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행된 <메나드로스 희극>에는 고대 그리스 '신희극'을 대표하는 메난드로스의 현존 작품 4편이 실려 있다. 그가 생전에 100여 편의 작품을 썼다는데, 상당수를 제목만 파악할 수 있는 정도이고, 유실된 상태다. 다만 작품의 파편이랄 수 있는 대사 단편들이 명언들로 남겨져 여러 글들에서 인용되고 있다. 20세기에 이집트에서 다량의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덕분에 4편의 그의 희극들을 복원할 수 있었다. 수록된 4편의 글 가운데, 필자는 <사모스의 여인>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볼까 한다. 개연성이 있는 사건 혹은 에피소드는 훗날의 작품들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뤄지기 마련이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것을 일종의 진화라고 볼 수 있을지, 반드시 선행 작품을 참고한 끝에 새로운 작품에서의 유사한 설정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1)2003년 출간된 천병희의 최초 원전번역 (2)최근 펴낸 개정증보판 메난드로스 희극 (3)은 아리스토파네스 일부 작품과 메난드로스의 <사모스의 여인>을 수록한 책. 이상 세 권의 책에는 <사모스의 여인>이 수록되어 있다. <사모스의 여인>은 메난드로스 희극들이 왜 '풍속연극'으로도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친숙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다.]

 

‘결혼 계약’으로도 불리는 신희극 「사모스의 여인」은 약혼 상태인 예비 신랑(모스키온)과 예비 신부(플랑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상태에서 시작한다. 두 집안은 이웃사촌이고, 곧 사돈이 될 두 아버지, 데메아스(신랑의)와 니케라토스(신부의)가 해외에 나가 있는 사이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둘의 해외 출장(혹은 여행) 기간은 꽤 길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데메아스에게는 젊은 동거녀가 있는데(크뤼시스는 사모스 출신으로, '사모스의 여인'이다.) 예비 부부의 아이가 태어날 즈음 자신의 아이를 유산을 한 상태이다. 크뤼시스는 두 젊은이에게 제안한다. 행복한 출발을 위해 '속도위반'으로 낳은 아이를 자기가 낳은, 데메아스의 아이라고 하겠다고. 그렇게 일은 마무리된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두 아버지들은 결혼식을 서두르고, 결혼식을 준비하던 데메아스는 집안의 유모가, 그 아이는 아들 모스키온의 아이라고 말하는 것을 엿듣게 됨으로써 충격을 받는다. 그는 곧바로 크뤼시스와 아이를 집에서 내좇고, 둘은 니케라토스의 집으로 가는데, 그녀는 니케라토스의 아내와 돈독한 사이다. 그 집에는 아이의 생모인 플랑곤이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니케라토스는 딸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당황한다.

신랑 모스키온은 어린 시절에 데메아스에게 입양된 아이로, 물심 양면으로 친아들도 받지 못할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아직 청년임에도 아버지 덕분에 연극 경연의 코로스 비용을 부담하기도 했다. 놀라운 사실을 들었음에도 아들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아버지. 자신의 동거녀와 잠자리를 가져, 아이를 낳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동겨녀의 유혹 때문에 실수한 것이라고 아들을 옹호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신부 측에 알리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알 수 없는 모스키온의 고민은 깊어지고 신부 아버지에게 자기 아이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오해가 시작된다. 자신과 신부 플랑곤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는 말이 빠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의 패륜아를 사위로 맞이할 뻔 했다! 니케라토스는 극노한다. 결국 두 아버지들의 오해가 풀리지만, 절망한 모스키온은 해외용병으로 나감으로써 집을 떠나려 한다. 친자식보다도 자기를 사랑하고 보살펴준 아버지가 자신을 오해했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오해가 풀렸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결국 이야기는 헤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작품은 기원전 317년과 307년 사이에 무대에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누락된 부분이 있지만, 플롯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복원된 상태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발견한 흥미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른바 '속도위반'이 예나 지금이나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에게서 문제가 되고 있다. 당연한 사실이 왜 새롭게 다가온 것일까? 피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이집트 파피루스의 발견으로, 인류의 피임의 역사는 기원전 187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약이며 기구에 이르기까지 현대에도 예기치 않은 임신이 생기는 상태이니, 옛날에는 속도위반이나 예기치 않은 임신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둘째, 당시에도 '속도위반'을 수치로 여겼다는 점이다. 하여 부담 없이 출발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사모스의 여인 플랑곤의 배려가 돋보인다. 그러나 과도한 친절은 금물이다. 그 배려로 인해 플랑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사심은 없는 것일까?

