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3/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또한 자신의 대담 상대가 뤼시스에서 메넥세노스로 바뀌는 시점에 소크라테스는 자연스럽게 힙포탈레스가 나서게 하여 뤼시스와 눈인사를 하게 한다. 논점은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친구’ 인 뤼시스와 메넥세노스의 ‘우정’으로 옮겨가고, 친구간의 사랑(우정)은 뭔가, 논의는 무르익는다. 누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누가 누구의 친구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의 친구인가,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친구인가? 아니면 아무 차이가 없는가? 서로 사랑하지(‘마중 사랑’) 않는 한 어느 쪽도 다른 쪽의 친구가 아닌 것인가?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幸福하나니라.“(1)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2)

 

(1)은 청마 유치환 시 「행복」의 한 대목이고, (2)는 가수 김세환의 히트곡 <사랑하는 마음>(송창식 작사·작곡)의 가사다. (1)은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고 (2)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쎄시봉>(2015. 2.)의 삽입곡으로 쓰여 젊은 독자라도 알만한 노래(가사)다. 대체로 사랑은 ‘하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게 연애상담의 ‘모범’답안이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혼자서 속 끓는 외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 역시 맞는 얘기다. 인용(2)처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사랑을 받는 순간’ 훨씬 짜릿하기 때문이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1)은 ‘외사랑’이라도 어쩔 수 없지만 (2)에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마중사랑이 될 수 있다.

□ 그렇다면 미워하는 일은 왜 일어날까, 사랑하면 친구이고 미워하면 적인데, 소크라테스는 ‘우정(사랑)’이 개입하는 상황들을 하나하나 검토한다. 또한 사람과 사람은 서로의 유사성 때문에 사귀는 것인가? 그렇다면(유사함과 유사성을 우정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 악인과 악인이 서로가 가진 악행의 유사성 때문에 친구가 되는 경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들이 나누는 것은 우정이 아니고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친구>(곽경택, Ⅰ-2001, Ⅱ-2013)를 떠올려보라,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갱스터 영화의 주인공들이 내세우는 ‘으~리’를 떠올려보라).
“그렇다면 여보게, 유사한 것끼리 친구가 된다는 말의 숨은 뜻은 훌륭한 사람들만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고, 나쁜 사람과 훌륭한 사람 또는 나쁜 사람과 다른 나쁜 사람 사이에는 진정한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인 듯하네.”(214d)
□ 선생의 말에 뤼시스는 동의한다. “훌륭한 사람들이 친구라는 얘기지?” 역시 뤼시스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훌륭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만이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다. 뤼시스는 용모가 뛰어나고 품행이 방정(方正)하다. 힙포탈레스는 글 솜씨가 뛰어난 준수한 청년인데다가 부잣집 아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논의가 깊어지기 전에 힙포탈레스와 뤼시스가 연인과 연동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일까?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끼리의 우정은 ‘진정한’ 우정일 뿐이다. 우정은 실제로 얼마나 허약한가?
A가 B와 유사하기에 B의 친구라면, A는 B에게 유용한가? 유사한 것들이 서로 돕지 못한다면 서로를 존중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닮은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것을 욕구한다. 결국 가장 상반된 것들끼리 가장 친해야 한다. 급기야 소크라테스는 정리한다. “오히려 훌륭하지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이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일세.”(216,c) 이해하기 어렵다. ‘(1)유사한 것은 (3)유사한 것의 (3)친구가 될 수 없다.’에 다음 “(1)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2)자기와 유사한(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의 (3)친구가 될 수 없다.”를 대입한 결과다. 그러므로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도 팽목항 하늘나라 우체통(타임로드)

□ 논점은 어떤 이익이나 필요 때문에 맺는 관계도 우정일까 하는 것. 뭔가가 필요한 사람이 그것을 찾는다. 결핍(못갖춘마디)이 큰 사람이야말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역으로 뭔가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 모든 것을 갖춘 훌륭한 사람 혹은 자족하는 사람들에게 우정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단적인 예로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 친구는 필요하지 않다. 다시 병이 들었으므로 병이 들 수도 있음으로 의사 친구를 두면 ‘쓸모’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우정이고 사랑일까? 이 물음에서 ‘진정한’이란 조건을 걷어내야 궁극의 답을 얻게 될 참이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나쁜 것의 있음’이 친구를 찾고 우정을 맺게 한다는 점이다. 해서 일단의 결론을 내린다.
“혼에서도 몸에서도 그 밖의 모든 영역에서도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나쁜 것의 함께함 때문에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수단들이 목적을 위해 강구되어야 하는, 그 자체가 목적인 가치가 있다. 그것이 우정이고 사랑이라야 하지 않을까? 물론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우리에게 친구인 것은 ‘친구’라는 말을 듣기에 부적절하며, 진정한 친구란 우정이라고 불리는 이 모든 것의 종착점”(220b)이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이 아니라) 우정이란 무엇인가

□ 그렇다면 훌륭한 것은 왜 사랑받는가? “훌륭한 것은 나쁜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이렇듯 (나쁜) 공동의 적을 가진 사람끼리 필요에 의해서 서로가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쁜 것들이 ‘훌륭하면서 유사한 것들’이 친구가 되게 한다고 받아들여도 될까? 그렇다고 하면, 그런 (‘공동의’ 또한 ‘저마다의’) 적이 떠나고 나도 그런 우정이 지속될 수 있을까? 나쁜 것의 존재가 우정의 원인이었다면……. 또한 누군가를 필요로 한 나쁜 동기들이 소멸되어도, 우정(사랑)이 지속된다면 왜 그러한 것일까, 이것이 진짜 우정(사랑)의 본질에 가까운 건 아닐까?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연정과 우정과 욕구의 대상은 우리와 친근한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를 친구이게 하는 것은 “본성적인 친근감”이다. 그리고 “혼이나 성격이나 태도나 외모와 관련하여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에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욕구도 연정도 우정도 느끼지 않을 걸세.”라고 논의를 마무리 짓는다. 용두사미의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우리와 친근한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뤼시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 “가짜가 아닌 진짜 연인은 반드시 연동의 사랑을 받아야”한다고 덧붙인다. 이 말에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지만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그 순간 “흽포탈레스는 좋아서 희색이 만면해졌”단다.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 “훌륭한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는 것 못지않게 불의한 자들끼리도 나쁜 자들끼리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아쉽지만 모두들 이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대강 <뤼시스>의 내용은 이러하다.
 

□ 결국 대담은 힙포탈레스를 연동 뤼시스와 맺어주는 ‘이벤트 한마당’이었다는 말인가? 하여튼 소크라테스는 산파 역할 자체보다는 중매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훌륭한 두 젊은이가 연인과 연동이 될 수 있게 자리를 깔아줬다면, 그 자체로 좋은 일을 한 셈이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임기응변 같고 ‘즉문즉답’인 듯한 <뤼시스>는 우리에게서 소멸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을 숙제인 ‘우정’과 ‘사랑’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 우정과 사랑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에 참전(參戰)하게 한다. 이것들은 차차 ‘우애’ 혹은 ‘친애’라는 개념으로 진화해갈 참이다. 플라톤이 <뤼시스>에서 싹을 틔운 우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사진: 네이버블러그 '자국의 미' /거제 청마 유치환 생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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