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처럼 고향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의 얘깃거리들이 안주로 등장했다가 결국에는 아이들 문제에 모두 자리를 내주었다. 시작은 학업성적으로 시작해서 학교생활에 관한 문제, 이성교제 문제, 인성문제에 이르기까지 교육전문가들이 따로 없을 정도로 다양한 대화를 나눈다. 이런 자리에는 반드시 분노를 내보이는 아빠들이 꼭 있다. 바로 이 친구처럼.

 

   나쁜 놈들에 대한 기소권을 독점하는 기관에 근무하는 친구는 부부공무원으로 두 딸을 키우고 있다. 근무하는 조직의 특성상 폭탄주를 잘 제조하기 때문에 자기 앞에 늘 술잔을 쌓아놓고 있다. 이 친구 하는 말이 고1인 딸이 남자친구 문제 때문에 고민이란다. 엄마한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아빠에게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고 한다. 가끔씩 외식을 하면서 자그마한 정보라도 얻을라치면 딸이 묵묵부답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라는데 같은 부모입장에서 충분히 이해가 간다. 큰 아이에 관한 정보교환이 잘 안된 것을 보면, 부부간에도 대화가 잘 되고 있지는 않아보였다.

 

   이 친구는 20년 이상 행위가 나쁜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가정이나 사석에서도 조직의 특성에 걸맞은 말투를 구사한다. 마치 나쁜 행동에 대해 캐묻는 것 같은 말투이다 보니 친구들도 가끔씩 눈살을 찌푸릴 때가 있다. 특정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분들의 토속적인 말투나 특정 직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직업적인 언어구사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과 선의의 충돌을 빚기도 한다.

 

   물론 아빠의 말투가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딸의 침묵에 본질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평소에 아빠와 딸의 대화기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학교문제, 공부문제, 이성문제까지 원만하게 진행된 가족이라면 이러한 사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친구는 잦은 야근과 친목모임,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테니스장에서 동호회활동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친구가 저녁식사 시간에 집에 있을 확률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그나마 가족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도 아이들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본인의 호기심에 따른 대화를 일방적으로 했었음에 틀림없다. 술잔이 몇 순배 돌면서 친구들의 눈빛은 ‘그러니까 가족한테 평소에 잘하지’라는 의미의 그것이었지만, 내심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 겉도는 아빠의 가련한 신세.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엄마도 안심할 순 없다.

 

 

#2.

   우리 집에는 중2인 큰딸에 이어 중1인 둘째딸이 버티고 있다. 대형폭탄(?)을 2개나 안고 있는 셈이다.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날 때가 가끔씩 있다. 서로 간에 공용 언어(?)도 약간 다르고, 대화주제의 전제나 시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요사이 중학생들이 쓰는 단어는 거의 외국어 또는 외계어 수준이다. 줄임말도 그렇거니와 소위 카톡을 비롯한 채팅은어는 짐작조차 쉽지가 않다. 낯선 신조어를 못 알아들어서인지 대화 자체가 단절되거나 삼천포로 빠지기 십상이다. 때로는 찬바람을 동반한 썰렁한 분위기로 종결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대화의 불통을 세상 탓이나 아이들 문제로만 돌려서는 안 될 것 같다. 청소년 시기의 특정단어 사용문제나 부모와 아이들 간의 대화단절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386세대인 부모들도 한때 “X세대”라 불리던 시기가 있었다. 불과 20여 년 전에 언론에서는 청년층인 20대, 30대 초반에 대해서 소위 X세대라고 명명했다. 언론은 그들의 의식과 행동이 기성세대들과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 주목을 했었고,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평가했음에 틀림없다. 하물며 그들이 10대 때에는 어떠했겠는가. 그들은 문제 많은 청소년들이었다. 모조리.

 

   유교적 관념이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세대 간의 대화가 원활하지 않다. 그 이유는 사회구조상 뚜렷한 위계서열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고. 가정이나 조직 내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주로 부모나 상급자들이 갖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현장을 돌아보자.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선생님에 의한 일방적 교수법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 학생의 입장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말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이는 개인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회시스템상 한계다.

