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병희 원전번역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출간되었다. 책정보에 나와 있듯이 <윤리학>은 <정치학>을 위한 개론서이면서, 정치학은 윤리학에서 그린 밑그림, 곧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보다 넓은 범위의 공동체 국가(폴리스)의 행복으로 확대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표지들은 이런 두 저작의 관계에 충실한 셈이다. '윤리학'을 읽으면서 떠올린 다른 책들의 어떤 대목에 맞춰,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이 책의 출간에 앞서 여러 권의 다른 번역으로 읽었다. 강독에 가까운 해설서도 나와 있어 읽었다. 그러나 어떤 주석이나 해설이나 강독보다도 텍스트 자체로 다가와야 하는 것이 번역의 1차 소임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러한 사전 독서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천병희의 '윤리학'은 안개가 걷힌듯 속도를 내서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당대(2013년)의 나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살아 숨쉬는 저작'으로 다가왔다.

일명 '산파술'이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대화의 상대방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일깨움이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학습법이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눈높이 학습법이며, 궁극으로는 자기주도의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교수법이다. 물고기를 먹는 법만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는 것이 앎의 시작이자 완성임을 역설하고 있다.

알다시피 소크라테스의 어머니의 직업은 산파였다. 요즘으로 치면 산부인과 의사였다. 우선은 아이가 안전하게, 가급적이면 아이 엄마의 산고도 줄이는 방법으로 태어남의 과정을 ‘케어’하는 것이 좋은 산파가 가진 자질이고 기술이며 재능이었으리라. 거칠지만 소크라테스가 부모 특히 어머니로부터 얻은 유산은 바로 그 어머니의 직업에서 받은 것이고, 그것을 가르치고 배움의 학습법으로 응용 발전시켰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부모의 역할은 조기교육이니 조기유학이니 대안교육이니 하면서 공교육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에 대한 못미더움 때문에 요란을 떨기 이전에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맡은 바 소임을 잘 해내는 그 자체로 자식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 바로 부모 자신들의 인생의 완성도에 있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에서 아리스토렐레스로, 고대 서양철학자 3대의 가교 역할을 하는 플라톤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선후의 두 학자 사이에서 묘한 상태로 낀 처지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지금 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트텔레스의 집안은 대대로 궁정 의사 집안이었다. 우리 역사로 치면 전의(典醫)였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 후기에, 궁내부의 태의원에 속하여 왕의 질병과 왕실의 의무(醫務)를 맡아보던 주임(奏任) 관직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집안 대대로 가업처럼 직업을 이어가는 흐름이었다고 하니, 일종의 업계의 비밀(노하우)을 유산처럼 대물림하는 절차가 반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과정의 되풀이를 통해 의술의 발전에 활력을 주는 측면도 없지 않았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의사라는 직업은 무엇보다 인간이 가진 몸의 건강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당시 불안정한 궁정의 상황이나 아버지의 이른 작고 등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사의 길을 걷지는 않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그는 인간의 행복을 규명해낼 뿐 아니라 만학(萬學)의 아버지로서, 이른바 인류에게 ‘학문’이라는 골치아픈 세계를 선물하게 되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준으로 어디까지가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생각이고, 어디서부터가 스승인 플라톤의 생각인지를 구분해내기란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두 스승이 주창한 이론은 소크라테스의 경우 지극히 상식적인 앎(상태)에서 논지를 전개하여,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이고 플라톤의 경우는 스승의 생각에서 출발하여 체계화와 심화의 과정을 거쳐 가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당위적이고 하여 심플한 측면이 있다. '좋음의 이데아'론이 그 대표라 할 것인데, 받아들이기만 한다면(마치 오늘날 상당수 종교가 믿음의 문제에 집착하고 그런 방향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것처럼) 흔히 하는 말로 ‘플라토닉한 사랑’처럼 어찌 보면 마음의 평안을 얻기란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스승으로부터의 독립의 꿈을 결코 놓지 않았으니, 의사 집안의 출신다운 사물과 개념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접근방법을 유전인자인 양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이상적으로 꿈꾸는 사랑에 비해 현실의 사랑은 구체적이고 팍팍하다. 사랑에 대한 다른 점들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만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관찰과 분석에 입각한 디테일한 문제로 다가오는 ‘문제적인’ 세상이었다. 결국 인간의 정신작용으로 분류할 수 있는 만족, 곧 인간의 행복의 문제에 대한 혜안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담았다는 점에서 그는 훌륭한 정신의 의사로서의 가업을 계승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유한 사상이냐를 구분해내는 문제도 스승과 스승의 스승의 뒤엉킴 못지않게 학문의 중요한 과제물일 것이다. 아카데미아에서 배우고 가르치면서 플라톤 문하에서 지낸 세월이 20년이다. 그의 초기의 저작들은 플라톤의 저작에서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대화편의 형식을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카데미아 시절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초기 저작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시학> 등 현존하는 그의 저작들은 후기의 학원내부용 교재였던 것이 책의 형식으로 묶이게 된 것들이다. 앞서 초기의 저작들이 책의 형식으로 묶여서 널리 읽히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 당대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과는 비교가 되는 점이다. 키케로(기원전106~43년)는 사는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대화편들을 읽은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몰(기원전 384~322년) 연대를 고려하면 상당히 중요한 기록이다.

