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신화집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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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이나 문자를 수단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 또는 체계가 언어(言語)다. 언어는 그 수단에 따라 음성과 문자로 나뉘는데, 음성언어가 말이고 문자언어가 글이다. 소크라테스는 칠십 평생을 살았지만 글 한 줄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은 팔십 평생을 살았는데 현존하는 많은 글들을 남겼다. 서양 대학의 시초인 아카데메이아를 설립, 운영한 이가 어찌 글에만 의지했겠는가? 다만, 본인 저작이 분명한 26~28편의 대화편이 고스란히 전해짐으로써, 교수나 총장 플라톤보다는 저자 혹은 작가 플라톤을 우선 떠올리게 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글에 생전의 소크라테스 님 '말씀'을 오롯이 살려놓고 있다. 최후 저작인 『법률』과 후기 대화편 일부를 제외하고는 ‘말하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대화편들의 주인공이시다. 어느 드라마 작가의 작품(드라마)에는 어느 어느 배우가 반드시 등장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제자 플라톤의 글에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소크라테스의 말들

‘플라톤 신화집’이란 제호를 보고 첫 번째로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제호의 단어들을 인수분해하면 ‘플라톤 + 신화 + 집[모음]'이다. 플라톤이 서양철학사에 남긴 업적이 위대하여 그야말로 ‘신화적’이란 건가? 그렇다면 ‘플라톤의 신화’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플라톤이 창조한 플라톤의 신화들을 모은 책이라는 것인데, 플라톤의 수집한 신화라는 의미와 플라톤이 지은 신화, 두 의미 모두를 가지게 된다. 실제로 두 종류의 플라톤의 신화들을 모은 책이 플라톤 신화집이란다. 신화(神話)를 신(神)들의 이야기(話)라고만 한정할 것은 아니지만, 신화가 창작이 가능한 그런 대상임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단히 불경(不敬)스런 얘기지만 그리스 신화니 로마 신화니 단군신화니 하는 것도 맨 처음에 그 이야기를 지은 사람이 있으리라. 신화를 한 사람의 창작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다수가 그렇게 믿음으로써 ‘신적인’ 존재의 존재성을 부여하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확신-확고의 단계를 거쳐 신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니겠나. 다만, 그러한 신들의 이야기를 지은 작가가 분명하지 않기에 지음(作)의 결과라는 생각마저 하지 않게 된 것이리라.

 

신화(神話)를 창작한다고? 신화적인 작가 플라톤?

그러므로, 플라톤 신화집에서의 신화는, 신령(神靈)스럽고 신기(神技)한 그리고 신묘(神妙)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야기인데, 거기에는 흔히 신화는 곧 신들의 이야기라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그러한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신화’(myth)는 플라톤이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이러한 말이 처음 쓰일 때부터 myth의 번역어 신화는 순정한 의미의 '신들의 이야기'보다는 보다 넓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 신화집에는 9개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가려 뽑은 11개의 신화가 (에피소드 모음 형식으로) 모여 있다. 1)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2)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그러나 중대한) 진리, 3)비가시적인 세계를 다룬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경험으로 터득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이야기들의 진실성은 확보될 수 있는 것일까? ‘오리지널’ 신화에서 답변을 위한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신화’(myth)는 플라톤이 처음 사용, 처음부터 넓은 의미의 신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일명 ‘신통기’)를 참고하면, 그리스 창조 신화에는 주목해야 할 분명한 원칙이 있다. 서사 조직의 논리가 억압, 반역, 거세(去勢)의 반복이라는 것.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와 충돌하고 반역을 일으켜 선행 세대를 거세한다. ‘낮’과 ‘빛’은 ‘밤’과 ‘어둠’을 반역하고 그들을 거세하거나 추방한다. 어둠을 몰아내야 빛이 들어설 수 있고 밤을 몰아내야 낮이 올 수 있다. ‘카오스’(‘혼돈’으로 명명하기 이전의 그냥 카오스)가 땅, 어둠, 밤을 낳고 땅이 하늘을 낳는 태초의 사건들, 이들을 살피면 “어둠과 밤의 관계(유사성)는 그 다음 세대인 빛과 낮의 관계(유사성)와 같고, 어둠/밤 빛/낮의 두 쌍은 서로 반대쌍의 관계에 있다. … 거세와 추방은 후속 세대가 태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의 확보이고 기회의 쟁취이다”(도정일, <문학동네> 1998년 봄호 중) 곧 가시적인 있음을 근거로 비가시적인 세계를 상정할 수 있다. 이 말을 플라톤의 신화(설정)에 도입하자. 가시적인 세계의 가능한 이야기가 있으므로, 비가시적인 세계의 불가능(해 보이는)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된다. 가지(可知)적인 것이 ‘있음’으로 불가지(不可知)적인 ‘없음(있을 수 없는)’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가시의 가능한 세계 있어, 비가시의 불가능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어