 

   사회적 분위기나 전통적 의식에 깊게 뿌리박혀있는 부당한 것들을 한꺼번에 바로 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가정 내에서의 대화문화는 부모가 좀 더 노력한다면(아이들과 함께 노력한다면) 개선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우리 부모세대들은 생존의 문제에 관한 압박 때문에 그저 ‘무뚝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모뿐만 아니라 70년대와 80년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다정다감한 부모의 모습은 거의 보기 힘들었다. 그때에는 부모나 자식이 함께 둘러앉은 대화의 장도 별로 없었다. 요즈음의 부모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경제적 여유와 수준 높은 교육으로 인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나갈 가능성이 많아졌다.

 

   문제는 주어진 환경의 가능성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대화주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부모와 아이들이 마음을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3.

    세계적인 임상심리학자인 토니 험프리스는 ‘아는 만큼 행복이 커지는 가족의 심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건강한 가족의 대화법을 이야기한다. 첫째,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둘째, 상대방을 판단하지 마라. 셋째, 어떤 말이든 포용하라. 넷째, 상대방에게 공감하라. 다섯째, 상대방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라. 여섯째, 가능성을 열어두고 단언하지 마라. 일곱째,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표현하라. 여덟째, 말과 행동에 대해 일관성을 지켜라.

 

   전문가들의 이야기는 구구절절 옳다. 특히 이론에 필 꽂힌 일부 심리학자들 말고, 경험이 풍부한 임상심리학자나 일부 정신과의사들의 현장체험담은 일반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토니 험프리스 박사의 책에 기술된 방법론도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얘기할 수 있는 내용으로 아주 유익하다. 다만 내 몸에 체화되지 않는 이상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사전예고 없이 직면하는 현실의 불편한 상황에서 이러한 대화법을 기억해 행동으로 나타내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건강한 대화를 위한 기술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하고, 밥상머리나 거실뿐만 아니라 가족이 존재하는 모든 공간에서 적용된다. 우리 가족에게 맞는 대화법은 무엇일까? 스스로 고민해보자.

 

 

#4.

*부모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자

   너무나 당연하게도, 먼저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가정이나 조직에서 부모나 윗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고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분위기가 훨씬 자연스럽다. 아이들이나 아랫사람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은 상담이거나 고충처리에 그칠 공산이 크다. 지금 부모들 세대처럼 부모들 대하기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을지라도 아이들에게 부모는 여전히 편하면서도 어려운 존재다. 문제 있는 상황을 인식하거나 그 해결방법에 관한 고민도 살아온 세월과 경험이 많은 부모의 몫이다. 대화주제를 선정하는 것은 공동으로 할 일이지만 부모들이 체득한 지식과 경험은 아이들을 풍부한 간접체험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

 

   아이가 이런저런 실수를 하거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풀이 죽어있을 때 부모가 먼저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그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실수한 아이에게 실수로 인한 당혹감과 부모에 대한 책망이 배가되어 상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풀이 죽어있는 아이에게도 기분전환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모가 성적표에 나타난 숫자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아이 스스로가 분발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물론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고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평소에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나 행동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식탁에서, 거실에서, 때로는 공부방에서 수시로 나누는 대화 속에서 부모가 조금만 관심을 더 기울인다면 아이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의 맥락의 의미를 가슴속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람직한 대화의 기본중의 기본은 경청과 관심이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일방적인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다. 성인끼리 대화하는 경우에도 서로의 정치사회적 코드나 대화예법이 맞지 않으면 파열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갭이 크지 않았던 부모들 시절과는 달리 요즘의 물질문명은 속된말로 Lte급이다. 이러다보니 물질문명과 정신문화 사이에 지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지체현상은 부모자식간의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마치 화성남자 금성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아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나 사물에 관한 이해의 정도가 차이가 많을 수밖에 없다.

 

   우리 큰아들(초2)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빠에게 할 말이 많다. 오늘은 무엇을 먹고, 친구랑 무슨 놀이를 하였으며, 딱지를 몇 장을 잃었는가, 집에 와서 책을 몇 권 읽었는가에 대해서 속속들이 얘기를 한다. 둘째딸(중1)은 주로 친구와 학교생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친구와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영수 방과후교실에서 무슨 단원을 공부했으며, 친구 카카오스토리에 올라와 있는 갖가지 스토리를 이야기 한다.

