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부모들이여, 푸르디푸른 십대 때 꽃다운 뜻을 품어본적이 있었던가요?

그 풋풋한 시절에 날카로운 희망에 가슴을 깊이 찔려본적이 있었나요?

하여, 부모들이여, 아름다운 시절에 가졌던 꿈을 지금 이루었나요?

혹여나, 지나간 그 시절에 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요?

하면, 못내 아쉬움에 시간의 뒤안길을 돌아다보지는 않았나요?

어젯밤 꿈속에서나, 투명한 소줏잔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 꿈의 실체를 보지는 않았나요?

 

누가 이 질문과 대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한때 꿈 많은 소년소녀였는데 말이지요. 많은 우리의 부모님들은 보릿고개를 넘고, 산업화의 파도를 힘들게 넘느라 매일 매일 자라는 아이들의 꿈을 몰랐을 테지. 다행히 그때 아이들의 하루는 배고픔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의 가슴은 많이들 비어있었으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어떤 꿈을 갖고 어떤 아름다운 뜻을 품고 살고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성인들도 불편한 이 사회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미담보다는 악담을, 배려보다는 경쟁을 먼저 알아버린 우리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편리한 전자기기 속에 파묻히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기계적으로 반복학습을 하는 아이들에게 파릇한 새싹이 돋아날 토양이 남아 있을지 의문입니다.

 

 

#2.

누군가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대부분 나는 이런 저런 직업을 갖고 싶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꿈은 직업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지요. 물론 꿈과 성취한 직업이 같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꿈은 직업이라는 상태의 범주를 벗어난 행위와 실존의 카테고리입니다.

 

문제는 꿈과 직업을 동일시하는 성인과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이는 치열한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맹점중 하나입니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선망하는 직장에 취직을 하는 것이 이라는 이름으로 과대 포장됩니. 우리가 진정 바라는 꿈을 담을만한 여유가 그들 가슴속에는 없습니다. 과잉정보와 과잉경쟁이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무엇으론가 꽉 채워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까닭입니다. 여백이 없는 공간에 원하는 물건을 채울 수 없듯이, 여유가 없는 가슴에도 원하는 뜻을 채워넣을 수 없습니다.

 

하여, 잠시 멈추고, 비워두자는 이야기가 선문답을 넘어 시대의 화두가 되는 이유입니다.

 

꿈은 무언가 간절하고, 이루어야 할 뜻이 있고, 가슴에 여유가 있을 때 푸르게 자라납니다.

 

 

#3.

우리 사회의 과도한 경쟁은 아이들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깊은 성찰 없이 사회시스템을 만들어낸 기성세대 때문이지. 숨 막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들고 격차가 큰 계층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배울 것은 죽어라고 공부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공부만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그럴듯한 직업을 갖더라도 이 답답한 사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는 있습니다. 단지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직업현장을 떠나 아이들의 교육현장을 돌아봅니다. 정권이 바뀌고 교육부장관이 바뀔 때마다 너무 당연하게 바뀌는 교육정책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거기에 무슨 아이들을 위한 철학이 있고, 이 나라의 백년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습니까? 외국에서 몇 년 공부해 교육공학 학위를 받아온 기술자나 이론적으로나 체험적으로도 미숙한 탁상관료들이 만들어 낸 조잡한 정책이 있을 뿐입니다. 일명 좀비양산 프로그램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조물에 아이들이 맞춰지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미신을 품습니다. 하지만 정권은 유한하고, 교육부장관은 단명하고 남는 것은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주어진 혼란뿐입니다. 일례로 대한민국에서 입학사정관은 웃기는 얘깁니다.

 

우왕좌왕하는 교육현장, 죽어라고 공부하지 않으면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사교육시장의 상인들과 독서실의 원장밖에 없습니다. 부모들도 경쟁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피로사회의 주인공이 됩니다. 충혈된 눈으로는 아이들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 , 아름다운 뜻이 자라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암기식 공부할 시간을 줄여주고, 삶의 양분이 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는 정책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자기 생각 없이 10대를 보낸다면, 그 다음 20, 30대에는 생각이 저절로 만들어지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복마전 같은 20대의 취업시즌과 대략 난감한 30대의 결혼시즌에서 또다시 홍역을 치르느라 자기생각을 만들어낼 겨를이 없지요. 오히려 정체성 없는 사회에 대한 분노만 키우고 맙니다.

 

 

#4. 잠시, 삼천포로 빠지면

요새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직업체험을 시작합니다. 당연 학교 과제물이죠. 다양한 직업세계를 미리 알아보고 조사하고 체험하라는 의미에서 일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직업이나 소득수준에 따라서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은 한계가 지워집니다. 소득이 높은 직업에 종사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직업이나 유사 직업의 소개를 통해 아이들의 눈높이를 높이고자 합니다. 반면 소득이 낮거나 사회적 인지도가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는 것조차 꺼려합니다. 부모의 직업이나 소득수준에 따라서 직업체험의 편차가 발생하는 문제점은 어떻게 볼 것인가요? 이는 직업의 대물림까지는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편차가 빚어낼 결과물 때문에 속내가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들은 보고 듣는 대로 자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가진 고품질의 교육이 중요하고, 공동체를 조망할 수 있는 체험학습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깊은 고민이 부족합니다. 결국은 좋은 의도가 바람직한 결과를 빚어내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육당국에서는 핀란드식이니 아일랜드식이니 무늬를 바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지만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실질적이지는 않습니다. 예산 문제니 전문가 확충이 문제니 하면서 졸속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구조적인 한계는 시스템적 반성을 불러오기보다는 종국적으로는 한 가정의 문제로 다시 환원됩니다. 결국 부모의 책임이고, 부모의 문제라라는 얘깁니다.