어쨌거나 플라톤은 기존 신화들을 수집하고, 약간씩 이야기를 뒤틀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신화(myth)’의 개념을 넓게 잡음으로써 불경(不敬)의 부담을 조금 덜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봐도 될까? 그렇다면 몇몇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말에 취해서 신적인,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얘기했노라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하필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은 스승의 죄목 가운데 하나가 불경죄(不敬)다. 좀 가혹하지 않나? 당시 아테네에서의 불경죄란 우리의 국가보안법처럼 ‘걸면 걸리는’ 그런 죄였다고는 하나…….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플라톤은 ‘신화’를 분명히 정의(定意)함으로써, 스승의 불경죄가 무리한 법 적용이었음을 ‘변호’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신화’라는 장르를 선택했더라도 고지식한 이들에게는 그런 말들을 시쳇말로 ‘구라’로, 그를 구라에 능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인데, 작가 플라톤이 주인공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한 역할로는 '쫌' 그렇다.  

 

‘신화’를 분명히 정의(定意), 스승의 불경죄가 무리한 법 적용임을 ‘변호’

'플라톤 신화집'의 신화에는 우화(寓話), 전설(傳說), 신탁(神託) 등의 설정을 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쏙 빠져들게 하는 유형들이 있다. 하나하나 살피는 재미가 어렵지만 쏠쏠하다. 다만, 신화의 첫 대목에서 비록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지만 신뢰도 향상을 위해, 출처를 언급하는 대목들은 이들 신화의 성격만이 아니라, 이런 신화들을 수집하고, 뒤틀고, 창작했는지 그 목적을 가늠할 수 있다. <고르기아스>(523a-527a)에서 가져온 ‘혼의 심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 말마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자네는 아마 이 이야기를 설화[mythos]로 여기겠지만, 나는 실화[logos]로 여긴다네. 나는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이야기하는 것이니까."(<향연> 201d-212c ‘에로스의 탄생’ 중)
‘이제는 사람들 말마따나’, '옛날 옛적에'처럼 옛날이야기를 시작할 때와 같은 관행적인 문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전에 마티네이아 여신 디오티마한테서 들은 에로스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그녀는 사랑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도 해박했는데, 한번은 아테나이인들로 하여금 미리 제물을 바치게 하여 역병(疫病)의 내습을 10년 동안이나 늦출 수 있었지. 바로 그녀가 나에게도 사랑에 관해 가르쳐 주었다네."
주석에 따르면 ‘디오티마’는 실재했다기보다는 플라톤의 작명이다. ‘만티네이아(mantineia)’는 동(東) 아르카디아 지방의 도시로, 'mantis'('예언자' '예언녀')와 발음이 비슷하다. 신의 권위를 빌릴 뿐만 아니라, 가공의 이름을 실제 지명까지 참고하여 끼워 넣는다?!

 

<파이드로스>(258e-259d)에서 들려주는 ‘매미 신화’의 초반부는 다분히 우화적이다. 당대에 플라톤이 집필할 무렵에 이솝 우화가 널리 읽히고 있었다. 초반부의 한 대목이다.
"무사 여신들이 태어나면서 노래가 나타나자 당시 사람들 중 일부는 노래의 즐거움에 미쳐서 먹고 마시고는 일도 잊어버리고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대. 훗날 이들에게서 매미 족속이 생겨났다, 무사 여신들은 매미들이 일단 태어나면 먹을 필요 없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노래만 하게 해주었대. 이게 무사 여신들이 매미에게 준 선물일세."