 

   큰딸(중2)은 사춘기 소녀답게 까칠하기 그지없다. 동생들에게도 존엄한 명령투로 이야기를 하고 부모에게도 선전포고에 가깝게 자신의 일상을 말한다. 주로 학교방송반에서 아나운서로 날린 멘트와 음악을 이야기하고, 아이돌 그룹 샤이니(난, 그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지만)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이야기하며, 자주 바뀌는 자신의 꿈과 직업에 대해서도 관심 없는 듯 이야기하곤 한다. 마치 남의 얘기처럼.

 

   부모에게는 관심 밖의 사항일지라도 아이들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있다. 또한 아이가 얘기한 주제가 하찮아 보이지만 아이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딱지치기, 간식거리, 아이돌 이야기가 부모들에게 무슨 감흥이 있을 것인가? 부모들에게는 공부이야기가 제일인데. 과연 그러한가? 아이들의 눈은 공부이야기를 할 때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놀이나 친구, 아이돌스타 일상을 얘기할 때 더 빛난다. 하지만 부모는 그 눈빛이 못마땅하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그 감정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너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왜 쓸데없는데 관심을 갖지!!”

 

   이렇듯 아이들이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 할 때 부모가 편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아이들은 자신이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 확신은 아이의 자존감 향상은 물론 스스로 더 깊은 속내를 부모에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중립적인 판단기준을 갖자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작은 실수로부터 돌아오는 부모의 반응이다. 작게는 그릇을 깨거나, 동생을 울리거나, 책상정리를 못한 것부터 크게는 시험을 망친 것까지 아이들이 실수할 수 있는 상황은 주위에 널려있다.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도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실수에 대한 아이들의 기준과 성인의 기준이 다르다보니, 성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아이들의 실수는 더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부모들이 아이들의 자잘한 실수에 대해 습관적으로 히스테릭하게 반응하게 되는 경우 아이들의 공포심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실수로 벌어진 상황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부모의 꾸중이 더 두려운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아이의 행동과 부모의 반응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크게 보면 아이들의 실수 또는 그 상황에 중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그로 인해 발생 가능한 아이들의 상처에 중점을 들 것인가가 문제다. 바림직한 것은 부모가 아이의 실수 자체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아이의 감정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곤혹스러운 상황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거기에 집중하다보면 아이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특정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다 보면, 비로소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보인다.

 

   아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중 하나는 “너는 항상 왜 그래?”일 것이다. ‘항상’이라는 단어 속에는 부모들이 은연중에 과거의 잘못과 현재의 상황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위 낙인을 찍고 있는 것이다. 네 살배기도 부모에게 야단맞았던 상황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부모의 눈치를 보곤 한다. 실제로 습관적으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기준에서는 아이의 잘못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이러한 엄격한 기준을 갖다보면 나도 모르게 “너는 왜 그래?”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입장을 바꿔보면 “너는 왜 그래?”는 부모 자신에게도 가장 듣기 싫은 소리임에 틀림없다. 편견을 가진 부모의 시각은 아이를 조화롭게 관찰할 수 없다.

 

 

*원활한 소통을 위한 기술을 갖자

   부모와 아이가 서로 편한 대화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위에서 말한 세 가지가 전제된다면 다른 방법론이 필요할까 싶지만. 굳이 덧붙인다면 아이들은 우회적이고 비유적인 표현보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원한다. 대화 도중에 해석이 필요한 말보다는 직접적이고 분명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직 아이에게는 중의적 표현이나 뉘앙스가 다른 표현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 수 있다. 시적해석이 필요 없게끔 분명하게 표현하자.

 

   아이들은 가정 내에서 부모의 말과 행동을 배우고 자란다. 외모나 성격을 닮는 생물학적 유전은 물론이고 행동습관이나 언어습관도 유전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특유의 말투나 상투어를 자신도 모르게 체화시켜 다시 부모에게 표현하곤 한다. 때문에 부모의 말과 행동이 일관성이 없는 경우 그 행동을 닮아가는 아이들의 배움에도 문제가 있다. 가정 내에서 부모의 말과 행동이 일관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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