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하루키'의 소설 중, 진입장벽은 제일 낮은 듯하다. 무난하게 읽어갈 수 있다.
[해변의 카프카]를 통해, 메타포의 혼선에 한번 빠져 봤기 때문에, [1q84]의 달과 리틀 피플에 한번 놀라 봤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생각해 봤지만,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 애써도 '하루키' 소설치고는 난해 하지 않다.
물론 그의 초기작들은 아직 못 봐서 완전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36세, 결혼 6년 차의 나에게, 찬비가 내리는 3월의 중순 일요일, 아내 '유즈'가 다른 남자가 생겼다면서 더이상 함께 살기가 힘들것 같다고 말한다.
출근하는 아내 대신 집안 살림을 돌보며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던 나는 미술대학을 다닐 때는 추상화를 그렸었다.
나의 초상화를 그리는 능력은 대상의 핵심으로 곧장 파고들어 그 안의 것을 집어내는 직관적인 능력을 갖춘 특별함으로 나름 업계에서 인정받는 입지를 갖추었다.
생활의 안정을 위해 선택한 장르이지만 화가로서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리려는 의욕도 사라졌다.
나 보다 3세 연하의 아내 '유즈'는 원래 사귀던 여자친구의 고교 동창이었는데 내가 한눈에 반해서 사귀되고, 결혼까지 이어진 인연이었다.
나에게는 3살 아래의 여동생이 있었다. 선천적 심장판막증으로 대수술도 성공리에 마쳤지만, 열두 살의 나이에 갑자기 죽게 된다. '유즈'는 그 죽은 누이동생을 떠올리게 했다. 외모보다는 그녀의 표정, 특히 눈의 움직임과 반짝이는 무언가, 빛나고, 생명력이 가득한, 그것은 긍정적으로 반짝이는 의지, 즉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었으며,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아내의 통보 이후, 집을 나와 한 달 반 동안 낡은 자동차와 함께 동일본 지역을 돌아다닌다.
자동차도 망가지고, 지쳐갈 무렵 문득 나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대학 동기였던 절친, '야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그의 아버지 '야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바다가 조금 보이는 산위의 집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집에서 살았던 9개월가량, 정체불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나는 생각이 좀 더 커지고, 여전히 그리운 아내와 다시 합치게 된다.
그리로부터 3년 후 나는 그 산 위에서의 삶을 돌이켜 본다. 그리고 소설은 그 이야기이다.
집주인이었던 '야마다 도모히코'는 저명한 일본화 화가이다.
90세가 넘어 요양원에서 지내지만 그가 남겨둔 집에서 그의 물건들을 사용하며 지내는 동안, 시내의 문화센터 그림 교실에서 강사일도 하게 된다.
어린이와 성인반을 지도하면서 두 명의 유부녀들과 교제를 하기도 한다.
집주인이 남겨둔 작업실을 쓰면서 소리 없는 욱신거림 같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림의 가닥이 잡히지 않아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집주인이 남긴 오래된 책들을 꺼내 읽고, 그가 수집했던 레코드 컬렉션, 클래식, 오페라, 실내악 LP 판을 들으면서 소일하던 중
소음을 들었고 정체를 알려고 기웃거리던 중, 다락방에 있는 수리부엉이를 보게 된다. 그리고 철저히 포장된 채로 감춰졌던 '야마다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그림을 발견한다.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메모지가 붙어있다.
기이하고 신비한 이 그림은 너무도 인상적여서 나를 사로잡는다.
이 그림은, 사실적인 피가 흐르는 꽤 폭력적인 그림이었다.
그는 주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온화하고 평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아스카 시대의 복식 남녀 네 명이 등장하는데,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심장을 칼로 베었고 피가 낭자했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놀라운 표정의 여인과 남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땅속에서 뚜껑을 열고 이 광경을 올려다보는 또한 명의 기묘한 목격자가 마치 본문의 각주처럼 왼쪽 아래에 그려져있다.
메모지에 적힌 [기사단장 죽이기], 기사는 일본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 또는 근대 유럽의 직함이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그 첫머리에 기사단장 죽이기 장면을 떠올린다.
희대의 바람둥이 '돈 조반니'가 꼬시려고 하던 '돈나 안나'의 아버지인 기사단장과 결투 끝에 죽이는 장면, 지켜보던 여인은 '돈나안나'이고, 또 한 명의 남자는 돈 조반니의 하인, '레프렐로'로 연상되지만, 또 다른 목격자는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 공개되지 않은 그림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종류의 힘이 넘쳐나는데, 그 암시를, '야마다 도모히코'의 흔적을 찾고 싶어진다.
'야마다 도모히코'는 일본 화단의 중진으로 세간의 명성은 자자하지만, 공식 석상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이 집에 틀어박혀 괴팍한 창작활동을 해왔다.
한때 모더니즘 회화를 지향했던 그가 1936-1939년 빈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일본화 화가로 전향을 했는데 일본의 고대 풍경, 특히 아스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려왔다. 그리고 그의 전향 결심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네 달 동안, 그림 하나 그리지 못하던 중, 에이전시에게서 연락이 온다. 초상화의 의뢰이다.
아내가 떠난 시점을 계기로 인생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나는 더 이상 상업용 초상화를 그리지 않겠노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의뢰인은 나를 지명해서 거액의 금액을 제시해왔다고 한다.
'와타루 멘시키'는 54세의 남자로 내가 사는 산위 저택에서 보이는 근사한 저택에 사는 남자이다.
그는 나의 초상화가 보는 이의 마음을 예사롭지 않은 각도에서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며, 나의 집에 며칠에 한 번씩 방문하여 직접 모델을 서겠다고 제안하며, 그림의 형식은 나의 자유의사에 맡기겠다고 한다.
IT 관련 회사 경영을 하다가 은퇴한 그는 가족이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영국산 고급차를 4대나 소유하고, 고급 진 옷과 잘 가꾸어진 은발의 사람이다.
함께 오페라 음악을 듣고 이야기하면서 초상화를 그려나간다.
'멘시키'에게 15년 전 교제했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딸을 출산한 후 7년 전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그 딸아이의 나이가 13세이며, 자신의 아이일지 모른다고 털어놓기도 하고,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야마다 도모히코'에 대한 궁금증을 그와 이야기한다. 그 역시 그 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한다.
그즈음 한밤중 희미한 방울소리가 들려 매일 일정한 시각에 그 소리 때문에 잠을 깨던 나는 '멘시키'씨에게 털어놓는다.
함께 근처를 둘러보던 중, 돌로 덮인 구덩이를 발견하고, 중장비를 불러 구덩이를 덮은 돌들을 들춰내자 그 속에 있던 방울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60센티미터의 조그만 인간이 나를 찾아온다.
그림 속 칼에 맞은 기사단장의 모습으로
나는 그에게 당신은 영혼인가 묻는다.
그는 자신이 이데아라고 한다.
영혼은 기본적으로 영묘하고 자유자재한 존재이지만
이데아는 여러 가지 제한을 받으며 존재할 뿐이라고, 일종의 각성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이다.
[중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