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4/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 ‘우정에 관하여’ 깊이 묻는 <뤼시스>가 없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하 ‘윤리학’)은 상상할 수 없다. ‘우정’만이 아니라 ‘용기’(<라케스>)와 ‘절제’(<카르미데스>)에 대한 논의도 예외는 아니다. ‘윤리학’에서 ‘우정’은 ‘우애(혹은 친애)’라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우애’은 전체 10권인 ‘윤리학’의 8권과 9권의 주제로 전체분량의 30%쯤 이상이 할애된다, 익히 알려진 얘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이라는 전공필수과목을 이수 전의 개론서로 받아들여진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저마다의 구슬들(미덕들, 사람 자신, 사람과 사람,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은 많지만, 그런 구슬들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필자는 우정과 사랑, 우정과 우애를 혼용하여 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차차 밝혀질 것이다.
□ <뤼시스>는 남자끼리의 동성애 문제와 관련된 대화편이기도 하다. 작년(2014)년 말로 기억하는데,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은 공약 가운데 하나이며 인권변호사로서 살아온 본인의 소신에도 맞는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포를 앞두고 딜레마에 빠졌다. 대권에 관심이 없다, 라고 역설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속내를 엿본 사건이었다. 완고한 유교윤리가 진보-보수의 프레임에 얽혀 있다고는 하나, 좀 멀리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를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뤼시스>에서 플라톤은 성소수자의 인권측면에서 동성의 사랑을 다루지 않았다. 그냥 사랑이고 그냥 우정이다. 그런데, 우리 그냥 사랑하게 놔두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플라톤이야말로 성소수자의 ‘있음’ 그대로에 유능한 변호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히다.

□ 사람과 사람은 왜 친하고 또 친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에서도 남자와 여자(에로스를 동반하는), 남자와 남자의 사랑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것일까? 왜 사랑하게 되고 왜 미워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 사랑이고 우정이라면 좋을 것이다.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우정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도 ‘진정한’ 우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이란, 우정이란 무엇인가 이름붙이는 올바른 정의(定意)와 정의(定義)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천병희는 <뤼시스>에서 'philia'(필리아)를 우애(友愛)로, 'philos'(필로스)를 ‘친구’ 옮긴다. 그런데 이 말들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예민한 단어이면서 핵심단어가 된다. 'philos'의 우리말 채택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지만 'philia'의 경우는 고대 그리스의 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견들이 있다. 그리스어는 ‘필리아(philia)’는 ‘우정(友情)’ ‘우애(友愛)’ ‘친애(親愛)’ ‘사랑’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는 ‘philia’를 어떤 우리말로 옮겨야 할지 고민한다. 고전번역가 천병희는 ‘우애’를 선택했다. 강상진·김재홍·이창우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친애’를 채택했다.

A)“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친애’는 부부나 사제지간, 선후배 사이, 더 나아가 동포애라고 할 수 있는 것까지 포괄하며, 단순한 순간적 감정(pathos)의 수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의 사귐과 인격적 친밀성을 전제한다.”(앞의 책, ‘philia’ 주석, 60)

