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밴드가 유행이다. 밴드에 가입하라는 말을 처음 듣고, 나는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게 없는데, 혹시나 보컬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돌아본 대답은 당신 같은 보컬은 필요 없고, 아는 사람끼리 모여 인터넷상에 모임을 만드는 밴드란다. 아무튼 나는 초, 중, 고 밴드에 가입했고, 추억 속에 남아있는 여러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 장의 파노라마 같은 살아온 얘기들을 술잔 속에서 듣고 많이 웃고 때론 안쓰러워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여자동창생들은 남자 동기들보다 결혼이 빠르다. 그 덕에 군대 간 아들이 있고, 대학에 다니는 딸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을 잘했던 여자 친구가 밥을 먹다가 하소연을 했다. 나름 열심히 애들을 키우고 없는 살림에도 학원과 과외를 시키고, 소위 ‘In 서울’(서울시내에 있는)의 대학에 딸을 진학시켰다고 한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딸이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자신은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돈벌이를 했던 엄마의 악착같은 모습이 싫었고, 가끔씩 술에 취해 들어온 엄마의 뒷모습이 너무 싫었다고 했다. 혼자 집에 돌아와 저녁밥상을 차려먹는 것도 싫었고, 친구들한테 엄마의 직업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던 자신이 더더욱 싫었다고 했다.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친구의 말끝에 배어나온 서운함이 어미 새의 안타까운 절규처럼 들렸다. 누군가 따라준 소주잔 속에 적막이 맴돌았고 일행은 조용히 잔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부모의 인생을 타박할 때 부모는 무슨 변명을 하고,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추스를 수 있을까! 어렵다. 우리네 인생은....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건넬까. 주점의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깜빡거렸고, 물기어린 눈빛 몇 개가 공감의 잔을 함께 들었다. 엄마를 위하여.
#2.
엄마의 삶 어느 부분이 딸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엄마는 몇 마지기 땅도 없는 빈한한 집에서 태어나 실업계 고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서울에서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하고, 사랑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았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부터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남편이 자리를 잡지 못해 여기저기 직장을 떠돌 때도 집안을 지탱했던 사람도 그녀였고, 아들이 군대 가고 딸이 대학갈 때까지 여느 슈퍼맘처럼 고생한 사람도 그녀였다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통 사람들이, 엄마들이 살아온 궤적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인데, 그 일상적인 삶이 왜 딸아이를 서럽게 했을까?
모를 일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상처가 아이에게 옹이처럼 자라났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짐작컨대 열심히 살아온 엄마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 둘을 키우며 희생하고 즐기지 못한 엄마의 인생이 안쓰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의 아쉬웠던 삶의 실루엣이 자신에게 투영돼 그 것이 어린 딸의 가슴에 슬픔을 자라게 하지 않았을까. 술 취한 엄마의 목소리에 담긴 연민이 한참 예민했던 시절의 여고생에게 여자의 일생을 생각해보게 하지 않았을까. 예쁘게 자라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았을 때 문득 엄마의 얼굴이 겹쳐져서 자신의 성장이 두려워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부쩍 커버린 정 많은 딸은 엄마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화내고 있는 것이리라.
#3.
이 땅에서 살아가는 어머니들은 헌신과 희생의 상징이자 기호이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영혼을 통해 어머니의 헌신과 진정한 가치, 한없는 베풂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한다. 어머니의 시적 추상화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구체화된 아이들은 가슴아파하고 눈물짓는다. 어머니에 관한 사회적 관점이 보통의 연민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그 눈물이 더 흔하다.
자식들이 비록 철부지라 하더라도 어찌 이를 모를까?
인생의 어느 한때, 철없던 그 한때에는 어떤 철학적인 조언과 설득도 철부지의 귀를 뚫지 못한다. 남자다움이 여성성을 억누른 사회에서 성장한 그들의 귀와 눈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르익은 후회가 그들을 철들게 하고, 그 철부지들은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사모곡
이제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나의 별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
어. 머. 니
김종해, <풀>
#4.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보내주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이런 어머니의 얼굴을 모르고 평생을 살다 가기도 한다. 고 정채봉 시인이 그랬다. 시인이 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서러움으로 인해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슬픈 시어로 그려냈다.
단 5분 동안이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시간 안에 단 한번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휴가를 나오신다면 시인은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이 진정 궁금하다. 이제는 고인이신 정채봉 시인께서 하루라도 휴가를 나오실 때다. 가족과 팬들을 위해 하루쯤 말미를 내시라.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5.
어린 시절, 특히 8, 9살 무렵의 어린 아이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엄마의 상실이라고 한다. 그 시절에 엄마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 세상이 좋게 변해가고 아이들이 커나가도 엄마의 삶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낳고 기르는 것과 같은 엄마로서의 삶이 전부가 아닌 아내로서, 여자로서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단한 엄마의 삶만큼이나 이 땅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인생도 애달프다. 팍팍한 엄마의 하루는 자식들의 어깨에 그대로 놓이기도 하고,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로 자리 잡기도 한다. 굳은살이나 상처는 그때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에 어머니랑 겸상은 드물었다. 어머니의 식탁은 주로 부엌의 부뚜막이었거나 가족들이 상을 물린 후에 그 밥상에서 잔반을 처리하는 것이 예사였다. 갈치나 조기구이는 늘 아버지의 밥상에 먼저 놓여있었고, 어쩌다가 아이들의 숟가락에 살이 발리어진 게 전부였다. 생선가시에 붙은 먹을 게 없는 생선살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눈에는 엄마가 어디서 끼니를 해결하는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한 밥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고, 그 때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었기 때문이다. 힘든 밭일에 지친 엄마를 보고도, 엄마의 발뒤꿈치가 갈라지고 거칠어져도, 일 년에 한 번도 외갓집에 못가더라도 엄마는 괜찮은 줄 알았다. 심순덕 시인도 어린 시절 그렇게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시가 더 마음 아프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 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덕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 인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6.
아이들뿐만 아니라 엄마를 잃은 어른들도 ‘엄마’를 그냥 부르지 못한다. 발음은 엄마라 부르지만 그 것은 세상 모든 것이거나,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안타깝고 서러운 눈물이어서 그렇다. 이들의 눈물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모성애와 여성성을 온전히 간직한 엄마를 위한 사회학이 필요하다. 어려운 개념과 화려한 수사가 필요한 이론적인 사회학 말고.
스무 살 무렵 군대 가는 날 아침 분명 시골집 앞에서 엄마의 배웅을 받았다. 잘 다녀오라는 눈물바람 없는 밋밋한 인사로 기억된다. 그런데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광주로 떠나는 버스 옆에 다시 엄마가 서 계셨다. 그냥 웃으시면서, 밥맛없으면 찬물에 말아먹으라고 하셨다. "... ...."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엄마의 말씀과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