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오스트리아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봤습니다. 며칠 전 jtbc뉴스룸에서 최근 개봉영화 (<좋아해줘>) 홍보차 출연한 배우 이미연에게 손석희 앵커는. "칸막이가 있는 옴니버스 영화가 흥행한 사례가 거의 없죠,"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이 영화야말로 그러한 옴니버스 영화의 전형입니다. 2년 전에 국내에 소개되는데, 예술영화로 분류되어 개봉관 상연은 못하고 예술영화관으로 직행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영화 <셜리>는 여느 옴니버스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칸막이가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미국의 대표적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3편을 가지고,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미국의 30년대, 40년대, 50년대, 60년대 초반까지를 시대상을 스케치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 분류되는데, 13점의 호퍼의 그림을 재현한 세트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사람이 연기하는 것이지요. 막이 있는 연극을 영상으로 옮긴 느낌이랄까, 옴니버스라는 형식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ABBA의 히트곡으로 뮤지컬 <맘마미아>가 만든 것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장면이 시작될 때마다 세 가지씩 세계 곳곳의 라디오 뉴스가 제기되는 등 딱 그 정도로 시대상을 얘기합니다. 일종의 사진의 캡션(사진설명)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지요. 호퍼의 그림을 소품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어, 호퍼의 그림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영화를 제대로 음미하기가 어려운, 불친절한 영화인 셈인데, 그래도 이러한 실험 자체로 의미 있는 시도가 아니었나 그리 생각합니다.

<Hotel Room>(1931), <New York-Movie>(1939),

<Room in New York>(1940), <Office at Night>(1940),

<Hotel Lobby>(1943) <Morning Sun>(1952),

<Sunlight on Brownstones>(1956),<Western Motel>(1957),

<Excursion into Philosophy>(1959), <Woman in the Sun>(1961),

<Intermission>(1963), <Sun in an Empty Room>(1963), <Chair Car>(1965).

이상 13점이 영화에 사용된 작품인데요, 호퍼의 그림은 (국내 독자들에게는) 한 출판사의 피츠 제럴드의 소설 표지로 사용되어, 익숙한 그림들입니다.

 

 

 

 

 

 

 

 

 

 

 

 

 

 

=맨 왼쪽부터 표지의 삽화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간이식당>(1927), <293호 열차의 객실>(1938), <뉴욕의 방>(1932)임.

특히, '단편선2'에 사용된 그림, <Room in New York>(1940)을 배경으로 사용한 이 영화는 비록 내레이션뿐이지만 미국의 경제대공황을 얘기합니다. 현직 기자인 남편은 실직 상태인데, 이 사실을 숨기고 날마다 출근합니다. 사실은 식량배급을 받으러 가는 것이라고, 이 장면의 스틸 컷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죠?

그림에는 문외한이지만 소감을 말하자면, 호퍼의 그림에는 햇살이 살아 있습니다. 그림 자체로 영화의 세트를 만들었는데, 영화의 곳곳에서도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이 빛과 그림자의 처리입니다. 왜 그러한가, 1959년을 다룬 <Excursion into Philosophy>이란 작품이 배경이 된 부분에서 알 수 있는데,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플라톤의 <국가> 중 동굴의 비유(7권 앞부분)을 직접 읽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래 위는 그림 아래는 스틸 컷.

 

케이프 코드 오전 11시.(여자 주인공이 <국가>를 읽는다)

어릴 때부터 동굴에 갇혀 살아온 죄수들이 있다. 팔다리가 묶여 움직이지 못했고 머리도 고정돼 벽만 봐야 했다.

(어릴 때부터 동굴에 갇혔다니)
그들 뒤로는 거대한 횃불이 있다. 그들과 불길 사이로 통로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 길로 각종 동물과 식물의 모형을 들고 나타난다. 동굴 벽에 그 그림자가 비치면 죄수들이 놀라 바라본다.

(여자 읽기 멈춤, 갈매기 울음소리, 그림자)

뿐만 아니라 모형을 든 사람이 말을 하면 소리가 울려 마치 그림자가 말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죄수들은 게임에 빠져들게 된다

(게임, 그림자의 형상을 맞추는 게임?)

비록 이미지의 그림자만 보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이 아는 유일한 현실이다. (책을 가슴에 얹은 채 눈을 감고 생각. 현관 문소리, 남편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지만, 자는 척 한다. 이제 남편이 이어 읽는다.)

 

만약 사슬에서 풀려나 벽에서 돌아선다면 횃불에 눈이 멀 것이다. 실물은 그림자보다 리얼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 앞에 서면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처음에 보이는 것은 그림자 같은 어두운 형상뿐 조금씩 밝은 것을 보기 시작한다. (생각, 창밖을 잠시) 마지막으로 태양을 보게 된다. 결국 그들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계절과 해가 바뀌는 원인이 되고 보이는 만물을 주관하는 힘. 그간 동굴에서 봐 왔던 모든 것의 근원이 태양이라는 것을.

(책을 놓고 아내를 한 차례 보다가 밖으로 나간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부분이 '동굴의 비유'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본성이 교육을 받았을 때와 교육받지 않았을 때의 차이를 비교해보기 위해 동굴 비유를 든다. 위는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고, 가령, 천병희의 번역을 따르면

 

"여기 지하 동굴이 하나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게. 동굴의 입구는 길고 동굴 자체만큼 넓으며 빛을 향해 열려 있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에 언제나 같은 곳에 머물러 있으며, 쇠사슬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앞쪽밖에 볼 수 없네."(국가 514a)

"그들의 뒤편 저 멀리 위쪽으로부터는 불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으며, 불과 수감자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서는 나지막한 담이 쌓여 있네. 그 담은 인형극 연출자들이 인형극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들 앞에다 세우는 무대와도 비슷하네."(국가 514b)

영화 <셜리에 대한 모든 것> 한 장면,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읽는 대목인데, 실제 책의 표지인지는 알 수 없다.

 

특정 상품을 영화 및 방송의 소도구로 이용하는 일을 PPL(피피엘) 광고라고 하는데, 이 영화 셜리에서는 플라톤의 <국가>와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시집이 소품 이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에밀리 디킨슨은 55년 5개월 5일을 살면서 2000여 편에 달하는 시를 썼으나 생전에는 겨우 일곱 편만, 그것도 익명으로 발표한 시인이다. 은둔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사람을 피했으나 영혼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던 여인. 에밀리 디킨슨은 새로운 사상, 시형을 만들어 낸 선구적 여성 시인이다. 끝으로,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최근 공유와 공효진이 등장하는 광고에도 사용되었다. (아래, 그림은 호퍼의 <Sunlight on Brownstones>(1956)이고, 그 아래는, 공유, 공효진이 등장하는 CF의 한 장면, 호퍼의 그림이 영화 '셜리'의 배경이 되고, 영화 셜리의 한 장면이 광고로 등장하는 물고 물리는 영화 관계가 흥미롭다. 호퍼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책들의 표지로 그림이 사용된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닌 것이다. 보통은 책(소설)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데, 그림과 그림 속 배경과 그 주인공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걸어나오는 점, 거기에 녹록지 않은 철학서와 시의 세계가 녹아드는, 암튼 영화 <셜리>는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시사점이 많은 독특한 그리고 기념비적인 영화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시는 분은 꼭 한번 찾아서 보시기를.

왼쪽은 호퍼의 <Sunlight on Brownstones>(1956)이고, 오른쪽은 공유,공효진이 등장하는 최근 CF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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