‘우정’을 채택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유교 문화권에 살고 있어, 부모 자식 사이, 선후배 사이, 사제지간, 군신지간과 같은 수직적 인간관계가 보통 친구와 동료로 함축되는 수평적 인간관계와 날카롭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곧 ‘philia’를 ‘우정’으로 번역하면 ‘수직적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다면 그리스어에서 ‘philia’와 같은 어원을 가진 필로스'(philos)‘는 어떤 상태를 말할까? B)“보통 ’친구‘로 번역되는 (필로스도) 선-후배나 부모-자식 관계와 같이 ‘친(親)한 사람’, '함께 있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를 모두 포괄한다.”는 것이다.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다만, ‘친애/친구’라는 최종의 우리말 채택에서 공통분모는 ‘친(親)’이다. 대우(待遇: 어떤 대상에 대한 높임의 태도가 표시되는) 체계가 엄격한 우리말의 현실을 고려한 선택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친(親)’도 순우리말은 아니다. 그리고 한자 ‘친(親)’의 의미, 그것을 우리말로 펼치는 뜻도 실로 다양하다. 결국 그리스어의 온전한 우리말 의미를 구분해내려다가 오히려 더 한자의 다양한 의미망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가령, ⓵부자유친(父子有親)과 ②사고무친(四顧無親)에서 각각 쓰인, 친(親)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①은 ‘친애’에 가까운 듯 하다. 그러나 ⓶는 흔히 ‘고아 상태’임을 떠올리게 하는데, 부모 형제와 같은 혈육만이 아니라, 혈육을 포함하여 의지할 수 있는 친한 누군가가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를 말한다. 위 역자들의 주석과 비교하자면, ①의 친(親)은 사자성어 해설에 ‘친애’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친함의 범위에서 ‘필리아’보다는 ‘필로스’에 가깝고 ⓶의 친(親)은 ‘필로스’보다 ‘필리아’에 더 가까운 듯하다.
□ 한편 ‘친한’ ‘편하다’와 같이 일상적인 말에서의 의미를 떠올릴 때, ⓶의 친(親)이 ①의 친(親)보다, 더 넒은 대상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필리아’에 가깝지만, ‘친애’(위 A)가 적용되는 엄격성을 고려할 때, ‘필로스’에 더 가까운 듯하다.(이것은 단적인 예를 제시한 것이고, 숱한 용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보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하여 ‘도로 ○○당’이라고, ‘philia’의 우리말로 ‘친애’를 선택하기도 그렇고, ‘우정’은 좀 그러고 결국 ‘우애’를 선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엄밀히 따지면 'philos‘를 우리말 ’친구‘로 옮기는 것도 고민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필리아'(philia)를 ‘우애’로 옮기건 ‘친애’로 옮기는 부분은 지금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 살피는 것으로 충분하지 싶다. 지금은 <라케스>에서의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정(사랑)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혹은 플라톤)는 ‘우정’(혹은 사랑, ‘사랑’을 포함한)이 ‘친근함’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 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친(親)이란 무엇일까? 유교윤리의 실천 덕목인 오륜(五倫)의 하나인, 부자유친(父子有親)은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라”는 말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맨 먼저 맺는 인간관계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것들보다 ‘친한’ 관계이다. 해서 ‘천륜(天倫’이라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바꿀 수도 없는 절대성 때문에 오륜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하여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에서처럼 친부살해나 근친상간은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가 된다. □ 사람은 혼자는 살 수 없다. 항상 서로 사귈 벗을 찾아 함께 어울리며 살아간다. 이런 벗[朋友]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니 믿음(信])이다, 해서 ‘붕우유신(朋友有信)’은 인륜의 실천덕목인 오륜(五倫) 가운데 하나로 편입된다. 그런데, ‘신(信)’의 자리에 ‘친(親)’을 쓰면 어떻게 될까? 공자는 『논어(論語)』(안연편顔淵篇)’에서 ‘無信不立(무신불립)’을 말한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지만 <안연 편>의 다음 부분이다.

자공(子貢)이 공자께 물었다. “정치(政治)란 무엇입니까.”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
“나머지 둘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 예부터 모든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백성의 믿음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하는 법이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 신(信)을 친(親)으로 대치(代置)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믿음은 친한 사이에서 생기고, 그 친함은 ‘믿음’을 있을 때 유지된다. 또한 친할 때 믿음은 돈독해진다. 식량보다도 군대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백성들의 믿음(新)이라고? 경전 속에서 아직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삶 가까이서 만나는 친(親)은 참으로 천박(淺薄)할 뿐 아니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마구 쓰이고 있다. 친이(친李)-친박(친朴)-친노(친盧), 反이-反박-反노, 누구와 친(親)한가 그렇지 않은가, 반대라면 어느 정도로 그 반대편에서 그 중심(권력)와 적대 관계에 있는가? 그런 이상한 패거리 권력의 메시지만 전파하는 영혼도 가슴도 없는 기자들은 ‘받아쓰기’에만 혈안이더니 급기야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되었다.


□ ‘윤리학’에서 만나는 ‘필리아(philia)’는커녕 ‘필로스(philos)‘도 기대하기 힘들다. ‘필리아(philia)’를 영어권에서는 'friendship(우정/우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필로스(philos)‘는 ‘friend‘가 될 것이다. 'friendship'의 확장된 단어로 ‘fellowship(동료의식/동료애)’을 들 수 있다. 또한 ‘friend‘와 대응하는 ’fellow‘가 있다. 아마도 지금 우리나라 정치권은 물론이고 전국민의 의식 전반에 만연한 ’친(親)‘이라는 개념의 오용과 아전인수식 전용(轉用)은, 그런 그들을 그들 각자를 ’fellow‘의 한 쓰임으로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fellow:.... 2.(1)(보통 fellows) 동아리, (나쁜 짓의) 패거리; 동료, 동지; 동업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