 

 

#5.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꿈의 새싹을 틔울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해답은 꿈이 자랄 수 있는 양질의 토양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양질의 토양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이 어려운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사회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사회는 아주 나쁜 사회입니다. 교육문제 또한 부모들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는 부정의를 넘어 부당하기까지 합니다. 국가나 정치사회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는 구성원의 안전과 행복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구성원이 국가나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불행하다면 그 구성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 사회시스템을 조정하는 사람들의 문제라는 겁니다.

 

아이들은 생각을 낳는 좋은 책을 읽고, 배움이 될 만한 사례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 체험의 공간이 제공되면 자연스럽게 꿈을 꿉니다. 숨 막히는 학교시간표, 치열한 시험의 연속, 학대에 가까운 이중언어 습득의 공포,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교육의 부실로 인해 아이들은 메말라갑니다.

 

과거 핀란드나 아일랜드도 자살문제나 교육문제가 큰 사회적 문제였던 적이 있는 나라들입니다. 현재는 어떠한가요? 교육시스템과 사회안전망에서 세계적인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현저한 개선의 이면에는 문제 있는 사회시스템을 바꾸고자 노력했던 정치인들과 전문가들,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려울까요? 우리에게는 없는 그 무언가가 그들에게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현재의 우리가 그들과 다른 것은,

 

우리사회가 가진 근시안적 조급증, 미래를 내다보는 교육철학의 부재, 졸속정책에 대한 진지한 반성적 고려의 부족, 사회적 합의도출을 위한 노력의 부족, 정치인과 교육관료들의 문화적 사대주의. 이것들은 우리가 과감히 버려야할 과거의 유산입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이것들은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한 시간을, 진지한 반성을 토대로 전문가, 정치권 및 공무원,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무조건 핀란드의 정책을 도입하면 한국의 아이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핀란드의 교육정책이 꽃피우는 것은 핀란드의 사회현실을 토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체질개선 없이는 종국적으로는 귤화위지가 되고 말 것입니. 먼저 한국적인 교육문제를 냉정히 분석판단해보고 그 토대위에 외국의 선진화된 교육정책의 도입필요성을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 우리의 답답한 교육정책이 환골탈태가 가능하다면 굳이 외국의 제도를 수입해야할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의 분노수준을 높여주는 이 문제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6.

양질의 토양을 만들기 위해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첫째는, 공부시간 이외에 여유시간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여유시간이란 놀 수 있는 시간, 비어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여유 있는 시간이 있어야 교실을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고, 자연을 느끼고, 타인들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의문과 고민과 생각을 위해 다양한 책을 읽을 수밖에 없고, 풀리지 않은 어떤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대화를 시도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가진 생체에너지가 공부하는 데만 소용되어질 때 아이들은 행복을 못 느낍니다. 열려진 공간에서 마음껏 뛰놀고, 소리 지르고 에너지를 여러 방향으로 발산할 때 아이들은 살아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것입니다. 예체능과목 수업시간이 줄고, 학원이 아니면 함께 놀 친구가 없고, 공부라는 하나의 기준에서 성적순위만이 유일한 평가기준이 되는 이 교육현실이 부모들은 반갑습니까?

 

둘째는, 아이들의 사교육 의존도를 낮춰주어야 합니다. 학원을 끊어버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줄 수 있는 부모의 관심과 노력이 있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인생의 주체가 됩니다. 특히 공부에 있어서는 알아서 자기주도학습을 하게 된다는 거죠. 수동적인 학습이라는 타성에 젖게 되면 암기된 공부만 남게 되고 공부하는 주체는 소외됩니다. 스스로 학습방법과 학습량을 결정하고, 자신의 노력한 결과에 만족할 줄 알게 되면서 아이들은 정신적인 성장을 합니다. 그러한 성장은 직업이라는 좁은 범주를 뛰어넘어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진짜 하고 싶은 꿈을 발견하고 자라게 할 것입니다.

 

셋째는, 책을 읽을 수 있고, 세상과 공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청소년일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었나요? 공부라고 대답하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부모들은 독서와 부모와의 대화의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책은 인간에게 생각을 일깨우고, 그것을 크게 하고, 또 다른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게 합니다. 어느 비범한 천재도 하늘아래 새로운 것을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만들어 논 동서양의 고전과 양서를 통해 현자들은 하나의 발자취를 남깁니다. 또한 책은 세상과 공감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입니다. 책 한권을 통한 간접체험의 힘은 주변의 평범한 인간관계에서는 얻지 못할 지혜를 주기도 합니다. 책을 많이 읽고, 사색할 수 있는 가족 공동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올곧게 바라보고, 가슴으로 세상을 안을 수 있는 힘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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