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았다. 참 좋은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를 읽고 원작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마침 주부들이 참여하는 고전읽기모임에서 플루타르코스의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로 토론할 때였는데, 이 영화를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에 따라 극장으로 간 것이다. 순전히 리차드 파커라는 영화 속 뱅골 호랑이의 이름과 그 시튜에이션이, 원작소설을 읽지 않았음에도 어딘지 익숙하다는 느낌,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센델의 책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다가 다시 펼치면서 아래의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육지에서 1600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을 표류했다. 이들이 타고 있던 미뇨네트 호는 폭풍에 떠내려갔고, 구명보트에는 달랑 순무 통조림 캔 두 개뿐, 마실 물도 없었다. 선장(더들리), 일등항해사(스티븐슨), 일반 선원(브룩스)이 살아남는데, 신문은 이들이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보도한다.
그런데 그 구명보트에는 네 번째 승무원이 있었다. 집무를 보던 열일곱 살 남자아이 리처드 파커, 고아인 그에게 긴 항해는 처음이었다. 그도 구명보트에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 무슨 일이 있었을까? 표류 사흘째까지 그들은 순무를 정해놓은 양만큼 조금씩 먹었다. 나흘째 되던 날은 바다거북을 한 마리 잡았다. 이들은 며칠을 더 연명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던 날, 음식이 바닥났다. 이때 파커는 구명보트 구석에 누워 있었다.

선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바닷물을 마셔 병이 난 것. 고통스런 하루하루가 가고 19일째 되던 날, 선장 더들리는 제비뽑기를 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정하자고 했다. 그러나 브룩스가 거부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한다. 다음 날, 선장 더들리는 브룩스에게 고개를 돌리리고 말하고는 스티븐슨에게 파커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몸짓으로 전했다. 선장은 기도를 올리고,  파커에게 때가 왔다고 말한 뒤 주머니칼로 파커의 경정맥 급소를 띨렀다. 양심상 섬뜩한 하사품을 거절하던 브룩스도 나중에는 자기 몫을 받았다. 나흘간 세 남자는 아이의 살과 피로 연명했다. 그리고 24일째 되던 날 이들은 구조되었다.

2010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상 소개된 예화를 기억할 것이다. 실화라는 얘기다. 그리고 살아 남은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브룩스는 검찰측 증인으로 출석했고, 더들리와 스티븐슨은 피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은 파커를 죽여 그를 먹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피고측은 한 사람을 죽여 세 사람을 살릴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약하고 병에 걸렸으며 무엇보다 부양가족이 없는 파커가 적절한 후보였다고. 마이클 샌델은 2장 '최대행복 원칙_공리주의' 초반에 이 얘기를 소개하며, 제러미 반담의 공리주의 소개와 함게 자기 주장을 펼친다. 

흥미롭지 않은가. 항해중 조난과 표류, 구명보트.. 라는 단어와 더불어 17세 소년인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등장하는 뱅갈 호랑이의 이름도 리처드 파커이다. 1월초에 개봉된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브 오브 파이>의 원작소설은 <파이 이야기>(얀 마텔 저/공경희 역, 작가정신 , 원제 Life of Pi)다. 2001년 출간 후 이듬해 부커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주요 언론으로부터 ‘『로빈슨 크루소』『걸리버 여행기』『백경』을 잇는 소설’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소설’ 등의 극찬을 받았다.

부커상(The Booker Prize)은 '부커 맥코넬상'의 약어로, 해마다 지난 1년간 영국 연방 국가에서 영어로 씌어진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수여된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소설문학상이라 할 수 있는데,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고 한다.

문학성은 물론 대중적 즐거움까지 갖춘 이 작품의 황홀한 상상력을 스크린으로 옮기고자 여러 영화감독이 시도했지만, 그 타이틀은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이 거머쥐게 되었고 그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중인 것이다. 소설은

1부 토론토와 폰디체리

2부 태평양

3부 멕시코 토마틀란의 베니토 후아레스 병원

와 같이 3부이다. 영화에서 다루는 비중은 2부>1부>3부 순이다. 2부는 소년 파이가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 벵골 호랑이 등의 동물과 함께 227일간 태평양의 험난한 파고를 헤쳐 나가는 무섭고도 기묘한 생존기록이다. 3부는 호랑이와 공존하며, 살아돌아온 이야기를 도무지 믿지 않은 인간들(일본인 선주 관계자)에게 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파이가, 구명보트 위에서의 동물들을 선박에서 생존한 사람들도 대체하여 인간들의 이성에 부합하는 식으로 들려주는 꾸민 이야기다. 3부의 이 대목은 영화의 러닝타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별로이지만 반전이 이뤄지는 대목이다. 영화에서 장황하게 보여준, 2부의 탐험기가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그들의 원하는 식으로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파이는 말한다. 내 엄마를 죽인 주방장을 자신이 직접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앞서 소개한 1884년 여름 대서양에서 생긴 일을 이쯤에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발상에 도움을 준 실제 사건이 이 소설 3부에서 믿거나말거나 식으로 임기응변으로 꾸며대는 얘기처럼 문제를 던지니 하는 소리다.