“이 시기(아카데미아에서 20년)에 그는 스승인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윤리학과 정치학에 관한 많은 대화편들을 써서 출간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체가 유려하다고 키케로(Cicero) 등에게 칭송받던 그의 대화편들은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이 책 <옮긴이 서문>에서)

 

키케로가 자신의 저서 『의무론』에서 아들(뤼케이온학파, 일명 소요학파, 아리스토텔레스의)과 달리 자신은 아카데미 학파에 속함을 밝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아카데미아에 소장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아리스토렐레스의 초기 대화편들을 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아카데미아 학파와 소요학파는 양자 모두 소크라테스계열과 플라톤계열에 소속되고 싶어하니까, 진정 나는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을 테니 소요학파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의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네 자신이 책들의 내용 자체에 대해 판단을 내리도록 하라.”(<키케로의 의무론> 18면, 허승일 옮김)

이런 키케로가 탐독한 초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의 영향은, 다름 아닌 키케로의 저서 <우정에 관하여>와 <노년에 관하여> 등에 시사점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플라톤이 숱한 자신의 대화편에서 직접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듯이, 키케로의 경우도 ‘우정’의 소중함과 ‘노년’의 즐거움, 곧 생을 어떻게 마감하느냐에 대한 심오한 문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자리에 본인은 없다. 오히려 나는 다만 기록자일 뿐이다, 라는 설정을 통해 설득력을 배가시키는 장치를 사용한 것인데, 나는 이것이 플라톤과 조금 다른 방식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가진 대화편 형식에서 참고한 바가 없지 않으리라, 추정해본다.

또 하나, 키케로에게서 발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의무론>을 집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과도 같은 아버지의 당부 말씀인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전달하는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그러니까 키케로의 경우는 편지 형식으로 직접 아들에게 들려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에 의해 정리되었다고도 하고, 그저 아들에게 ‘헌정한 책’으로서의 의미만 있을 뿐이라는 등 의견이 분분한데, 굳이 아들을 독자로 특정하지 않고 이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어쨌거나 키케로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에게 윤리학을 남겼듯이, <의무론>을 남기고자 한 것으로 판단할 때 흥미로운 관전포인트가 생기는 셈이다.

더구나 조선 후기의 다산 정약용[1762(영조 38)∼1836(헌종 2)] 유배지에서 망가진 집안의 신세를 직시하고 분발할 것을 아들들에게 강조하는 편지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창비)까지 연동하여 읽는다면, 유의미한 독서가 되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에게 주는 형식의 <윤리학>을 집필하면서도, 이 책의 쓰임에 대해 잘 파악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듯 하다. 윤리학 1권 제10장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가?” 제11장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운세가 죽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가” 등에서 솔론을 언급하고, <일리아스>의 프리아모스 왕의 일생을 거론하면서 언급하는 얘기들이 그러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1장 끝에서 다음과 같이 논의를 맺는다.

“따라서 친구들의 행운 또는 불운이(1) 죽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은 미치지만(2), 그 영향은 행복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거나 그와 비슷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그런 종류나 그런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당대는 물론이고 이후로도 그 명성이 높거나 평판이 좋은 사람을 살았던(2) 이의 후손이나 지인들의 삶이 불행을 맞이할 때(1), 죽은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논의하는 것, 세인들의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은 아니었다느니, 무수한 말을 하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의 인생은 아버지의 인생일 뿐이지 않을까, 당연하지만 촘촘하게 행복의 이모저모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인망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듯이 살피고 있다.