셋째, 근친상간의 일종으로 파악한 니케라토스의 반응이다. 그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로 오해하는 것은 당연한데, 빗대는 예가 흥미롭다. 

"테레우스와 오이디푸스와 티에스테스와 그밖의 다른 자들이 저질렀다고 하는 근친상간을, 자네(모스키온)가 무색하게 만들어버렸구먼."

물론 크뤼시스는 말 그대로 데메아스의 동거녀일 뿐이다. 본부인도 아니며, 재혼을 약속한 상태도 아니다. 그녀는 젊어서 아들과 나이차가 크지 않는 듯하다. 그녀의 젊음은 보통의 아버지라면 더욱 분노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늙은 남자(아버지)가 젊은 남자(아들)에게 젊은 동거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모스키온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점은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일까? 물론 오해하는 상황이지만, 관계로는 근친상간이지만 친자식일 때보다는 심각성은 덜한 상태다. 다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둥, 큰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여기에서 아테나이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테세우스 관련 신화와 비극을 떠올리게 된다.  

 

 

 


 

 

 

 

 

 

 

 

 

(1)천병희와 (2)강대진이 각각 번역한 일명 '도서관'으로 불리는 아폴로도로스의 저작을 통해, 테세우스의 신화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책의 후반부 부록과도 같은 '요약집'이라고 실려 있는데, 책의 본문에 해당하는 '도서관' 후반부에서 '요약집' 전반부에 걸쳐 테세우스와 관련된 신화가 소개되어 있다. 

테세우스는 아마존 여인에게서 휩폴뤼토스라는 아들을 얻은 상태에서 아내가 죽자 크레테의 미노스의 딸인 파이드라 공주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 파이드라는 테세우스에게 아카마스와 데모폰을 낳아주는데, 테세우스의 아들인 휩폴뤼토스를 사랑하게 되고, 자기와 동침하자고 유혹한다. 그러나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는 휩폴뤼토스(남자 아르테미스 여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그녀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칠까 두려워진 파이드라는 정황을 만들어 그가 자신을 겁탈했다고 모함한다. 테세우스는 포세이돈에게 아들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마차를 몰고 해변길을 달리던 휩폴뤼토스는 파도에 휩쓸려 비참하게 죽고, 파이드라도 자신의 사랑이 알려지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계모 파이드라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휩폴뤼토스>라는 비극으로 만들어지는데, 천병희의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1>에 수록되어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테세우스 전'도 참고할 만한 고전이다. 전체를 번역한 동서문화사의 번역에서 테세우스 일대기를 확인할 수 있다. 천병희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원전번역이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주요 영웅 5인씩, 10명만을 다루고 있고, '테세우스 전'은 없다. 동서문화사 번역에는 주석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다희 번역의 영웅전이 여러 권으로 나오고 있는데, 1권에서 테세우스를 만날 수 있다. 

 

 

 

 

 

 

 

 

 

 

 

 

 

 <가운데가 아버지(이윤기 기획) 선생의 유지를 받든 딸 이다희가 우리말로 번역한 영웅전의 1권에 테세우스 편이 수록되어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흘러간 가요의 한 대목처럼, '사랑해선 안 될 사람'(전처의 아들)을 '사랑하는 죄'를 짓게 되는 파이드라의 슬픈 사랑을 다룬다. <사모스의 여인>에서 아버지 데메아스는 오해하는 상황이기는 하나, 테세우스처럼 신에게 아들을 죽여달라는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 

 