 

파이가 들려주는 얘기는 궤변이지만 진실이다. 무엇을 믿을까? 눈에 보이는 것, 상식에 가깝고 사실적인 것, 인간들끼리 생존을 위해 살육을 했으므로 판사가 판결해야 하는 것, 판사는 진실을 찾아야 하지만 그 진실은 신앙(신념)의 문제와 맞선다. 어쨌거나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 속 뱅골 호랑이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라는 사실이다. 소설 1,2부에서 리처드 파커는 호랑이의 이름이지만 3부에서 리처드 파커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된다. 1884년 대서양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인도에서 캐나다로 향하는 화물선에서의 조난이라는 배경으로 바뀐 소설의 모티브를 추정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공리주의를 논의하기 위한 예화였고, 그러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법정에서 유죄여부를 가리는 사건이 되었다. 이쯤에서 고민해볼 문제는 위 소설의 경우, 생존을 위해 동물이 희생된 경우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데, 사람이 희생된 경우는 1884년의 사건처럼 법으로 죄과를 판단해야할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주방장이 파이의 엄마를 죽였고, 복수 차원에서 파이는 그 주방장을 죽였다. 결국 살아남은 사람은 파이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파이에게는 죄가 없는 것일까? 동물과 인간의 차이 운운하는 것은 비약인 듯 하나, 마이클 샌델은 위의 책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여러 차례 인용하는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나왔다.

샌델은 정치학의 아주 일부를 예화로 들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데, 독자들에게 <정치학>이라는 녹록치 않은 책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뿌듯함을 안겨준다. 정치학을 비롯하여 몇몇 주요저작들의 리뷰를 담은, 책을 다룬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음에도. 암튼, 독자들은 힘들더라도, 소개받은 저작들을 충실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암튼, 앞선 명제는 '인간은 동물이다'를 기본 전제로 한다. 그리고 정치학의 저자는 국가공동체의 본질을 규명하면서 이와 같은 명제를 제시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20면)이라는 대목이다.

"인간이 벌이나 군서 동물보다 더 국가공동체를 추구하는 동물임이 분명해졌다. 자연은 어떤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logos)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단순한 목소리는 다른 동물도 갖고 있으며, 고통과 쾌감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다른 동물들도 본성상 고통과 쾌감을 감지하고 이런 감정을 서로에게 알릴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해한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밝히는 데 쓰인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차이점은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21면)

이런 인식의 공유에서 가정과 국가가 형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얘기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 차별화된 능력을 가졌음에도 어떤 인간들은 동물보다 더 사악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소설)에서 소년 파이와 교감을 나누고, 생존을 위한 공동운명체임을 인정하게 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 대해, 단지 소년에 의해 조련된 결과라고만 할 수 있을까? 3부에서 동물들을 인간들로 대체하는 건 납득을 하면서도, 뱅갈 호랑이 리처드 파크와 동시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이라야 하므로, 동물은 이러해야 한다, 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이게 되는 것,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nomos)과 정의(dike)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정치학)

무장한 불의는 다루기 어렵다. 생존을 위해 소년을 잡아먹을 수 있는 호랑이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인간은 지혜와 탁월함을 위해 쓰도록 무기(대표적으로 언어)를 갖고 태어나지만, 이런 무기들은 너무나 쉽게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 쓰일 수 있다. 그래서 탁월함(arete)이 없으면 인간은 가장 불경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색욕과 식욕을 가장 밝히는 존재가 된다. 마침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하는데,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주고, 정의감은 무엇이 옳은지를 판별해주기 때문이란다. 언어를 가진 인간들은 소통하고, 공동체를 이뤄 공공의 목표를 이뤄간다. 인간에게는 있으나 동물에게는 없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학을(원전번역으로) 국내 최초 완역한 옮긴이(천병희 교수)는 주석에서 그리스어 arete(아레테)라는 단어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가 또 있을까? 라고 질문한다. 여기서는 '탈월함'으로 번역했으나, 미덕, 덕, 자질로 번역하는 게 더 적합한 경우가 많다는 것, 어쨌거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도,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도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을 통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규명하고 있다. '동물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긴장감 속에서 교훈을 전하는 숱한 우화들이 바로 여기에서 탄생하고 그 존재감을 유지한다.

 

우화의 일종이라고 할 플루타르코스의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그리스로마 에세이>와 <수다에 관하여>에 수록)에는 이안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 담긴 철학이 뭔가, 곱씹어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데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인도 소년 파이가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 벵골 호랑이 등의 동물과 함께 227일간 태평양의 험난한 파고를 헤쳐 나가는 무섭고도 기묘한 생존기록이다."
소년과 뱅골 호랑이의 공존, 그들의 교감, 다른 말로는 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판타치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에는 진정한 친구는 제2의 자아이다. 나를 사랑하듯이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우정이다, 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들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점은 하늘에 사는 것이든 물속에 사는 것이든 뭍에 사는 것이든, 또 길들여진 것이든 야생의 것이든 짐승들도 마찬가지라네. 우선 짐승들은 모두 자신을 사랑하네. 이런 감정은 모든 생물이 똑같이 타고났기 때문이네. 그다음 짐승들은 자신과 하나로 엮일 수 있는 같은 종류의 다른 동물들을 끊임없이 찾는다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짐승들을 부추키는 충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사랑과 닮았다네. 사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지. 인간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인간들도 둘이 거의 하나가 될 만큼 정신적으로 서로 완전히 결합될 수 있는 짝을 찾기 때문일세"(<우정에 관하여> 81절 전문)

 

'동물'이라고 하면 인간도 포함되니까 '짐승'이란 단어로 번역함으로써 변별성을 둔 것인데, 이것은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에도 적용이 된다. 어쨌거나 인간과 동물은 자연의 일부로, 그 자체가 자연인데, 이 영화의 리뷰에서 '철학적인 뭔가가 있다'라고 하는데, 그 뭔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약간의 탐사를 해본 글이다. (아래는 영화의 스킬컷, 소년과 호랑이, 호랑이와 소년)

 파이가 바라보는 뱅골 호랑이 리터드 파커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바라보는 파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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