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메난드로스의 희극 <사모스의 여인>이 처한 상황을 약간 뒤틀어볼 차례이다. 

동거녀가 낳은 아이인 것으로 두 아버지를 속인 상태에서 아이가 자란다고 생각해보자(그리고 그 아이가 딸이라고 하자). 자신의 혈육이 태어난 상태이므로, 데메아스는 동거녀 크뤼시스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이한다. 크뤼시스는 동거녀일 뿐인 불안정한 신분에서 정실 부인으로 신분 상승을 이뤄냈다. 아이의 어미를 자처한 목적을 이룬 것이다. 이제 아이는 친아빠 모스키온을 오빠로 알고 자란다. 또 친엄마를 오빠의 아내, 올캐로 알고 자란다. 시누이와 올캐 사이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보다 더 나쁘다는데, 당시 그리스의 상황은 알 길이 없으나, 그냥 우리나라라고 하자. 시누이를 엄마보다도 더 알뜰하게 보살피는 올캐의 친절함에 가끔은 의구심이 생기지만 하지만, 둘의 사이는 다정하다. 

대체로 아직 어린 딸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철없는 시절의 '불장난'으로 임신을 하게 된다. 그 딸의 부모들은 딸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자신들 호적에 늦둥이쯤으로 올리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딸)는 친엄마를 언니로 알고 자란다. 그 언니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결혼하여 집을 떠나고, 할머니를 엄마로 알고 자랐던 소녀는 어느날 자신의 엄마가 사실은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원작소설의 개정판이 나오고, 후속편이 나온 최문정 장편소설 <바보엄마1_영주 이야기>다. 후속작 <바보엄마2_닻별 이야기>는 친엄마를 언니로 알고 자라지만,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데 그 언니이자 친엄마가 정상인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결혼하고, 언니이자 친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버린다.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러야 했던 영주가 할머니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훗날 딸 하나 낳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딸의 입장에서 겪는 이야기가 후속편에서 이어진다, 어린 딸이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낳은 사실을 숨기려는 데서 파생된 비극을 다룬 소설이다.

"'동생'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 난 그녀의 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결코 진실도 아니었다. 난 출생에서부터 기존의 모든 가족 관계를 깨뜨리고 나온 아이였다. 외삼촌이 오빠가 되었고, 외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되었으며, 외할머니가 엄마가 되었다.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도…… '엄마'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도없는…….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영원히 '그녀'라는 3인칭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바보엄마1>, 초반부)

 

<Mr. 박을 찾아주세요>라는 이색적인 제목의 박현숙 장편소설. 필리핀에 있던 작가의 딸에게 한 필리핀 여성이 ‘서울에 사는 미스터 박’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간 한국의 젊은이가 현지의 필리핀 아가씨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남자가 한국으로 돌아가버린 뒤에 아빠 없는 혼혈 아들이 태어난다. 과묵한 아이인 '코피노 ' 리바이다. 필리핀 엄마는 아들에게 한국인 아빠를 찾아주려는 일념으로 스무 살 많은 남자와 결혼하여 한국에 왔다. 그리고 끝내 그녀는 목적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혼외자녀인 리바이와 같은 반 여자아이 강파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딸이 젊은 날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것을 알게된 파랑이의 할머니는 파랑이를 자신의 딸로 호적에 올린다. 그리고 파랑이가 손녀라는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살아간다. 파랑이의 친엄마이자 언니는 시집을 가 시치미를 뚝 떼고 잘 살고 있다. 가끔 동생(딸)이 찾아오면 남편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하지만. 그런데 홀로 살아가던 파랑이의 늙은 엄마(사실은 할머니)는 노년을 기대고 싶은 결혼 상대(노신사)를 만나 결혼할 예정이다. 여기에서 파랑이 인생에 파란이 일어난다. 이제야 파랑이의 출생의 비밀을 넌지시 알려주는 할머니, 결국 파랑이는 편의점 아르바리트를 하며 겨우 살아가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찾으러 나서고, 친구 리바이와 다르지 않은 처지인 자신을 발견한다.

 

두 여성작가의 세 작품은 메난드로스의 희극 <사모스의 여인>이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 속의 할머니가 할머니이면서 딸의 딸을 딸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013년 초반 SBS에서 방송된 24부작 월화드라마 <야왕>을 기억하시는지, 박인권 화백의 만화 《대물: 야왕전》이 원작인 이 드라마다. 여기에서 백학그룹의 백창학 회장(이덕화 분)의 장님 백도훈(유노윤호 분)이 사실은 누나 백도경(김성령 분)이 젊은 날의 실수로 낳은 아들이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이런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예는 비일비재하다. 그 자체가 중요 화소(話素)이기도 하고, 양념으로 곁들여지기도 한다. 한 예로 든 <야왕>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출생의 비밀을 애용하는 드라마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라 불리거나 그런 드라마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다. 아니, '막장 드라마'라면 이런 설정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첫번째 페이퍼에서 저승으로 찾아가 만나는, 고대 그리스의 구희극 대표시인 아리스토파네스와 신희극의 대표시인 메난드로스를 설정한 바 있다. 고대 그리스 희극의 창시자와 그 희극의 완성자로 부를 수 있는 두 시인은 훗날 끊임없이 변용되어 활용되거나 진화되는 소설이나 드라마들을 보며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인가? 우리의 1970~80년대에 활발한 순수-참여 논쟁과 같은 상황이 극적으로 벌어질 수 있으리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니라, 죽은 언론의 시대를 살아간다. 아리스토파네스라는 위대한 희극 시인을 진정한 선배로 모셔야 할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언론인들이다. 막장 드라마를 씹으면서도 매회 놓치지 않고 보는 시청자들이 있기에 막장 드라마는 계속된다. 소재로만 보면, 우리의 막장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듯하지만, 비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삼아,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메난드로스 희극에서 배울 점이 있다. 드라마 작가와 시청자 모두가 자극 받아야 할 작품들이 2400년 전에 이미 연극 무대에 올랐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때론 산다는 것은 거기서 거기,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일 때가 있다. 우리 생(生)이 가진 보편성을 전제할 때 진정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여 우리 생이 간직한 또 하나의 이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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