 

 ‘매미 신화’의 초반부는 다분히 우화적, 플라톤 다른 대화편에서 이솝우화 언급해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님,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내 이야기가 몹시 이상하게 들릴는지 몰라도, 일찍이 일곱 현인 중에서 가장 현명한 솔론이 말했듯이 틀림없는 실화예요.” (<아틀란티스 섬과 고대 아테나이> 중 <티마이오스> 20d-c)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외종숙으로 훗날 ‘30인 독재’를 주도하지만 8개월가량의 집권 후 처형되된다. 플라톤이 정치 입문의 뜻을 접는 계기 가운데 하나다. 또한 플라톤의 가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아테나이의 ‘전설적인’(추앙의 의미다) 입법가 솔론에 이른다. 이야기가 곧이곧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을 우려하고 있는 크리티아스., (플라톤은) 신뢰도 제고를 위해 역사적 인물인 조상까지 동원한다. 이어지는 <크리티아스>(의 다음 대목도 흥미롭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은, 헤라클레스의 기둥들 바깥쪽에 살던 사람들과 안쪽에 살던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진 이후로 기록에 따라면 9천 년쯤 경과했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 이 전쟁을 소상히 언급하려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 한쪽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테나이가 지휘했고, 다른 쪽 군대는 아틀란티스 섬의 왕들이 지휘했대요."(<크리티아스>108e)

 

대화편 <크리티아스>에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추구한 ‘이상국가론’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오늘날까지 이야기되는 아틀라티스 섬 관련 전설의 출처다. 아쉽게도 미완성 상태라, 아틀란티스에 대해 더 알려면, <티마이오스>도 읽어야 한다.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1,2/김석희 옮김)에는 물 속에 가라않은 아틀란티스 섬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해저 2만리』의 시간적 배경은 1866년쯤이다. 플라톤 신화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이어지는 다음 “옛날 옛적에 신들은 대지 전체를 추첨을 통해 자기들끼리 영역별로 나누어 가졌고, 그 때문에 다투지는 않았어요.(<티마이오스>109b)에서도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역시 신화이지만, 이런 이야기와는 달리 전통적인 그리스 신화에서는 포세이돈과 아테나 여신이 앗티케 지방의 영유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신들이, 설마 신들이 그럴 리 없다. 각자에게 적합한 몫을 몰랐겠느냐, 다툼으로 차지하려고 했겠느냐, 신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의심하는 이야기까지 대화편에 담는다. 이렇듯 플라톤은 자신이 빚어내는 작품(신화)의 완성도를 위해 전통적인 신화의 일부를 흔들기도 한다.

 

자신이 빚어내는 신화를 위해 전통적인 신화의 일부를 뒤틀기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는 전설 속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들리는 소리에 따르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들을 모은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이 곧 출간될 예정이란다. 거기에는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로 포함된다 하니 기대된다. 플라톤 신화집에서의 쬐끔 맛보는 것이 아쉬웠다면, 신간에서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왜 플라톤은 이렇게 창조한 이야기(신화)들을 무엇에 썼을까? 문답에서 대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 곧 교육 효과를 극대화를 위한 장치인 건 분명한데, 이렇게만 얘기하는 것은 좀 매정하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문학작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이야기들을 가려서 모아놓은 ‘플라톤 신화집’ 덕분에 확보되는 것은 아닐까? 희랍어로 쓰인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읽은 로마인 오비디우스는 신화를 일종의 ‘변신’으로 해석하여 책를 다룬 책,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집 『변신 이야기』를 라틴어로 썼다. 플라톤 대화편들의 문학성을 재조명하고, 플라톤을 작가로 읽는 단초가 역시 책을 다룬 책인 『플라톤 신화집』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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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5-05-22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적인 명시(名詩)의 9할은 30세 미만의 시인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 절반이 25세 미만의 시인인 것이다.˝ -H.L.멩컨 <偏見>
˝얼마간의 광기가 엇으면 시인이 되지 못한다.˝ -M.T.키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