에우리피데스는 '고희극'의 대표시인인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에 아이스퀼로스와 함께 실명으로 등장하는 비극 시인이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2>에는 <개구리>라는 희극이 실려 있다. 기원전 405년에 공연된 작품으로 40세의 아리스토파네스가 집필하고 연출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등장인물인 디오뉘소스(신)는 헤라클레스로 분장해 저승으로 내려가는데, 위기에 처한 아테네 시민들을 일깨울 (비극)시인 한 사람을 데러오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3대 비극시인은 이미 고인이 되어 저승에 가 있는 상태.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 중 누가 최고인지 겨루고 디오뉘소스가 심판을 본다. 디오뉘소스는 대결에서 승리한 아이스퀼로스를 지상으로 데려가고, 에우리피데스가 승복하지 않는 가운데, 빈 옥좌는 소포클레스가 차지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의 패배로 끝나는데, 기원전 405년은 승전 소식이 들려오기도 하지만 아테네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된 상태다. 

이 작품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공로를, 비극에서 필요없이 산만한 표현을 줄이고 우리에게 유용한 일상사를 무대에 올려 새로운 비극을 개척한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아이스퀼로스가 공격한다. 자신은 시민들이 본받을 수 있는 점잖은 영웅들을 묘사했다. 한데 에우리피데스는 뚜쟁이들(<힙폴뤼토스>, 파이드라의 유모), 신전에서 아이를 낳는 여인들(<아우게>의 여사제), 오라비와 살을 섞는 여인(<아이올리스>의 카나케), 자식을 죽이는 여인(<메데이아>) 등 건전한 시민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악한 내용만을 다뤘다고 비난한다.

'고희극'을 대표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는 일종의 문학평론 혹은 공연리뷰인 셈이다. 이 작품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아이스퀼로스의 입을 빌려, 에우리피데스를 비판하는 근거가, 훗날 아리스토파네스 자신과 달리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리는 메난드로스의 출현을 예고하는 듯하다. 소재와 기교에서 메난드로스 희극은 3대 비극작가 중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과 유사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은 연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려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역할보다는, 희극이라는 도구를 써서 당면한 국가/사회의 굵직한 문제들에 처방을 제시하는 여론에 가까웠다. 관객들 중 누구일 수도 있는 보통 인물을 무대에 올리고, 그들이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소재에서 웃음을 찾아낸 메난드로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음과 같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개구리>를 패러디한다면?

메난드로스가 작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이 사라진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웃음을 되찾아주고자, 다시 디오뉘소소 신을 불러, 저승을 찾게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와 메난드로스가 자신이 해결사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디오뉘소스가 심판을 본다. 희극이란 중차대한 국가의 문제를 다뤄야 하며, 비판 기능을 해야 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주장한다. 희극이란 웃음을 선사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요, 메난드로스는 대선배에게 감히 맞선다. 극과 극이 대립하는 극이 되지 않을까

결국 <비극의 창시자-아이스퀼로스: 인간 중심의 비극 에우피피데스=아리스토파네스:메난드로스>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메난난드로스는 시민 관객들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휩폴리토스>를 공유하고 있음을 전제한 상태에서 <사모스의 여인>을 무대에 올린 것은 아닐까?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혹은 작품 속 상황을 자기 희극의 또 다른 배경으로 활용(전제)한 건 아닐까? 훗날 <페드라>('파이드라'의 영어)라는 영화가 파이드라 공주를 중심으로 극화되듯, 메난드로스는 '사모스의 여인'을 갈등의 중심에 놓는 <사모스의 여인>으로, 비극 <휩폴뤼토스>의 희극 버전을 새롭게 만들었단 생각이 든다. <사모스의 여인>에서 딸의 아버지가 예비사위를 근친상간을 한 인간 말종이라고(오해하여), 거침없이 쏟아내는 부정한 사례들에는 없지만, 테세우스-파이드라-휩폴뤼토스의 신화(비극)는 이 희극과 씽크로율이 가장 높은 비극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이다. 그에 비하면 몰리에르는 무뎌 보이고, 셰익스피어는 어릿광대 티가 난다."

랑프리에의 <고전사전>에 실린 평가이다. 그렇다면, 당대의 시민들이 일상에서 겪는 실감나는 소재를 무대에 올려, 오늘날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는 세련미와 웃음을 창조한 메난드로스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다음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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