱉는 말이 사실적이면서도 거칠더라도 그 속에 아이들의 진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부모는 그 말의 형식이나 품격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그 의도와 내용에 주목하여야 한다.

 

   부모가 보기에 많은 것들이 서투른 아이들에 대해, 성인의 기준으로 말의 형식을 재단하고 그 내용의 격을 심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 같다. 당장은 십대의 잦은 욕설이 귀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 옛날 거친 욕을 해대던 지금의 부모들도 그 십대를 거쳐서 완성되지 않았던가. 우리 또한 부모들을 분노케 했던 한때의 철부지였다.

 

우리도 한때 철부지였고, 하고픈 말과 표현되는 말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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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밴드가 유행이다. 밴드에 가입하라는 말을 처음 듣고, 나는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게 없는데, 혹시나 보컬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돌아본 대답은 당신 같은 보컬은 필요 없고, 아는 사람끼리 모여 인터넷상에 모임을 만드는 밴드란다. 아무튼 나는 초, 중, 고 밴드에 가입했고, 추억 속에 남아있는 여러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 장의 파노라마 같은 살아온 얘기들을 술잔 속에서 듣고 많이 웃고 때론 안쓰러워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여자동창생들은 남자 동기들보다 결혼이 빠르다. 그 덕에 군대 간 아들이 있고, 대학에 다니는 딸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을 잘했던 여자 친구가 밥을 먹다가 하소연을 했다. 나름 열심히 애들을 키우고 없는 살림에도 학원과 과외를 시키고, 소위 ‘In 서울’(서울시내에 있는)의 대학에 딸을 진학시켰다고 한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딸이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자신은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돈벌이를 했던 엄마의 악착같은 모습이 싫었고, 가끔씩 술에 취해 들어온 엄마의 뒷모습이 너무 싫었다고 했다. 혼자 집에 돌아와 저녁밥상을 차려먹는 것도 싫었고, 친구들한테 엄마의 직업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던 자신이 더더욱 싫었다고 했다.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친구의 말끝에 배어나온 서운함이 어미 새의 안타까운 절규처럼 들렸다. 누군가 따라준 소주잔 속에 적막이 맴돌았고 일행은 조용히 잔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부모의 인생을 타박할 때 부모는 무슨 변명을 하고,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추스를 수 있을까! 어렵다. 우리네 인생은....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건넬까. 주점의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깜빡거렸고, 물기어린 눈빛 몇 개가 공감의 잔을 함께 들었다. 엄마를 위하여.

 

  

#2.

엄마의 삶 어느 부분이 딸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엄마는 몇 마지기 땅도 없는 빈한한 집에서 태어나 실업계 고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서울에서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하고, 사랑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았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부터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남편이 자리를 잡지 못해 여기저기 직장을 떠돌 때도 집안을 지탱했던 사람도 그녀였고, 아들이 군대 가고 딸이 대학갈 때까지 여느 슈퍼맘처럼 고생한 사람도 그녀였다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통 사람들이, 엄마들이 살아온 궤적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인데, 그 일상적인 삶이 왜 딸아이를 서럽게 했을까?

 

모를 일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상처가 아이에게 옹이처럼 자라났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짐작컨대 열심히 살아온 엄마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 둘을 키우며 희생하고 즐기지 못한 엄마의 인생이 안쓰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의 아쉬웠던 삶의 실루엣이 자신에게 투영돼 그 것이 어린 딸의 가슴에 슬픔을 자라게 하지 않았을까. 술 취한 엄마의 목소리에 담긴 연민이 한참 예민했던 시절의 여고생에게 여자의 일생을 생각해보게 하지 않았을까. 예쁘게 자라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았을 때 문득 엄마의 얼굴이 겹쳐져서 자신의 성장이 두려워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부쩍 커버린 정 많은 딸은 엄마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화내고 있는 것이리라.

 

 

#3.

이 땅에서 살아가는 어머니들은 헌신과 희생의 상징이자 기호이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영혼을 통해 어머니의 헌신과 진정한 가치, 한없는 베풂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한다. 어머니의 시적 추상화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구체화된 아이들은 가슴아파하고 눈물짓는다. 어머니에 관한 사회적 관점이 보통의 연민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그 눈물이 더 흔하다.

 

자식들이 비록 철부지라 하더라도 어찌 이를 모를까?

 

인생의 어느 한때, 철없던 그 한때에는 어떤 철학적인 조언과 설득도 철부지의 귀를 뚫지 못한다. 남자다움이 여성성을 억누른 사회에서 성장한 그들의 귀와 눈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르익은 후회가 그들을 철들게 하고, 그 철부지들은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사모곡

 

이제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나의 별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

어. 머. 니

 

김종해, <풀>

 

 

#4.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보내주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이런 어머니의 얼굴을 모르고 평생을 살다 가기도 한다. 고 정채봉 시인이 그랬다. 시인이 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서러움으로 인해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슬픈 시어로 그려냈다.

 

단 5분 동안이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시간 안에 단 한번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휴가를 나오신다면 시인은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이 진정 궁금하다. 이제는 고인이신 정채봉 시인께서 하루라도 휴가를 나오실 때다. 가족과 팬들을 위해 하루쯤 말미를 내시라.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5.

어린 시절, 특히 8, 9살 무렵의 어린 아이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엄마의 상실이라고 한다. 그 시절에 엄마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 세상이 좋게 변해가고 아이들이 커나가도 엄마의 삶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낳고 기르는 것과 같은 엄마로서의 삶이 전부가 아닌 아내로서, 여자로서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단한 엄마의 삶만큼이나 이 땅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인생도 애달프다. 팍팍한 엄마의 하루는 자식들의 어깨에 그대로 놓이기도 하고,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로 자리 잡기도 한다. 굳은살이나 상처는 그때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에 어머니랑 겸상은 드물었다. 어머니의 식탁은 주로 부엌의 부뚜막이었거나 가족들이 상을 물린 후에 그 밥상에서 잔반을 처리하는 것이 예사였다. 갈치나 조기구이는 늘 아버지의 밥상에 먼저 놓여있었고, 어쩌다가 아이들의 숟가락에 살이 발리어진 게 전부였다. 생선가시에 붙은 먹을 게 없는 생선살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눈에는 엄마가 어디서 끼니를 해결하는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한 밥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고, 그 때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었기 때문이다. 힘든 밭일에 지친 엄마를 보고도, 엄마의 발뒤꿈치가 갈라지고 거칠어져도, 일 년에 한 번도 외갓집에 못가더라도 엄마는 괜찮은 줄 알았다. 심순덕 시인도 어린 시절 그렇게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시가 더 마음 아프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 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덕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 인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6.

아이들뿐만 아니라 엄마를 잃은 어른들도 ‘엄마’를 그냥 부르지 못한다. 발음은 엄마라 부르지만 그 것은 세상 모든 것이거나,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안타깝고 서러운 눈물이어서 그렇다. 이들의 눈물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모성애와 여성성을 온전히 간직한 엄마를 위한 사회학이 필요하다. 어려운 개념과 화려한 수사가 필요한 이론적인 사회학 말고.

 

스무 살 무렵 군대 가는 날 아침 분명 시골집 앞에서 엄마의 배웅을 받았다. 잘 다녀오라는 눈물바람 없는 밋밋한 인사로 기억된다. 그런데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광주로 떠나는 버스 옆에 다시 엄마가 서 계셨다. 그냥 웃으시면서, 밥맛없으면 찬물에 말아먹으라고 하셨다.  "... ...."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엄마의 말씀과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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