이 말은 동양의 역학(사주)으로 돌아와 이른바 사주, 생년(生年), 생월(生月), 생일(生日), 생시(生時) 가운데, 자신의 태어난 시각 곧 ‘생시’는 말년운(末年運)인데, 이 말년운이 아직 펼쳐지지 않은 미래운으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주니 점이니 해서 그 분야 전문가들을 수소문하여 대가를 지불하고 미리 알고자하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었다고 하자, 노년의 행복을 무엇인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하고 특히 행복하게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한(餘恨)을 두고 떠나는 일생은 결코 행복했다 말할 수는 없으니까. 바로 이 때에 가장 큰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손들이 대대손손 행복하게 살아갈 것으로 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아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왕조도 아닌데 권력을 3대 세습하는 북한이나 자기들이 이나라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는 것처럼 은근히 과시하지만 알고 보면 부의 세습과정에 불과한 삼성가의 모습도 궁극에는 모든 인간이 가진 행복이라는 프레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다른 형태의, 처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자손들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고, 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도록 교육에 열을 올리고, 기러기아빠와 그 엄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공교육을 맡은 교사가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대안학교로 보내는 경우와도 같이(아이가 원한다는 것을 전제로 진학하는 것으로 알지만, 아이가 깨닫기 전에 부모 입장에서 이런 교육은 아니다라는 선험적인 결론이 먼저인 경우가 일반형일 것이다, 그 밖의 과외 운운하는 과열된 교육열에 대한 운운을 또 할 필요가 있겠는가)-김두식 교수가 <불편해도 괜찮아> 초반부에서 자식교육에 관한 우리의 현 상태를 적시하듯이,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것이 인간이고 인생인 것을~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돋보이는 점이 바로, 자식인 니코마코스는 편집이나 제작과정에서든 아버지가 너에게 준 것이라고 제목에서부터 못박아 두어서이든, 잘 참고하여 좋은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은근하게 담았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혹자는 제목에 아들 이름을 넣은 그 자체에 대해 아버지의 ‘욕심’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뛰어난 행적을 남긴 조상의 비석을 남길 때 그 조상만이 아니라 후손들의 이름도 새겨진다는 점을 유념하시라, 비석은 선조에 대한 의무감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인정욕구가 더불어 새겨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제목을 지었다는 확증은 없으므로, 어쨌거나.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아테네의 10대 웅변가 중 한 사람인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338년)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며 키케로가 남긴 한마디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가장 훌륭한 그리고 오래된 리뷰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와 이소크라테스에 대해서도 나는 똑같이 생각하는데, 그들 각자는 자신들의 연구에 심취한 나머지 서로를 경멸했다.”(의무론)

플라톤이 광장에서 연설했다면, (플라톤의 제자로 아테네의 유명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가 플라톤에게서 배운 바를 계속 연구하여 발표하기를 원했다면, 둘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극히 수사적이고 눈부신 저작활동을 하였으리라고 키케로는 이들 두 쌍의 비교의 연장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평가하고 있다. 메시지의 전달 방식으로 말을 선택했느냐 문자를 선택했느냐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의 방식을 계승한 사람이면서, 보편적인 사실(진리)에서 근거를 찾아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나갔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제자로서의 면모를 저작에 담아냈다. 책의 제목에만 충실하자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일종의 지침을 아버지로서 남긴 것인데, 단지 니코마코스에게만 맞춤한 것이 아니고 훗날을 살아갈 모든 후배들을 위한 선배 아리스토텔레스의 따듯한 사랑과 꼼꼼한 배려를 담은 것이 이 책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고 꿰어야 보배다. 부뚜막에 소금이라도 집어넣어야 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개론서이다. 달리 얘기하면 정치학은 윤리학의 밑그림이고 행복론의 적용범위를 보다 큰 사회로 국가(폴리스)로 확대한 것이라 할 것인데, 공정사회를 외치던 지난 정부 시대를 살면서 숱한 국민들이 왜 ‘정의린 무엇인가’ 타령을 했는지, 다음 정부인 2013년 현재는 우리는 우리가 간직했어야 할 도덕성(윤리)이 그 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확인하고 맞이하고 있다. 기간에 여러 권의 윤리학 번역서들이 나왔고, 그 가운데에는 원전번역도 있지만, 학문 차원에 앞서, 쉽게 읽고 자신의 삶에 우리 일상과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데에 적시타와 같은 출간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서들)의 개념어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70대 중반의 희랍라틴어 원전번역의 노전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새롭게 펴낸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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